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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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슨 재벌 이야기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 기울인 이겸은 권태정이 강지훈에게 제 대타를 구하라며 준 수표를 떠올렸다.
“아…. 아니에요.”
“아니야? 존나 닮은 건가….”
돈을 그렇게 막 주고 다니고, 또 좋은 차를 타고 다니니 재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겸은 권태정의 어마어마하게 크고 좋은 집을 떠올렸다. 그렇게 큰 집에 살면 재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기는 했다.
“아닌데…. 그런 차 아무나 못 사는데.”
계속 고개를 갸웃하는 강지훈을 보며 에이드를 한 모금 더 마신 이겸이 그 옆으로 앉은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의 눈치를 봤다. 뭔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했다. 몸이 떨리는 느낌에 이상해 잔을 내려 둔 순간 남자의 화한 냄새가 확 끼쳤다.
“…….”
누군가에게서 나는 향을 맡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강지훈처럼 샤워하듯 향수를 아주 많이 뿌리는 사람도 있고, 유난히 특유의 체취가 짙은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강지훈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향은 그 일반적인 향과 조금 달랐다. 이겸은 남자가 알파인 것을 알아차리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번 주말에 하객 알바 있는데 할래?”
“아…. 전 당분간 알바 못할 것 같아요.”
“헐, 왜? 너 돈 필요하잖아.”
“그렇긴 한데…. 사정이 생겨서요. 한 3개월 뒤부터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뭔 사정인데 알바를 못해? 너 그 돈 뿌린 남자랑 뭐 있지. 너 그놈한테 팔려간 거야?”
강지훈은 뭘 말하든 늘 극단적이고 막장 드라마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겸은 자꾸 강지훈의 옆에 앉은 남자가 저를 보는 걸 느끼며 에이드만 마셨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정말 좀 집에 사정이 생겨서요.”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한 7월부턴 다시 할 수 있겠네? 그때 다시 끼워 줄게.”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이야기는 다 전해 딱히 할 말이 없어졌을 때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겸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에 뜨는 ‘실장님’이라는 이름을 보고 몸을 살짝 돌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자 봤어. 아직 거기야?
“네.”
-그때 그 고양이랑 있어?
“…네.”
-지금 가는 중이거든. 안 막혀서 한 십오 분이면 도착할 것 같으니까 거기서 기다려.
“네…. 혹시 나가야 하면 밖에서 기다릴게요.”
권태정의 대답을 들은 이겸이 전화를 끊고 저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리가 불편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여기를 벗어날 수 있게 권태정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저기 형…. 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래? 얼른 가 봐. 알바비 받으면 밥 한번 먹자. 고기 사 줄게.”
“네….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강지훈에게 인사한 이겸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카페를 나섰다. 권태정이 여기로 온다고 했으니 바로 집으로 갈 수 없어 카페 옆 골목으로 몸을 숨긴 이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강지훈의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났던 화한 향이 너무나 선명하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권태정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만큼 강렬하거나 또 기분이 좋아지는 향은 아니지만, 분명 경계심이 들고, 의식하게 되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겸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메가로 발현을 한 열여섯 살의 봄, 호르몬이 불안정해 학교에 다니려면 억제제가 꼭 필요했다.
그때도 별반 다르지 않게 어려운 형편에 양질의 억제제를 살 수 없던 이겸은 슈퍼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을 통해 구해다 준 한 알만 먹어도 억제 효과가 엄청난 억제제를 매일 아침 한 알씩 먹었다. 그리고 발현한 지 6개월 만에 페로몬이 완전히 짓눌려 버렸다.
더는 페로몬 향이 나지 않고, 알파를 봐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이겸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다행이다.’라는 것이었다.
일반 억제제에 비해 아주 저렴한 가격이기는 하지만 이제 억제제에 돈을 더 들이지 않아도 되고, 알파와 마주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3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저는 더 이상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라고 생각하고 산 지 3년인데 왜 갑자기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겸은 카페 건물 외벽에 몸을 기대며 작게 한숨지었다.
“…….”
시작은 권태정이 제집 대문 안으로 발을 넘었던 그날이었다. 너무 기분 좋은 향이 나서 자꾸 보게 되고, 속옷이 젖는 경험을 한 그날 이후 권태정만 보면 종종 저도 저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는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권태정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거나 그가 저를 만지는데도 가만히 있다거나…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는 저와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어제는 그게 유독 심해 내내 권태정에게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떼지 못했었다.
“아직 안 갔네?”
