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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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위라도 하지 않으면 딱 죽어 버릴 만큼 흥분한 것 역시 아주 오랜만이었다. 몇 년 전 몸살이 심하게 와서 평소처럼 강한 억제를 할 수가 없어 약한 호르몬제를 맞고 약하게 온 러트를 보냈을 때 이후로 처음이라 강하게 느낀 사정의 쾌감이 오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 쾌감을 맺게 한 정확한 상대가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길게 숨을 내쉰 권태정은 몸을 마저 씻고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미쳐서 다시 운전대를 잡고 철거촌으로 가지 못하게 양주를 한 잔 마시고 침실로 향했다.
정리하지 않고 나와 흐트러져 있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운 권태정은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충동적으로 이 집을 나갈 때도 지금처럼 비가 오고 있었는데 사고를 치고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오기였다. 안 와도 된다는 이겸의 말에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 그냥 무작정 집을 나선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비가 와 출근이 늦었다는 간병인을 만났고, 텅 빈 컨테이너에 홀로 있으며 괜히 왔다고 후회할 때쯤 컨테이너로 다가오는 이겸을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겸이 어느 지점에 서서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또 뒤로 돌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낼 때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이겸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알고 싶었다. 왜 저렇게 망설이면서까지 저에게 올 마음을 먹었던 건지.
한참 만에 걸음을 뗀 이겸이 컨테이너로 다가와 더는 창으로 볼 수 없게 된 권태정은 작게 문손잡이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겸이 문 앞에 와서 문손잡이를 잡고 또 조금 전처럼 망설이고 있다 생각하니 모든 것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저한테 할 말이 있어 온 거라면 이렇게 망설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유가 없으니까, 저도 이 빗속에 컨테이너까지 굳이 온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까 망설이고 있다는 걸 권태정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묻고 싶었다. 왜 저한테 온 건지. 도대체 왜. 그래서 그 망설임을 끝내 주려 문을 먼저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보는 순간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입술을 집어삼킨 것은 충동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
후회는 안 해도 묘한 자책은 분명 있었다. 이겸은 저의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또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너무 어린애이기도 했다.
열두 살이나 어린애를 숨도 못 쉬게 밀어붙인 걸 생각하면 솔직히 조금 찔리기도 하고 함부로 오메가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릴 적부터 세뇌가 될 때까지 가르치고 또 가르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약간의 죄책감이 후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좋았으니까.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몰두하게 되고,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든 사람은 처음이었다.
“…….”
다시 긴 숨을 내쉰 권태정이 가운이 흐트러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뒤척였다. 눈을 떠도 또 눈을 감아도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뻐근해지는 것과 동시에 심란해진 권태정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여전한 제 침대에서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모르는 척 눈을 감았지만, 권태정은 사실 다 알고 있었다.
아침의 충동적인 외출 하나로 저와 이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 * *
비는 꼬박 이틀을 더 오다가 그쳤다. 비가 오는 내내 이겸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이겸은 할아버지와 함께 TV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간병인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적당히 평화롭고, 어색할 만큼 여유로운 며칠을 보내는 동안 권태정의 연락은 없었다.
혹시 또 컨테이너에 왔나 몰래 근처에 가서 보기도 했지만, 이틀 내내 컨테이너는 비어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겸은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비가 그친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권태정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겸은 종일 방에 틀어박혀 권태정을 생각했다. 생각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머리에 맺혀 계속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치면 잠이 들고, 또 눈을 뜨면 멍하니 그를 떠올렸다. 태어나 이렇게 긴 주말은 처음이었다.
월요일에는 아침 일찍 억제제를 사려 집을 나섰다. 일단 통장에 얼마가 있나 확인을 하려고 은행 에이티엠 부스에 간 이겸은 천만 원이 입금된 것에 놀라 몇 번이나 통장을 확인했다. 보낸 사람 이름에는 권태정이 찍혀 있었다.
시급으로 십만 원씩을 준다고 한 게 진짜였다니…. 이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금액이 적힌 통장을 조금 더 멍하니 보다가 한구석으로 가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실장님’이라고 적힌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이겸은 잠시 벽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고, 또 누르려다가 마는 것을 열 번이나 반복했다.
