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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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쁘네. 신어 본 거 다 사자.”
“…네? 아니에요. 너무 많아요. 열 켤레도 넘게 신어 봤는데….”
“신발이 그 정도는 있어야 옷에 맞춰 신지.”
“…그렇게 많이는 정말 필요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음, 그럼…. 아, 고민이네. 다 예쁜데. 이겸이 넌 뭐가 제일 맘에 들어?”
이겸은 카펫 위에 놓인 신발들을 보다가 권태정이 가장 처음 골라 준 하얀 운동화를 가리켰다. 지금 제가 신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기도 하고, 또 권태정이 저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많은 신발 중에 골라 준 거라 내내 눈길이 갔다.
“아, 역시 내 안목 어쩔 거야. 그럼 그거랑…. 그 옆에 하늘색 스니커즈랑 까만 것도 하나 있으면 좋으니까 제일 나중에 신어 본 스니커즈 블랙이랑. 세 켤레 정도는 괜찮지?”
“…그것도 많아요….”
“둘 데 없으면 내 차에 둬.”
권태정이 고른 것을 집어 든 직원이 사이즈 체크를 하며, 이겸의 발에 맞는 것을 찾아 주었다. 이겸은 제 발에 편하게 맞는 하얀 운동화를 신고 발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예쁜 운동화를 신어 보는 것이 처음이라 가벼운 발처럼 마음도 자꾸만 들떴다.
“이건 신고 갈게요.”
“저 그냥 제가 신고 온 신발 신을게요…. 좋은 신발인데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요…. 새 운동화는 좋은 곳 갈 때만 신을게요.”
“더러워지면 또 사 줄게.”
“…….”
“좋은 곳 갈 때만 좋은 거 신는 게 아니라 좋은 걸 신어야 좋은 데를 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난.”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하얗고 깨끗한 운동화를 눈에 담았다. 권태정의 말처럼 저도 어쩐지 좋은 곳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켤레는 댁으로 보내 드릴까요? 아니면 가지고 가시겠어요?”
“가지고 갈게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다른 두 켤레의 운동화를 포장하러 간 사이에도 이겸은 내내 운동화를 보고,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제가 신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또 예뻐서 자꾸 보게 되고, 또 발을 움직여 보게 되었다. 그런 이겸을 어린애 구경하듯 보던 권태정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해요.”
“죄송할 거 없다니까. 난 돈이 많으니까 너랑 보내는 시간을 돈으로 때우는 것뿐이야. 넌 내가 시간 때우는 방식 때문에 뭔가를 얻게 되는 거고. 그냥 좋게 생각해.”
“그래도 감사해요….”
정말 고마운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하는 이겸에게 다가간 권태정이 아무렇게나 슥슥 이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무람없는 손길이었으나 이겸에게는 꽤 다정히 느껴졌다.
권태정의 사려 깊은 마음과 손길, 그리고 하릴없이 확 파고들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뒤흔드는 좋은 향 때문에 이겸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
“…….”
권태정도 이겸의 그런 미묘한 변화를 알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경계심이 강하고, 늘 정해진 마음의 모양을 유지하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던 이겸이 제 손길과 시선에 형체를 잃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제 페로몬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는 어린애를 상대로 장난을 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더는 만지면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손길을 거두는 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권태정은 이겸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내려 달아오른 귀 끝을 문지르고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그리 섬세하지 못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미열이 오른 뺨으로 다가와 건드리는데도 이겸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권태정을 바라만 보았다.
“…씨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애가 마찬가지로 저를 보고 있었다.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저를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고 제 손길을 따라 숨이 달아올랐다. 저를 보며 초점이 흐려지고 멍해지는 얼굴을 보는 건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을 본 순간 권태정은 강한 침범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 함부로 굴고 싶었다. 예의도 뭣도 배워 본 적이 없는 진짜 깡패 새끼면 더 행복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랬으면 저 입술에 제 혀를 처박고, 달착지근한 페로몬 향이 나는 저 목덜미와 몸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만졌을 것이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의 윤곽이 손바닥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위는 어떨까.
권태정은 이겸의 바짓단 안쪽에 손을 넣는 상상을 하며 달아오른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이겸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살짝 벌어진 말랑한 입술 위를 엄지로 가볍게 눌렀다. 물리고 싶었다. 손가락을, 제 혀를, 그리고….
