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
•
이겸은 화도 내지 않고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울리는 권태정의 웃음소리에만 내내 귀를 기울였다. 화가 나야 하는데,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야 하는데… 웃음소리가 가려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을 일도 생기고 살기 편한가 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권태정이 웃음을 감추고 고개를 들어 이겸의 집 앞을 바라보았다. 밤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나 삐딱한 태도를 보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구대범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권태정은 짜증 난다는 듯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벌벌 떠는 이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괜찮아. 나 있잖아. 내가 쟤 그냥 이겨. 걱정하지 말고 이거나 들고 있어. 저 새끼 보내고 마시게.”
이겸의 손에 더는 핫초코라고 할 수 없는 차가운 음료 컵을 준 권태정이 성큼성큼 대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인이라도 생겼나?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웃음소리가 그냥 골목에 쩌렁쩌렁하네?”
구대범은 아직 제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권태정이 가로등 불빛 아래 서며 구대범을 시선만 뚝 떨어뜨려 보며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형. 여기서 뵙네요.”
“…어? 태정이?”
전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당황해 웃지도 못하는 구대범을 보니 우스워 미칠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이겸을 당겨 옆에 세웠다.
“어쩐 일이세요? 전 주민 안전 귀가 서비스 중인데.”
“…아, 뭐 그런 것도 직접 해?”
“네, 그럼요. 요즘 철거촌에 깡패 새끼들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어서요.”
구대범이 들으면 거슬릴 말을 웃으면서 한 권태정이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여 저보다 키가 작은 구대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은 어쩐 일이세요?”
“아…. 난 뭐 얘한테 확인할 게 있어서.”
“하세요. 그럼.”
“넌 바쁠 텐데 먼저 가 봐도 돼.”
“저 하나도 안 바쁜데. 왜 안 바쁜지도 잘 아실 거고. 뭐 제가 들으면 안 될 말이에요?”
“그런 건 아니고….”
이겸은 평소 모습과는 아주 다른 구대범을 보며 권태정의 뒤로 반쯤 몸이 겹치게 숨었다. 평소에는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것처럼 굴던 구대범이 권태정의 눈치를 보고, 또 조심스럽게 말하는 걸 보니 이상하면서도 묘한 안도가 찾아들었다.
“야, 너 오늘 이백이나 넣었던데 네 돈 맞아? 너 이 돈 어디서 났어. 너 몸 파냐?”
권태정의 뒤로 반쯤 숨은 이겸에게 다가간 구대범이 윽박지르듯 물었다. 권태정은 그런 구대범에게서 이겸을 보호하듯 아예 제 뒤로 숨기고 누구도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을 만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거 쟤 돈 맞아요. 제가 준 건데.”
“네가? 왜?”
“아, 제가 이겸이 일하는 곳에 우연히 갔다가 실수를 크게 해서요. 보상할 것도 있고 해서 준 건데 빚 바로 갚았구나. 앞으로 그럼 뭐 줄 일 있으면 형한테 제가 바로 쏘면 되겠어요.”
“일하는 데도 가고 그런 사이야?”
“우연히 갔다고 말했는데.”
“아…. 우연히.”
다시 할 말을 잃은 구대범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으로 마주한 권태정이 뒤에서 옷자락 당기는 느낌에 뒤로 손 하나를 움직여 제 옷자락을 동아줄처럼 잡은 이겸의 손을 토닥였다.
“형, 그런데 얘가 돈 빨리 갚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이십 넣던 애가 이백 넣었으면 좋아해야지 왜 여기까지 힘들게 오셔서 화를 내고 그러세요. 뭘 팔아 번 돈인지가 중요한가? 형은 돈만 받으면 되잖아요.”
“아니…. 어린애가 그런 짓까지 할까 봐 걱정이 돼서 그렇지.”
“아…. 걱정돼서 오셨구나. 걱정을 윽박지르며 하셔서 몰랐네. 그런데 형이 딱히 걱정하실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마지막 말은 살짝 날이 서 있었다. 제 구역의 주민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라는 것을 구대범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권태정이 묘한 과보호를 하고 있다는 것도.
“형, 형도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진짜 조용히 석 달 지내고 싶거든요. 아시잖아요. 더 사고 치면 안 되는 거.”
“그래, 알지. 미안하다. 여기 책임자 생긴 걸 내가 까먹었네. 꽤 오래 비어 있었잖아.”
“이제라도 아셨으니 됐어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형.”
“그래. 다음에는 이런 데 말고 좋은 데에서 술이나 한잔하자.”
눈까지 접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권태정이 구대범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냥 골목을 나서는 것만으로는 안도가 되지 않았는지 굳이 골목 바깥까지 나가 구대범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본 뒤에야 이겸에게 돌아왔다.
“봤지? 사채 나한테 쪽도 못 세우는 거.”
이겸은 제가 들고 있으라고 준 컵을 두 손으로 든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한번은 올 것 같았는데 역시네. 아, 존나 저렇게 투명하게 수가 읽혀서 어디에다 쓰냐.”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돈 줬잖아. 넌 당연히 그걸로 빚 갚을 거고, 월급날도 아닌데 갑자기 그 정도 돈 보내면 구대범 당연히 궁금해 빡돌 거 아냐. 아까 전화는 안 왔어?”
