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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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권태정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겸은 뒤로 손을 움직여 컨테이너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리자 빗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그 눈을 보며 이겸은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가지 마.”
명령과도 같은 말에 움찔하면서도 이겸은 컨테이너 밖으로 몸을 더 뺐다. 그리고 인상을 쓴 권태정이 제게 손을 뻗는 것을 보며 그대로 뒤돌아 컨테이너를 빠져나갔다.
“연이겸!”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겸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 위로 비가 마구 쏟아지고, 발을 딛는 곳마다 미끄러워도 달리고, 또 달렸다. 제가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열기로부터, 매달리고 싶은 감정으로부터… 권태정으로부터.
“씨발, 말 좀 들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순간 팔이 잡히고,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이겸은 뺨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느끼며 저를 잡아 세운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는 그가 씌운 까만 우산이 있었다.
“부르면 좀 듣는 척이라도 해라. 도망갈 거면 우산이라도 쓰고 가던가. 미쳤어? 비 맞으면 픽 쓰러지게 생겨가지고, 씨발….”
“…지, 집에… 집에 갈래요….”
“그래, 가. 누가 가지 말래?”
이겸은 우산 속에서 권태정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우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 어이가 없어진 권태정이 성큼 다가가 이겸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인사 받으려고 온 것 같아?”
“…….”
“진짜 돌겠네.”
“…….”
“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니, 혼자 못 가. 우산 없잖아, 너. 네 우산 내 차 앞에서 뒹굴던데.”
권태정은 이겸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그쪽으로 더 우산을 기울였다. 이미 젖었지만, 그래도 이 비를 다 맞고 집까지 가게 둘 수는 없었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포기해. 씨발, 우산만 씌워 준다고. 고집부릴 일이야? 예쁜 게 씨발, 고집만 세선.”
중얼거린 권태정이 도망가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이겸을 흘끗 보다가 어깨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당겼다. 잠자코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이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충동과 흥분에 물든 키스를 퍼붓고 난 저도 혼란스러운데 그걸 다 받고만 있었던 이겸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이 비를 다 맞고 집에 가는 것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려면 우산이라도 쓰고 가던가.”
“…….”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가서 따뜻하게 씻고 이불 덮고 있어. 알았어?”
“…네….”
반쯤 권태정의 품으로 겹쳐져 닿은 몸이 따뜻했다. 젖은 제가 닿아 축축할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안은 채 가는 권태정을 의식한 이겸이 따끔한 심장과 시큰한 목 안쪽을 느끼고 괜히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보잘것없는 채로 받는 다정함은 자꾸만 이겸을 무너뜨렸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집은 금방이었다. 초록색 대문 앞에 선 이겸은 다시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금세 다시 뒤엉킨 시선에 우산이 대문 쪽으로 기울고 권태정이 쏟아져 내렸다. 이겸은 다시 맞물리는 입술에 뒤로 밀리며 권태정의 팔을 잡았다.
“…아…. 흐읍….”
권태정의 팔은 잔뜩 젖어 있었다. 어두운 색의 슈트라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 몰랐는데 저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느라 팔이 다 젖은 모양이었다. 이겸은 흠뻑 젖은 권태정의 팔을 쥔 채 울먹였다. 저를 부르고, 우산을 기울이며 다정히 구는 권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 아니라는 듯 버텨 낼 재간이 이겸에게는 없었다.
“…으응….”
요란한 빗소리 안에서도 혀가 문질려 질척이는 소리가 전부 들렸다.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이 습기와 함께 피부에 달라붙고, 이겸은 그것에 약하게 달아올랐다.
우성알파의 페로몬에 열려 버린 감각이 흥분을 머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겸은 못 견디겠다는 듯 정신없이 파고들어 헤집는 권태정을 조금도 밀어내지 않았다. 벅차고, 숨이 또 제대로 쉬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하아….”
“…하.”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느릿하게 혀가 풀렸다. 권태정은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숨이 마구 흐르고, 창백한 뺨이 달아오른 이겸을 보며 침음했다.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대문 안으로 이겸을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 턱을 쥐고 입술을 찾았다. 차가운 공기 속 저의 체온으로 데워진 말랑한 입속으로 다시 혀를 넣자 이겸의 혀끝이 닿았다.
권태정은 그 혀끝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작게 앓는 이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기하게도 그 작은 신음이 빗소리를 뚫고 정확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어 아랫배까지 흘러내렸다.
그럴 때마다 이겸의 젖은 옷을 전부 벗기고 싶었다. 비로 물들어 차가워진 피부 위로 입술을 대고 다시 저로 온통 물들이고 싶었다. 코끝에 닿는 달착지근한 복숭아 향을 잔뜩 들이마시고, 과즙이 나올 때까지 여기저기 물고 싶기도 했다.