“상품 준비됐습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직원의 목소리에 손을 내린 권태정이 흐트러진 페로몬과 머릿속을 갈무리하며 머뭇댐 없이 뒤로 돌아 직원에게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쇼핑백을 받아드는 손끝에는 여전히 이겸의 미열이 묻어 있었다. 권태정은 떨려 버린 숨을 깊게 내쉬며 열이 오른 눈두덩을 손으로 꾹 눌렀다. 빨리, 최대한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저에게 필요한 그 알약을 향해.
* * *
백화점에서 집까지 어떤 정신으로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겸은 내내 미열이 오른 채 상기된 얼굴로 창밖만 보며 두근대는 마음을 짓누르려 애썼다.
권태정의 손이 닿았던 머리와 귓가, 목덜미와 뺨, 그리고 입술이 홧홧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까의 저는 정말 이상했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고, 저에게 닿는 그 손길이 너무 좋아 조금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미쳤나 봐, 정말…. 이겸은 집 문을 여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보며 순간 기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와.”
그 말을 겨우 한 권태정은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가 늘 제가 아침마다 먹는 억제제 두 알을 꺼내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넘기자마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먹었다는 그 자체로 안도가 몰려들었다.
십 분 정도만 있어도 페로몬이 완전히 제어가 될 것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낀다고 쉽게 흥분하거나 허튼 생각을 하는 일도 당연히 사라질 것이었다. 권태정은 겨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현관 근처에 있는 이겸에게 다가가 그 손목을 당겨 거실로 데려왔다.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있어. 나 딱 십 분만 일 좀 보고 나올게.”
“…네….”
제가 앉히지 않으면 앉지도 않을 것 같아 이겸을 소파에 앉힌 권태정이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완전한 저의 공간으로 들어오니 이제야 몸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권태정은 침대로 털썩 주저앉아 그대로 몸을 뒤로 기울였다.
“…하…. 진짜 씨발, 약 하루 안 먹었다고.”
발정 난 짐승 새끼처럼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권태정은 아까 백화점에서 이겸을 만지며 제가 한 몹시 노골적이고 난잡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침음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그런 쪽으로는 깨끗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나 노골적인 성욕과 마주하니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권태정은 이겸의 모습이 마구 움직이는 눈을 감고, 그 위를 팔로 지그시 누르며 몸이 점점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흥분이 가라앉고, 몸이 화끈댈 만큼 감돌던 페로몬도 완전히 정리가 되자 그제야 평소와 같은 숨이 쉬어졌다. 깊게 숨을 내쉰 권태정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만졌다.
내내 사고 치지 않으려고 몸과 머리에 힘을 꽉 주고 있었더니 아직 대낮인데도 지친 느낌이 났다. 한숨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권태정이 밖에 혼자 있는 이겸을 떠올리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졸고 있는 이겸을 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
아마 이겸도 저만큼이나 지쳤을 것이었다.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알파의 제어하고도 새어 나오는 페로몬과 마주했으니 당연히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로 앞뒤 보지 않고 뒹군 것도 아니고, 분명히 느껴지는 게 있는데 티를 내지 않고, 모른 척을 하려고 하니 피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겸아.”
편하게 잤으면 좋겠는 마음에 깨우려 이름을 불러도 이겸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고 자기라도 하면 좀 낫겠는데 등도 붙이지 못하고 겨우 엉덩이만 대고 앉아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으니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권태정은 다시 이겸의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일어나 봐. 방에 가서 자자.”
한 번 더 뺨을 톡 건드리니 이겸이 조금 놀라며 눈을 떴다. 권태정은 잠이 묻어 가물가물한 이겸의 눈을 보고 웃고는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가 봤자 할 것도 없는데 그냥 한숨 자자. 나도 피곤해.”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죄송해요, 자려고 한 게 아닌데….”
“죄송할 것도 많다.”
뭐라고 계속 조곤조곤 말하는 이겸을 데리고 방으로 간 권태정이 이불을 걷고 침대로 이겸을 대충 눕혔다. 안 자도 된다고 일어나려는 이겸의 어깨를 눌러 눕히는 과정을 두어 번 정도 반복하자 그제야 완전히 힘이 빠졌는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늘어지는 게 보였다.
다시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와 잠이 드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이불을 또 대충 몸 위로 덮어 주었다. 거봐, 잘 거면서.
“야.”
“…….”
“이겸아.”
잠이 들어 불러도 대답이 없는 이겸을 물끄러미 보던 권태정이 말랑한 뺨을 손끝으로 살짝 눌러 보았다. 그래도 미동이 없자 이번에는 찹쌀떡 같은 뺨을 잡아 늘린 권태정이 금세 빨개지는 것에 놀라 얼른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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