#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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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 오메가라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 너무 독한 억제제를 발현할 때부터 먹어서 부작용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 부작용. 그럼 그럴 수 있어요. 페로몬이 유독 강한 알파들이 있잖아요. 잘 볼 수는 없지만, 우성알파 페로몬에 노출이 되거나 하는 경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부작용이라는 게 평생 가기도 하지만, 또 약을 끊으면 서서히 기능이 돌아오기도 하니까요.”
“아…. 우성알파….”
약사의 말을 들으니 권태정을 처음 만난 날부터 페로몬을 느낀 게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우성이라고 권태정이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아마 우성일 가능성이 클 것이었다. 그래서 권태정을 볼 때마다 그 페로몬에 자꾸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거고,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거라 생각하니 손끝이 화끈거렸다.
“…감사합니다.”
친절히 설명해 준 약사에게 꾸벅 인사한 이겸이 체크카드를 내밀어 억제제를 결제했다. 이만 원이 넘는 돈이 빠져나가는 것에 사치를 한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을 구매한 거니 너무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통장에 남은 돈은 전부 구대범에게 송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번에 천만 원을 보내면 또 연락을 하거나 찾아와 추궁할 가능성이 크기에 적당히 월급에 조금씩 더 얹어 여러 번에 거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약국을 나서기 전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따라 억제제를 두 알 삼킨 이겸이 남은 약을 소중히 다시 상자에 넣어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약을 먹었으니 오늘 하루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알파의 페로몬이 조금씩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 건 아니라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강하고 확실한 억제제가 아니어도 아직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약국을 나선 이겸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빛에 아주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습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한 바람이 따뜻하게 불어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이겸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권태정이 사 준 운동화를 눈에 담았다.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혹시 권태정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신고 나온 것이었다. 권태정을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날씨가 좋으니까 괜찮았다. 운동화를 사 줄 때의 권태정처럼 따뜻하니까.
“…….”
이겸은 마음 한편으로 괜찮지 않은 마음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운동화 위로 떨어지는 아주 따뜻한 빛 속으로.
* * *
저녁 시간이 지나고 몰려든 사람들의 주문을 모두 받고 한숨 돌린 이겸은 매장용 컵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집에 내내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마감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어디서 본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이겸은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다가 곧 그가 강지훈의 친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잔뜩 긴장했다. 굉장히 거칠고 제멋대로라는 걸 겪어 본 이유였다.
“어서 오세요.”
“잘 지냈어?”
“…네. 주문하시겠어요?”
“음,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본 사이즈. 너도 뭐 하나 마셔. 사 줄게.”
“…괜찮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본 사이즈 한 잔 주문 받았습니다. 사천오백 원입니다.”
남자가 내미는 카드를 받은 이겸은 결제를 마치고 영수증과 함께 내밀었다. 카드는 넣고 영수증은 대충 구겨 이겸이 있는 쪽으로 툭 던진 남자가 웃었다. 이겸은 가만히 그 영수증을 집어 카운터 아래에 있는 휴지통에 버렸다.
“준비되면 픽업 데스크에서….”
“전에 그 새끼 애인이야?”
“네?”
“우성 맞지. 존나 장난 아니던데. 너 어떻게 우성을 물었냐?”
남자가 권태정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안 이겸은 대꾸하지 않고 샷을 내려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남자한테 나는 특유의 화한 페로몬 향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나도 우성 첨 봤거든.”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트레이 위에 남자가 주문한 커피를 올린 이겸이 그사이 정리대에 놓인 컵을 가지러 카운터를 나섰다. 남자가 그런 이겸의 뒤를 따라와 계속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
“사귀는 거 맞아?”
“…그게 왜 궁금하세요?”
“너랑 만나고 싶어서.”
“…전 아니에요.”
“나 잘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하는 것에 바라보자 남자가 두 손을 들어 비비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손짓을 하며 웃는 얼굴만 봐도 성적인 의미가 다분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겸은 다시 몸을 돌려 정리대 위에 놓인 트레이와 컵을 집어 들었다. 그런 이겸을 보던 남자가 뒤에서 몸을 겹치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놀란 이겸이 들고 있던 컵과 트레이를 그대로 떨어뜨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제야 남자가 슬그머니 몸을 뗐다.
“…뭐 하시는….”