권태정은 복숭아 맛이 나는 것 같은 이겸의 혀를 빨며 우산을 들지 않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
비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얇은 티셔츠가 느껴졌다. 축축한 그 티셔츠 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던 권태정이 그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흐읏….”
비를 맞아 차가울 거라 생각한 피부는 예상외로 따뜻했다. 권태정은 이겸의 허리를 손끝으로만 매만지며 다시 혀를 깊게 얽었다. 이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우산 때문에 등이 완전히 비에 흠뻑 젖었지만, 권태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실, 아…. 실장님….”
이겸을 밀어붙이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없이 머금던 권태정은 귓가로 닿아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완전히 겹치고 있던 몸을 떼자 헐떡이는 이겸이 보였다. 권태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골랐다.
“들어가.”
“…네….”
대문을 연 이겸은 우산을 가지고 가라며 내미는 권태정에게 괜찮다 말하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방이 아니라 바깥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방 안에서 이겸이 왔냐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나쁜 짓을 하고 온 것처럼 놀라 겨우 대답하고는 힘이 빠져 세면대를 짚고 바닥으로 쪼그려 앉았다.
“…….”
비에 젖은 옷이 온통 피부에 달라붙어 축축하고 찝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축하고 부끄러운 것은 젖은 속옷이었다. 이겸은 속옷을 적신 것은 비가 아니라 권태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컨테이너에서도 또 집 앞에서도 저에게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던 권태정이 너무나 선명했다. 숨도 쉴 수 없게 밀어붙이던 느낌도, 또 그보다 다정히 입 안을 헤집던 느낌도 무엇 하나 싫은 게 없었다.
습기와 뒤섞여 저의 모든 곳으로 깊게 스며들던 권태정의 향과 저를 만지던 손길을 떠올리니 축축해진 속옷이 조금 더 젖는 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 억제제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이겸이 조금 더 몸을 웅크리며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도저히 떨칠 수 없는 그 얼굴과 목소리, 손길에 다시 한번 흠뻑 젖은 채.
* * *
차 시트가 젖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권태정은 젖은 슈트와 셔츠를 모두 벗어 버리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비를 맞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구질구질한 모든 것들이 몸에 달라붙는 기분이라 옷이 젖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사실 이렇게 옷이 흠뻑 젖는 경험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어렸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조금 젖거나 운전기사가 우산을 씌워 줘도 워낙 비가 와서 물방울이 튀어 옷이 젖는 정도였지 이렇게 슈트와 그 안에 셔츠, 몸까지 젖도록 비를 맞아 본 것은 처음이라 몹시 기분이 이상했다.
“…….”
결국, 이겸이 왜 컨테이너에 왔는지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문 앞에서 다시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그걸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간지럽고 달착지근한 키스가 모든 생각을 다 날려 버렸다.
복숭아 향이 나는 혀를 잔뜩 머금고, 문지른 기억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권태정은 저를 밀지 않고 잡은 채 키스를 전부 받고, 헐떡이던 이겸을 떠올렸다.
“…씹.”
키스할 때 발기했던 것처럼 아래로 힘이 확 들어갔다. 권태정은 겨우 가라앉았던 성기가 다시 발기한 것을 보며 욕을 뱉어 냈다. 손을 대지 않는 방법은 없었고, 이겸을 생각하지 않는 법 또한 없었다. 권태정은 말랑하고 뜨겁던 이겸의 입술을 떠올리며 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아….”
벅차하며 헐떡이던 얼굴이 지나치게 예뻤다. 솔직히 빗속으로 도망가 젖은 얼굴도 예쁘고, 대문 앞에서 저를 보기 어색해하며 눈동자를 굴리던 것도 예뻤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집 앞에서 다시 입술을 머금은 것은 불가항력적인 충동이었다.
저 때문에 울어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려 눈이 마주친 순간의 불안정한 호흡과 젖은 입술, 흔들리던 눈동자, 조금도 차갑지 않고 열이 올라 있던 피부…. 그 위를 문지를 때 터지던 신음.
“…아, 읏…. 씹.”
축축한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을 때 몸 안으로 가득 차던 페로몬 향과 귓가에 묻던 숨 같은 목소리. 권태정은 정신없이 저를 바라보던 이겸을 떠올리며 파정했다. 자위도 별로 하지 않아 아주 간만에 잔뜩 터져 나온 정액이 물에 뒤섞여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하….”
권태정은 자위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느낌이 싫어 평소에 자위를 잘 하지 않았다. 억제제를 먹고 있어 성욕 관리도 어렵지 않게 되고, 러트 때도 호르몬 제어를 하면 되니 딱히 제 성기를 잡고 흔들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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