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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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권태정이 타고 온 차를 보고 강지훈이 10억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이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3억 빚도 너무 커서 삶이 짓눌리는데 10억은 도대체 얼마나 큰 금액인 걸까. 생각만으로도 아득했다.
“간병인은 일 잘해?”
권태정이 운전석으로 타자 또 그 좋은 향이 확 끼쳤다. 이겸은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들떴다.
“네, 너무너무 잘해 주세요.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꼭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인사 듣자고 한 말 아니야. 혹시라도 맘에 안 들게 굴면 말하라고. 다른 사람으로 바꿔 줄 테니까.”
“…네.”
핸들을 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이겸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려 셔츠 소매가 올라가 드러난 손목과 시계, 그리고 팔과 어깨…. 목과 턱, 입술과 코, 그리고 눈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 때문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기… 실장님.”
“응?”
“…향수… 쓰세요?”
제가 말하고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한 이겸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권태정은 이겸의 말을 들은 뒤에야 제가 오늘 아침 본가에서 오느라 억제제를 먹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지금 완전히 갈무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컨디션에 따라, 또 오전 오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페로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성알파의 페로몬이 일반 알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짙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는 서로의 페로몬을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가족들과 있다가 오느라 몰랐는데 오메가인 이겸에게는 제 페로몬이 확실히 평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자꾸 저를 바라보고, 뺨이 상기되고, 또 향수를 쓰냐고 까지 묻는 것을 보면.
“쓰긴 쓰는데 오늘은 본가에서 오느라 안 뿌렸는데.”
“…본가요?”
“응. 우리 엄마 아빠 사는 집.”
“아….”
“그런데 향수는 왜?”
“……그냥….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중간에 집에 들러 억제제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대충 약국에서 파는 억제제로는 우성의 페로몬을 짓누르지 못하니 번거로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
권태정은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조수석에 있는 이겸을 흘끗 살폈다. 귀 끝이 빨개지고,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걸 보니 약한 감각이 아랫배로 고이는 게 느껴졌다.
“…씹.”
브런치 가게와 제집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돌아가면 갈 수 있겠지만, 굳이 집까지 다시 갔다가 거기서 출발하기에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창을 조금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조금 더 완전히 페로몬을 제어했다.
평소보다 집중해 가다듬고 이겸을 살피니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편히 숨을 쉬는 게 보였다. 일단 같이 브런치를 먹고 난 다음에 집에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기 창 조금만 더 열어도 돼요?”
“응, 그럼.”
권태정의 허락을 받고 창을 조금 더 연 이겸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기로 심호흡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권태정의 페로몬이 약해져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쿵쿵 뛰는 심장이나 조금 젖은 느낌이 나는 속옷은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이겸은 혹시라도 권태정이 제 부끄러운 모습을 눈치챌까 싶어 최대한 창밖만 보며 들뜬 기분이나 마음 같은 것들을 짓누르려 애썼다.
“어제 구대범한테 또 전화오거나 하진 않았지?”
“아…. 네. 전화 안 왔어요.”
“혹시라도 나 없을 때 전화 오거나 찾아와서 지랄하면 바로 나 불러. 알아듣게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놈은 죽여야 되니까.”
“…네.”
여전히 좋은 향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이 반응을 해 어쩔 줄을 모르겠을 정도는 아니라 창을 닫은 이겸이 열이 올랐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꾹꾹 짓눌렀다.
알파의 페로몬에 제대로 반응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권태정에게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특히 조금 전에는 기분까지 확 들떠 제가 저를 컨트롤할 수가 없는 느낌이라 더 그랬다. 이겸은 여전히 두근대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눌러 가린 채 모아 붙인 무릎에 시선을 두려 애썼다.
“구대범 말고는 뭐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곤란하게 한다거나….”
권태정은 슬쩍 방송국 연락이 오는지를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네, 없어요.”
“그래? 뭐…. 구대범 말로는 누가 너 막 찾아오고 그런다던데 그건 무슨 소리야?”
“아…. 방송국 분들 말씀하시는 걸 거예요. 전에 다람동 철거촌으로 방송한 거 후속 보도를 준비하시는데…. 제가 꼭 나와 줘야 한다고 연락을 주시거든요. 전에 방송국 분들이 저랑 얘기하고 싶다고 오셨을 때, 사채업자 아저씨도 오셔서…. 마주친 적이 있었어요.”
