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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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하고 보잘것없었다. 연이겸이라는 존재 자체가 처한 상황이 그랬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그 안에서 발버둥을 쳐도 딱히 나아질 게 없는데 그래도 부단히 뛰어다니는 걸 보면 헛수고다 싶으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이겸의 얼굴은 경계심을 보일 때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토끼 탈을 쓰고 전단지를 나눠 줘 땀에 젖어 있을 때도, 저에게서 안전거리를 지키려 절대 선을 넘지 않을 때도 안쓰럽게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안쓰럽고 또 애처로우면서 가여웠다. 타고난 분위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너 때문이야.”
그냥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오메가인 걸 숨겨서, 계속 나를 몰래 봐서, 내가 얼굴을 만져도 피하지 않아서, 경계심을 풀어서.
이겸의 입술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손을 대려다가 거두고 넥타이를 대충 풀어 침대 밖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이겸이 잠든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여기가 아니어도 집에 잘 곳은 많지만, 굳이 여기를 고른 것은 자느라 한껏 경계가 풀어진 이겸에게서 나는 기분 좋은 페로몬 향 때문이었다.
씨발. 정말 너 때문이야. 네 얼굴 때문에, 네 페로몬 향 때문에, 네 웃음 때문에. 내가 아까 어땠는 줄 알아? 손을 뻗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 같고, 널 만지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어.
얌전히 숨이나 쉬는 그 입술에 내가 물릴 수 있는 건 전부 다 물리고 싶었다고. 내가 그런 미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넌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만질 때 기분이 어땠어? 전부 엉망이 되고 싶었어?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던 권태정이 안 되겠는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려 이겸을 보고 누웠다.
고른 숨소리를 한참이나 마주하니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온 이질적인 느낌이 선명해졌다. 아주 어릴 적 천둥을 무서워하던 나이에 형과 함께 잤던 날들 이후 누군가와 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에 들였다니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불편할 일인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불편은커녕 오히려 기분이 아주 괜찮았다. 옆에서 달착지근한 향이 나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누군가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리고 그 누군가가 이겸이라 더더욱.
그래서 권태정은 불편한 슈트를 입은 채 꽤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몸 전체로 퍼져 서서히 안정을 주는 달착지근한 약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먼저 깬 것은 이겸이었다. 너무나 편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몸을 뒤덮은 이불자락을 당겨 얼굴을 비빈 이겸이 제집에 있는 이불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눈을 떴다.
“…….”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권태정의 얼굴에 놀란 이겸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굳어 잠든 그 고요한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권태정과 같이 점심을 먹고, 더러워진 제 신발을 본 권태정이 신발을 사 줬고, 볼일이 있다고 해서 집에 들른 기억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에 맺힌 기억은 저를 침대에 누르던 권태정의 얼굴이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냥 자라며 어깨를 누르는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기억도 없는 걸 보면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
너무 창피해. 남의 집에서 졸기나 하고, 그걸 들키고, 또 낯선 침대에서 쿨쿨 잠이나 자고…. 분명히 한심해 보였을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곧 아르바이트를 하러 카페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
그러려면 잠든 권태정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이겸은 이불 안에 들어 있던 손을 꺼내 잠든 권태정 쪽으로 살짝 뻗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는 손은 권태정의 그 어떤 온기에도 닿지 못했다.
이불도 덮지 않고 잠든 권태정의 어깨 근처까지만 겨우 간 손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겸은 괜히 손끝으로 시트를 문지르며 잠든 권태정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문득 운동화를 사러 갔던 백화점에서 정신없이 시선이 뒤엉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권태정이 제 얼굴과 목덜미를 만지는데도 조금도, 정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쭉 빠지고, 가느다랗게 남은 온 신경이 권태정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전부였다. 시간, 장소 그리고 상황도 모두 흐려지고 권태정만 보였다. 태어나 처음 겪는 몰두의 순간이었다.
이름만 오메가에 가깝지만, 그래도 알파에게 반응을 한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된 이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았다. 휘둘리고 끌려가면서도 조금도 싫지 않은 느낌이 너무나 낯설고 불편했다.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는 허락의 의미로 가만히 있는 것도,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리고 싶은 기분도 모두 싫었다. 이겸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싫지 않은 자신을 떠올리며 위기감에 눈을 깊게 감았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특히 오늘은 권태정을 만난 그 순간부터 정신없이 휘둘리기만 했다.
“…….”
