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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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했어?”
“…네?”
“여기서 뭐 했냐고. 둘이.”
“…얘기만… 했어요.”
“둘이 눈 맞아서 나온 거 아냐?”
“아니에요! 자리가 불편해서…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담배 피우러 나왔는지 여기로 와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있었던 거지, 같이 나온 거 아니에요.”
권태정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겸은 두 손까지 저어 가며 필사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오해를 하든 말든 사실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권태정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뭐…. 눈이 맞든 다른 게 맞든 내가 알 바 아니기는 한데.”
“…….”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번복할 마음은 없었다. 전부 사실이니까. 이겸이 조금 전 본 그 알파랑 어떤 관계든 제가 조금도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이겸의 사생활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방송에 나가 시끄럽게 하지 않는 이상 이겸이 누구와 만나고 연애를 하든 저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아, 씹.”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묻힌 이겸을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지고, 좆같은 면상을 한 채 이겸을 위협하고 있는 그 알파 새끼를 죽여 버리고 싶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두 분 행복한 사랑하세요. 웃으며 박수나 치고, 어린 애들 불장난이나 구경하면 되는데 왜 제가 기분이 더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이에요.”
가까스로 짜증을 짓누른 권태정은 작게 들리는 이겸의 말에 짧게 숨을 내뱉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라는데, 이렇게까지 아니라는 얼굴로 말하는데 그냥 오늘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혼란스러워질 것만 같아 그만하고 싶었다.
“알았어.”
“…….”
“앞으로는 누굴 만나러 갔는데 저딴 놈 있으면, 아니, 씨발. 그냥 3개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마.”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누굴 만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게 도대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한마디도 할 말이 없다는 걸 권태정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예요. 아르바이트도 안 하니까 이제 지훈이 형도 볼 일 당분간은 없을 거고….”
따져도 모자랄 말을 듣고도 이겸은 ‘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큰 한 걸음만큼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이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겸에게 묻은 낯선 알파의 페로몬이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가도 되지만, 그냥 지금은 이겸이 저에게 오기를 바랐다. ‘왜요?’라고 물으면 이 또한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겸이 한 발자국만 저에게 와 주기를 원했다.
“너한테 그 새끼 냄새 나.”
“…….”
“이리 와. 없애 줄게.”
급히 만든 이유가 마음에 든 건지, 아니면 그저 말을 잘 듣는 건지 이번에도 이겸은 권태정이 원하는 것처럼 가만히 한 걸음을 옮겼다. 곤란한 순간을 피하게 해 준 게 고맙기도 하고,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 자리가 아직도 뜨겁기도 하고, 또….
“…….”
“…….”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을 맡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겸은 제 스스로 한 걸음을 옮겨 권태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겸보다 한참 큰 권태정이 몸이 그대로 무너지듯 내려와 이겸의 작은 몸을 확 끌어안았다.
마주닿은 몸으로 따뜻한 기운과 떨림이 마구 뒤섞였다. 한 손으로 이겸의 뒷머리를 감싸며 몸을 꽉 마주한 권태정은 아무 말도 없이 제 품에 안긴 이겸의 새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
이를 박아 넣고 싶었다. 새하얀 위에 제 흔적을 잔뜩 남겨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누가 봐도 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이겸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더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여전히 머리와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권태정은 겉으로 보이는 흔적 대신 이겸의 몸에 제 페로몬을 마구 묻혔다. 누군가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도 않도록. 조금도 느껴지지 않도록.
그 어떤 알파도 감히 이겸에게 손을 뻗을 수 없도록.
* * *
새벽부터 철거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을 깨울 만큼 요란한 소리에 눈을 뜬 이겸은 그게 빗소리라는 걸 눈치채자마자 이불 밖으로 나가 방문을 열었다. 비가 꽤 많이 오래 왔는지 처마 아래까지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어 신발 앞코가 젖은 게 보였다.
권태정이 사 준 운동화가 젖은 것에 놀란 이겸은 얼른 운동화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수건으로 물기를 조심히 닦고, 휴지로 바닥까지 닦아 신문지 위에 올려 두었다. 조금만 더 밖에 뒀으면 안쪽까지 물이 튀어 전부 젖었을 것이었다. 그 전에 들여놓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은 걸 확인한 이겸은 할아버지의 가슴 위로 이불을 올려 잘 덮어드리고 방 한쪽에 잘 놓아둔 운동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리 와.’