“…왔는데 제가 일하느라 못 봤어요. 와 있는 것만 보고….”
“그래서 여기로 왔나 보네. 카페는 가 봤자 엇갈리면 땡이니. 사채업자 새끼가 씨발, 돈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을 것이지 어디서 났냐고 지랄이야. 지가 어디서 났으면 뭐 어쩔 건데. 남이야 몸을 팔든 장기를 팔든 씨발, 지가 팔아넘기는 건 당연한 거고, 자발적으로 팔아 벌면 안 되는 거야? 지랄을 하네.”
구대범이 나간 골목 입구 쪽을 보며 마구 불만을 쏟아 내는 권태정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겸이 숨을 쉬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권태정은 솜뭉치처럼 가볍고, 커피 위에 있던 휘핑크림처럼 몽글몽글한 소리가 울리는 것에 더 악담을 하려다가 멈추고 조금 놀란 얼굴로 이겸을 바라보았다.
이겸이 웃고 있었다. 더는 떨리지 않는 두 손으로 제가 준 컵을 쥔 채.
“…….”
큰 소리는 아니지만, 웃음인지 아닌지 착각하지 않을 만큼 분명한 웃음이었다. 권태정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 웃음을 눈에 담았다.
“아…. 죄송해요. 실장님 말씀하시는 거 들으니까 속이 너무 시원해서….”
“웃는 게 뭐 그렇게….”
예쁘냐고 말하려는 순간 이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권태정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그 눈물 흘리는 얼굴을 눈동자 안에 가뒀다. 웃는 것도 예쁘더니 우는 것도 예뻤다. 이백, 아니 이천을 줄 테니 오 분만 더 울어 보라고 하고 싶을 만큼.
“야, 웃다가 울면 큰일 난다? 아,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나는 건가? 그게 그건가? 아무튼.”
권태정의 말에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던 이겸의 발이 먼저 움직여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권태정은 가까워지는 이겸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이겸에게서 옅은 복숭아 향이 났다.
“…실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
“…큰일 나지 않게 해 주세요. 조용히… 정말 조용히… 무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
“그다음에는, 여기 나가서는….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이겸은 조금 전 마주한 완벽한 보호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저를 뒤로 숨기며 보호하는 그런 낯설고 안정이 되는 기분. 연회장에서도 어렴풋이 느꼈던 그 기분을 완벽하게 다시 마주한 순간 이겸은 권태정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보호받고 싶었다. 무서울 땐 숨고 싶었다. 그래서 이겸은 권태정의 손을 잡았다. 보호받고 싶어서. 잠시라도 무섭고 싶지 않아서.
더는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그게 겨우 석 달이라고 해도 기꺼이 권태정의 말 안으로 걸음을 옮길 만큼 이겸은 많이 지쳐 있었다. 하루라도 불안하지 않게 잠들고 싶었다.
“부탁은 내가 한 거지. 협박 같은 부탁이기는 했지만.”
“…….”
“그리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
“지금은 지금 일만 생각하면 돼. 나중 일 미리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내 생각대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되는 일이 더 많거든.”
눈물이 매달린 이겸의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 권태정이 제 손가락으로 옮겨 온 눈물방울 위로 혀끝을 댔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혹시 알아? 그땐 네가 깡패를 좋아하고 있을지?”
장난스럽게 말한 권태정이 눈물에 흠뻑 젖은 이겸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고는 핫초코 컵을 가져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전부 식어 조금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컵을 쥐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손으로 눈물이 묻은 눈가와 뺨을 문질러 닦은 이겸이 권태정을 두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잘 마셨어. 다음에 또 만들어 줘.”
“…네….”
“내일은 열 시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네…. 조심히 가세요.”
“응, 잘 자.”
이겸은 권태정이 소리 내는 잘 자라는 말에 자꾸 마음을 휘둘렸다. 별것도 아닌, 어쩌면 의례적인 그 짧은 밤 인사 하나에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기….”
“응?”
“컵… 주세요. 제가 버릴게요.”
“아, 그럴래? 여기.”
권태정이 내미는 가벼워진 컵을 받아 든 이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골목에 작게 울렸다. 그 소리를 다 듣고 난 뒤에야 움직인 이겸은 방 안이 아니라 방 바깥 평상에 걸터앉아 그 옆으로 권태정이 주고 간 빈 컵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보호도 해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할아버지도 위해 주면서 오히려 평소 열 배나 되는 시급을 척척 준다고 말하는. 같은 깡패면서 다른 깡패를 향해 제 대신 속 시원한 말을 마구 퍼붓는.
‘혹시 알아? 그땐 네가 깡패를 좋아하고 있을지?’
말도 안 돼…. 이겸은 평상 위로 다리를 올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위로 입술을 꾹 누르다가 고개를 기울여 옆에 놓인 빈 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다음에는 꼭 따뜻한 걸로 드려야지. 괜히 손을 뻗어 빈 컵을 톡 건드린 이겸이 울렁이는 마음에 무릎 위로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권태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헤어지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머릿속에 머물고, 잘 자라는 인사가 유독 마음에 남는. 그래서 자꾸만 마음에 열이 오르게 하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