권태정에게서 나는 향이 너무 좋아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해서, 운동화를 챙겨 주는 마음이 다정해서…. 예고도 없이 불쑥 몸을 데우는 미열이 싫지 않아서.
경계와는 너무나도 먼 이유들을 떠올린 이겸이 다시 눈을 떠 조각 같은 권태정의 얼굴을 천천히 전부 마음에 그리듯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좋은 향이 확 끼치지 않는데도 눈에 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냥 이렇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머리를 파고들었을 때 이겸은 더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른 여기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몇 시야?”
몸을 확 일으킨 탓에 이불이 움직이며 옆으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운 권태정이 눈을 감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고 일어나면 저렇게 목소리가 낮아지는구나…. 이겸은 차마 권태정 쪽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아까 제가 확인한 시간을 작게 소리 냈다.
“…네 시예요….”
“벌써? 아, 역시 자니까 시간 잘 가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폐 끼친 것 같아요.”
“폐는 뭔 폐. 어차피 나가서 할 일도 없었는데 잘 됐지. 더 자.”
“…전 이제 아르바이트가야 할 것 같아서요.”
“카페? 아, 다음 주 알바를 주말로 바꿨다고 했지.”
“네….”
이겸의 말에 겨우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앉은 권태정이 뻐근한 듯 목과 어깨를 풀고 이겸을 바라보았다.
“가자.”
“저 혼자 갈게요. 실장님은 좀 더 쉬세요. 피곤하실 텐데 안 나오셔도 돼요.”
“그런 소리 해도 내가 안 들어 줄 거 알잖아.”
“…….”
“난 내 일하는 거야. 무슨 일을 하는지, 네가 협조해 줄 일이 뭔지는 다 말했고, 너도 동의했잖아. 그랬으면 말 듣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입을 닫은 채 이불자락만 만지작댔다. 자고 일어난 뒤라 그런지 아까보다 권태정이 조금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눈치 볼 거 없어. 화난 거 아니니까. 그냥 자고 일어나서 아직 착한 척 장착을 못 해서 그래. 로딩 중.”
이겸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은 권태정이 침대를 완전히 벗어나며 목과 어깨를 마저 풀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이겸을 돌아보았다.
“가자, 데려다줄게.”
조금 전보다 한결 예민함이 사라진 얼굴과 목소리에 침대에서 내려온 이겸이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했다.
“그냥 둬. 어차피 이따 와서 또 잘 건데 뭐.”
“…네.”
베개 위로만 이불을 덮어 둔 이겸이 방을 나서는 권태정을 따라 얼른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부엌까지 간 권태정은 가끔 백 비서가 오면 마시는 주스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어 이겸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눈치를 봐. 내가 지랄해서 그래?”
“…아니에요.”
“뭐가 아냐, 맞는데. 나 성질 더러운 거 알잖아. 그냥 깡패새끼 자고 일어나서 개지랄 떠네 하고 말아.”
생수 한 병을 열어 반쯤 비운 권태정이 조심스럽게 주스를 마시는 이겸을 보다가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만져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귀여워 조금 더 헝클이고 싶은 충동을 누른 채였다.
“…….”
권태정의 손이 머리칼을 매만지는 것에 살짝 어깨를 움츠리던 이겸이 주스를 들고 있어 차가워진 손을 권태정 쪽으로 살짝 뻗었다. 그리고 권태정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 정리했다.
“…….”
“…….”
서로의 손이 향했던 그 중간 어디쯤에서 시선이 뒤엉켰다. 페로몬 향과 관계없이 또 두근대기 시작하는 마음에 이겸은 얼른 뻗었던 손을 거두고 뒤로 돌아섰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권태정의 손이 그런 이겸의 머리칼을 움켜쥘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그대로 멈추었다.
씨발, 머리채 잡아서 뭐 하려고. 지랄하지 마. 권태정은 늘 이성적인 제 머리의 소리를 들으며 손을 거두었다. 순간의 충동으로 사고를 치면 감당할 게 늘어날 거고, 몹시 피곤해질 것이었다. 잘 참았어, 그래. 조용히 지내야지, 조용히.
“…가자, 늦겠다.”
겨우 강한 충동을 억누르고 말하자 저를 돌아보는 얼굴이 예뻤다. 권태정은 또다시 치미는 충동을 짓누르며 억제제 먹는 양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충동까지도 완전히, 완벽하게 억제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효과가 나올 수 있도록. 아무래도 내일 검진을 가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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