요즘의 저는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권태정과 얼굴을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풀어져 버린 걸까. 손짓 하나에, 오라는 말 하나에 발을 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기분에 휩싸이고, 그 알파의 냄새를 없애 준다는 말에 다가가는 이유가 있다고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권태정이 저를 끌어안았을 때 그 허리를 꼭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미쳤어, 정말.”
권태정의 페로몬 때문에 저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를 만난 뒤로, 그 정신이 멍해지고 두근대는 페로몬 향을 느낀 뒤로 모든 것이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떡해.”
자꾸 생각나. 무릎을 모으고 앉은 이겸은 그 무릎 위로 얼굴을 묻은 채 계속 권태정을 생각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이 집에는 권태정의 흔적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운동화도 제가 앉아 있는 이불도, 또 벽에 걸린 TV와 사라진 쾨쾨한 냄새까지…. 권태정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겸은 제 몸을 끌어안던 단단한 팔의 느낌과 목덜미에 닿던 숨, 그리고 한숨처럼 천천히 내려앉던 그의 숨소리를 차례로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코끝에 권태정의 향이 스미는 것 같았다. 잘게 몸을 떤 이겸은 몸에 미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전에 얼른 생각을 떨쳐야만 했다. 이겸은 흐트러진 자리로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
권태정의 페로몬을 느끼게 된 뒤로 다른 알파의 페로몬도 조금씩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어제 강지훈의 친구에게서 나는 화한 페로몬을 바로 알아차린 것만 봐도 그랬다.
이제 억제제를 다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알파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게 됐으니 알파들도 제가 오메가라는 것을 눈치채게 될 거고, 페로몬 제어가 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억제제….”
양질의 억제제를 살 여유가 없는 것은 3년 전과 똑같았다. 이겸은 슈퍼 아주머니가 구해다 줬던 싸고, 강력한 억제제를 어쩔 수 없이 떠올렸다.
구역감이 있고, 먹으면 무척 어지러워 정신을 잃은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 억제가 되는 효과는 좋았으니 이번에도 그걸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먹기 시작하면 확실히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해 줄 테니까.
다음 주 화요일에 카페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으니 일단 거기서 억제제값을 조금 덜고 구대범에게 송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이 자리 잡은 머리 안으로 또다시 권태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란한 빗소리와 이불 속 어둠으로 맺히는 권태정의 얼굴,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입술의 촉감과 온기가 남은 뺨. 잘 있는지 자꾸 보고 싶어지는 운동화. 이겸은 몸을 돌려 이불 바깥으로 빼꼼 눈만 내밀어 신문지 위에 놓인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비 많이 오는데 오늘도 오시려나. 비 오는 날 나오는 거 싫어한다고 그러셨는데. 안 오셨으면 좋겠다. 옷이 축축해지지 않게. 그리고 좋은 차가 더러워지지 않게.
“…….”
더는 두근거리지 않게.
* * *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엎드려 있던 권태정이 유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지 못한 채 팔만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겨우 눈을 떠 8시가 조금 넘은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눕자 그제야 빗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또 옆을 더듬어 집어 든 작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곧 꽉 다물려 빛이 들어오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던 커튼이 양옆으로 쫙 벌어지며 열렸다.
“아, 비 오네.”
어둑한 바깥을 확인한 권태정은 다시 힘을 빼고 침대로 늘어졌다. 이런 날은 정말 집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뭐 평소에 나간다고 해도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또 회사 주차장에서 내리니 비를 맞을 일이 없지만, 회사가 아니라 비를 피할 곳 하나 변변찮게 없는 철거촌이 목적지라면 말은 달라졌다.
물에 젖은 모래와 흙이 신발을 더럽힐 거고, 질척이는 것들이 제 바지까지 더럽힐 가능성이 매우 컸다. 큰 우산을 써도 분명 슈트에 물이 튈 거고, 습한 기운이 피부로 달라붙을 것이었다. 잔뜩 축축한 기분으로 이미 축축해져 있을 컨테이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씨발.”
아침부터 욕을 내뱉은 권태정이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겸이 카페에 나가는 날도 아니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잡지도 않을 테니 오늘은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방송국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연락이 온다고 해도 집에 있는 간병인이 듣고 전달을 해 줄 테니 그냥 하루 집에서 뭉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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