불쾌함과 동시에 확 치미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선 이겸은 남자의 어깨 너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언제 온 건지 카페로 들어온 권태정이 이겸을 보며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듯 입술 위로 검지를 붙인 채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다시 이겸에게로 손을 뻗은 순간 권태정이 뒤에서 남자의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눈치가 없는 걸까. 겁대가리가 없는 걸까. 이겸이한테 애인 깡패라는 말 아직 못 들었어?”
남자는 권태정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덩치도 작고, 겉으로 보기에도 느껴지는 위압감 자체가 달랐다. 이겸은 남자가 권태정에게 질질 끌려나가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얼른 그 뒤를 따라 가게를 나갔다.
“실장님!”
남자를 카페 옆 골목으로 끌고 들어간 권태정이 인정사정없이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는 기다란 다리를 들어 남자의 턱을 걷어찼다. 그 폭력적인 행동에 놀란 이겸이 가까이 다가서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권태정이 남자의 어깨를 구둣발로 짓밟은 채 이겸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만들어 줬던 거 또 만들어 줘. 그거 마시고 싶어서 왔어.”
“…….”
“식기 전에 들어갈게.”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싱긋 웃은 권태정이 더 험한 꼴을 이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이겸은 남자가 권태정의 발목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다가 얼른 뒤돌아 골목을 벗어났다.
한 번씩 권태정이 깡패라는 것을 확 느끼게 해 주는 일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겸은 카운터로 들어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권태정이 한 말을 떠올리고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장면을 봐서 무서워야 하는데 그것보다 권태정이 여기 왔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와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이겸은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우유 스팀을 해 핫초코를 만들었다. 컵에 조심히 담고, 뚜껑까지 닫았을 때 권태정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따뜻한 걸 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실장님, 여기요….”
“고마워.”
너무 뜨겁지 않은 것을 한 모금 마신 권태정이 웃음 지었다. 갑자기 이게 너무 마시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걸 핑계로 이겸의 얼굴도 보고 다시 원래 패턴을 찾으면 되겠다 싶어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어떤 새끼가 갑자기 이겸을 뒤에서 끌어안는 걸 봐 버린 것이었다.
폭력은 나쁜 거지만, 말로 해서 안 듣는 새끼들은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이겸을 끌어안은 새끼가 그때 골목에서 봤던 강지훈의 친구란 새끼인 걸 확인한 다음에는 더더욱 패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권태정은 조금 전 제 발목을 잡은 채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한 번 더 걷어차이고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차라리 이럴 때는 이겸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짜 깡패가 되고 싶었다. 그랬다면 아버지의 체면이나 저의 위치, 태성그룹의 미래 같은 걸 생각하지 않고 더 제대로 죽여 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맛있다. 이게 갑자기 너무 마시고 싶었어.”
전에 식은 음료를 끝까지 마신 권태정을 떠올린 이겸이 작게 웃었다. 제가 만들어 준 음료가 또 마시고 싶었다는 것도, 맛있다면서 따뜻한 것을 마시는 권태정을 보는 것도 무척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이겸은 조금 전 있었던 일 따위는 금세 잊고 핫초코를 마시는 권태정만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끝나려면 멀었어?”
“아…. 이제 손님들한테 영업시간 끝났다고 말씀 드리고, 설거지 하고…. 쓰레기만 버리면 돼요. 청소는 좀 전에 다 했어요.”
“내쫓는 건 내가 할게.”
“네?”
“넌 너 할 일 해.”
싱긋 웃은 권태정이 아직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 정중히 상체를 숙여 웃음으로 이제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말을 전했다. 권태정이 눈을 맞추며 웃자 손님들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나가면서도 계속 돌아보기도 했다. 이겸은 어떤 여자 손님과 서서 대화하는 권태정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궁금했다. 제가 궁금해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거기로 시선이 닿았다. 여자 손님이 권태정에게 인사하고 카페를 나간 뒤에야 이겸은 작게 안도와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내보냈어, 다.”
“…감사합니다. 얼른 설거지하고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 앉아서 드시고 계세요. 뭐 다른 것도 드릴까요?”
“아니야, 이거면 돼.”
의자를 하나 빼내 앉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얼른 손님들이 놓고 간 컵을 가지고 가 설거지했다. 그리고 아까 미리 묶어 뒀던 플라스틱 컵이 든 커다란 봉지 하나와 일반 쓰레기가 든 커다란 봉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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