적극적으로 후속 보도를 위해 뛰고 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이겸이 알지 못하게 핸들을 꽉 쥔 채 불만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마 어떻게든 철거 전에 후속 방송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다 무너지고 나면 그 방송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아…. 방송국에서 찾아도 오는구나.”
“두 번 정도 오셨었어요.”
씨발, 두 번이나 만나러 왔어? 권태정은 되도록 더 많은 시간을 이겸과 함께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좋게 포장해서 이겸을 정말 제집에 가두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일단 약간의 수확이 있으니 서두르지 않고 일대일 마크를 제대로 한번 해 볼 생각이었다. 조금 더 이겸의 생각을 떠보려던 권태정은 갑자기 움직이는 와이퍼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갑자기 비 오네.”
“…소나기인가 봐요.”
갑자기 차 앞 유리로 물방울이 토도독 떨어지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에 놀란 이겸이 창을 닫기를 잘했다 생각하며 비가 내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오는 비는 잠깐 오다가 그치지 않아요?”
“어, 맞아. 잠깐 오다가 말 거면 왜 와. 올 거면 존나 주룩주룩 쏟아지던가.”
“…비 오는 거 좋아하세요?”
“나갈 일 없고 집에서 볼 땐 좋지. 빗소리도 좋고, 어둑하니 잠도 푹 자기 좋고. 넌?”
“전 비 오면 일하러 가기가 힘들어서 별로 안 좋아해요.”
“아, 그러겠네. 습하고, 신발 젖고, 우산에서는 물 떨어지고…. 으, 최악.”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젓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금세 그친 맑은 하늘을 눈에 담았다.
“뭐야, 그친 거야?”
“그런 것 같아요.”
“괜히 씨발, 차만 더러워졌네.”
“제가 이따 닦을게요.”
“네가 왜.”
“…저번에 돈도 많이 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 주시고…. 할아버지한테도 너무 잘해 주시는데 제가 해 드릴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이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흩트린 권태정이 대충 손을 내려 보들보들한 뺨을 아프지 않게 당겼다가 놓았다. 이겸은 그 손끝에서도 나는 것 같은 좋은 향에 고개까지 돌려 멀어지는 권태정의 손을 바라보았다.
“넌 지금 나랑 밥 먹으러 가잖아. 그거면 됐어. 그냥 내 눈앞에서 얌전히 있는 게 진짜 도와주는 거니까 뭐 더 할 생각 안 해도 돼. 뭔 차를 닦아.”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뭐든 할게요.”
“알았어. 뭐든 진짜 하는 거다.”
“네….”
정말 뭐든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본 권태정이 숨을 내쉬듯 작게 웃었다. 하여튼 착해 빠져서 그냥 가만히 여유를 좀 즐기라는 데도 그걸 못하고 뭐라도 하겠다는 말에서 여태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보여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조금 더 달리다 보니 가게 근처였다. 권태정은 야외에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발렛파킹을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비가 조금 더 많이 왔는지 주차장에서 가게로 가는 길 군데군데에 물웅덩이가 작게 고여 있었다. 권태정은 그 웅덩이를 피해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더는 웅덩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길에 올라 이겸을 돌아본 권태정의 눈이 자연스럽게 신발로 향했다. 말랑해진 흙을 잘못 밟았는지 이겸의 신발이 지저분해진 게 보였다.
원래 낡은 신발 위에 진흙까지 묻은 것이 신경 쓰이는지 이겸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겸은 저에게 전혀 조금도 신발이 지저분해진 것을 티 내지 않았다. 권태정 역시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다가온 이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네, 좀 바빴어요. 조용한 자리 남아 있을까요?”
“네,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권태정을 알아보고 친절히 안내하는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을 가만히 보던 이겸이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어 질척해진 주차장의 흙을 잘못 밟아 안 그래도 낡고 지저분한 신발이 더 지저분해진 게 부끄러워 발을 평소처럼 내딛지도 못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겸은 위축되어 권태정의 뒤에 숨듯 걸음을 옮겨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와아….”
방 전체의 벽이 다 유리라 바깥이 보이는데 그 바깥은 이 가게에서 꾸며 둔 예쁜 정원이었다. 이겸은 너무 예쁜 바깥 조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아래로 운동화를 숨길 수 있어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여기는 비가 더 많이 왔나 봐요.”
“그러게. 그래도 내릴 땐 그쳐서 다행이야.”
이겸의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를 본 권태정이 이겸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메뉴를 받은 이겸이 천천히 메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름이 어렵다거나 하지 않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세트로 있을 텐데 그중에 뭐가 제일 좋은지 골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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