생각 속으로 불쑥 파고드는 목소리에 놀란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강지훈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담배를 물고 골목으로 들어와 서는 것에 머릿속이 울렁였다.
남자에게서는 지나치게 시원한, 아주 화한 향이 났다. 좋다는 느낌은 없지만,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보면 분명 알파의 페로몬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 누가 오기로 해서요. 오면 같이 가려고….”
“아, 그래? 피워도 되지?”
“네….”
“너도 줄까?”
“…아니요. 전 안 피워요.”
담배를 거절한 이겸이 머릿속으로 제가 혼자 여기 서 있던 시간을 떠올리려 애썼다. 얼마나 있었을까. 십 분은 넘지 않았을까? 그럼 이제 실장님이 올 때가 됐는데. 이겸은 골목 밖을 간절히 살폈다.
“너 한국대 그 역 앞에 카페에서 일한다며? 지훈이가 그러더라.”
“아…. 네.”
“거기 내 친구 살아서 자주 가거든. 매일 있어?”
“…아니요. 매일은 안 해요.”
“그럼 언제 카페에 있어?”
말하고 싶지 않지만, 대놓고 묻는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겸은 담배 연기를 뱉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썹과 코, 입술에 박힌 피어싱이 반짝거렸다.
“…월화수만요.”
“아, 그래? 그럼 그때 갈게. 가도 되지?”
제 카페도 아니고 아무나 드나들어도 상관이 없는 곳이니 안 된다고 할 구실이 없었다. 그렇다고 강지훈의 친구라는 걸 알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불편하다고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냥 근처에 친구가 살아 한국대역 쪽에 자주 오고, 한 번 인사를 한 사이니 카페에도 들르겠다는 인사치레로 애써 해석한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하얗다.”
“…….”
“만나는 사람 있어?”
인사치레로 겨우 해석한 게 무색하게도 남자는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이겸은 제발 강지훈이라도 나와서 친구를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꽤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들을 때마다 이겸은 어디론가 도망쳐 숨고 싶은 기분이 되고는 했다.
“있어? 사귀는 사람.”
없다고 하면 또 다른 말을 할 것 같아 쉽게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없는데 있다고 대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던 이겸은 강한 민트 향이 더 확 끼치는 것에 떨리는 손을 슬쩍 뒤로 숨겼다.
“내가 뭐 어려운 거 물어봤어? 떡치는 사람 있냐고.”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더 무서웠다. 골목을 얼른 나가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이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남자가 눈치를 챈 듯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확 버리고 발로 짓이겼다.
잡히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순간 뒤에서 어깨를 확 감싸며 몸에 무게가 실렸다. 이겸은 품에서 나는 그 향만으로도 권태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참 찾았잖아. 전화는 왜 안 받아.”
목소리까지 듣자 무서워 마구 뛰던 마음 안으로 안도가 내려앉았다. 이겸은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다정하게도 웃음 지은 권태정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고개를 숙여 이겸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놀란 이겸이 벗어나려 했지만, 권태정은 조금도 놓아 주지 않았다.
“자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
“…….”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힘들게 밖에서 이러고 있어.”
“…….”
자기라는 말에 더 놀란 이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권태정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권태정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 뺨이 여전히 화끈거렸다.
“얼른 가자. 자기야. 그런데 저 새끼는 누구야?”
이겸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더욱 꽉 숨기듯 끌어안은 권태정이 그 모습을 다 보고 서 있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별것도 아닌 알파 주제에 눈은 높은 모양이었다.
“떡치는 사람 여기 왔는데. 뭐 이제 어쩔까? 앞에서 한 번 쳐 줄까?”
권태정이 우성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눈치챈 남자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로 고개를 대충 꾸벅여 인사하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결국 튀는 엔딩이 난 상황에 남자가 튄 곳을 노려본 권태정이 그제야 힘을 줘 끌어안고 있던 이겸을 놓아주었다.
“뭐야, 저건?”
몸이 떨어지고 나서도 조금 넋이 나간 것처럼 권태정을 바라보던 이겸이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로 확 물러섰다. 그런 이겸을 보며 권태정이 혀를 찼다.
“말해, 빨리. 고양이 만난다면서 저건 뭐냐고.”
“…지훈이 형만 있는 줄 알고 나갔는데… 친구랑 같이 오셔서….”
알파 새끼가 사라졌는데도 이겸의 몸에서 그 지독한 민트 향이 나는 것에 기분이 더러워진 권태정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이겸의 몸을 느릿하게 시선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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