며칠 전 키스한 이후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어 먼저 전화를 건다는 게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통장에 들어온 돈을 본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심호흡한 이겸은 겨우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째 지날 때 전화 받는 소리가 났다.
-응. 이겸아.
생각지도 못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이겸은 너무나도 쉽게 들뜨고 또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런지 괜히 더 마음이 울렁였다. 결국, 한 자리에 서서 받을 수가 없어 작은 에이티엠 부스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저…. 은행에 왔다가… 돈이 들어온 걸 봐서요.”
-아, 돈. 응, 내가 넣었어. 대충 일주일 열 시간씩 같이 있었다고 치고.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많은 것 같아도 그냥 받아. 난 준다고 말했고, 넌 그러겠다고 했잖아. 네 마음 편하게 대충 적당히 용돈이나 주듯 달라면 뭐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겸아. 약게 굴어. 네가 달라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준 거잖아. 기회다 생각하고 빼먹을 수 있는 만큼 빼먹어. 전에 내가 말한 적 없나?
그냥 감사하다는 말로 받기에는 정말 너무나도 큰돈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권태정이 제 상황을 알고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냥 처음에 약속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이겸은 통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한 수화기 너머의 권태정을 의식하며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거저 주는 거 아니야. 나 편하자고 네 시간을 돈으로 사는 거고, 넌 그 대가를 받는 거니까 감사해할 것도 없어.
“…….”
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겸은 에이티엠 부스 벽에 고개를 숙여 머리를 댄 채 입술을 달싹였다.
“…바쁘세요?”
-아니, 그냥 집에 있어. 넌? 은행 가려고 나간 거야?
“네…. 은행이랑… 약국에 가려고 나왔어요.”
-약국은 왜. 아파? 감기 걸렸어? 그때 비 맞아서?
조금 쌀쌀맞다는 생각이 들어 시무룩해졌던 마음 위로 권태정의 걱정이 내려앉았다. 이겸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뭐 살 게 좀 있어서요. 실장님은… 괜찮으세요?”
-나?
“그때… 실장님도 비 많이 맞으셨잖아요.”
-나야 뭐, 그냥 머리 좀 아픈 정도?
“약은 드셨어요?”
-응. 걱정할 거 없어. 멀쩡해.
소소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이겸은 괜히 찌릿한 손끝을 바지에 꾹 눌렀다. 권태정과 제가 모두 아는 ‘그날’의 이야기라 그런지 심장이 자꾸만 울렁이고, 그 뒤로 보이지 않는 권태정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겸은 그 이상의 안부나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어…. 그럼….”
오늘은 안 오시는 거예요? 입술 안쪽까지 묻은 말이 작게 흘러나오려 할 때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이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벽에 대고 있던 머리를 떼며 바로 섰다.
“…저 약국만 들렀다가 집에 바로 들어갈 거예요. 그리고 저녁에는 카페 일하는 날이라 카페에 갈 거고…. 끝나면 또 바로 집으로 갈 거예요.”
-그래,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린 이겸이 통화가 3분 10초를 통화했다는 표시와 함께 깜빡이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돈 이야기를 하려고 건 것은 맞지만, 사실 왜 ‘그날’ 이후로 다람동에 오지 않는지도 묻고 싶었는데 그건 말도 꺼내지 못해 마음이 조금 답답했다.
“…….”
사정이 있으시겠지. 사정이. 이겸은 저를 흘끗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얼른 에이티엠 부스를 나섰다. 그리고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상가에 있는 약국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아…. 오메가 억제제 주세요.”
“아, 억제제요. 잠시만요.”
몸을 돌려 약들이 잔뜩 놓인 곳에서 작은 약상자를 하나 집은 약사가 이겸의 앞으로 놓았다. 약상자에는 ‘강하고 빠른 효과의 페로몬 억제 효과!’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시겠지만, 완전히 억제하시려면 병원 가셔서 처방전 가지고 오셔야 해요. 시중에 파는 억제제는 효과가 있기는 해도 처방용 억제제에 비할 수는 없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저 그리고 뭐 하나 여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오랫동안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고, 오메가 기능을 못 하던 사람이 갑자기… 특정 알파의 페로몬만 맡게 된다거나 할 수가 있나요?”
이겸의 말에 약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이겸을 바라보았다. 이겸은 약사가 할 말에 괜히 긴장해 앞에 놓인 억제제 약상자를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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