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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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휴대폰 가게 앞에서도 저에게 준 것 같은 만큼의 돈을 사람들에게 주면서 제 대타를 구하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면 오늘 남자가 쓴 돈은 제가 본 것만 해도 사백만 원이었다. 거기에 그 비쌀 것 같은 레스토랑의 음식들과 돈가스, 커피까지 합치면….
제가 한 달을 꼬박 일해 버는 돈보다도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깡패들은 왜 돈이 많은 걸까. 다른 사람에게 빼앗아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아서? 이겸은 나긋한 목소리로 협박하던 권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얼굴 때문에 제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깡패와 사실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자꾸 웃고, 저를 보고, 가까이 다가와 닿는 그 얼굴과 거침없는 성격과…. 자꾸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 향 때문에 그동안 제가 봐 온 깡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목덜미에 닿던 따뜻한 숨과 목소리, 그리고 뜨겁고 축축했던 감각을 떠올리며 빨개진 얼굴로 카운터에 엎드렸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마음이 자꾸 울렁이다가 아래로 끝도 없이 떨어졌다. 이겸은 제 이상한 마음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너한테서 그 디저트 냄새 난다.’
마음이 자꾸 확 아래로 떨어지는 말을 하고.
‘복숭아 냄새.’
저를 보며 자꾸 웃는….
‘먹고 싶게.’
권태정 때문이라는 것을.
* * *
권태정은 컨테이너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로 기다란 두 다리를 올렸다. 백 비서가 의자를 끌고 와 그런 권태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우야. 나 깡패 같아?”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나한테 깡패라고 해서.”
“누가?”
“연이겸이 나보고 깡패래. 아니, 날 깡패로 알고 있더라고?”
백 비서는 권태정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 백 비서를 보고 웃은 권태정이 소파 뒤로 몸까지 푹 기대며 한층 깡패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전에 용역 관리하던 그 실장이란 새끼 알지. 그 질 나쁜 새끼.”
“어, 알지.”
“그 새끼가 전에 여기 컨테이너에 있었나 봐. 그런 놈이 쓰던 데에 내가 왔고, 나도 실장이고 하니까 당연히 그 후임으로 온 깡패라 생각한 거지.”
그제야 이해한 백 비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기도 한데 또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이겸 씨가 너한테 깡패라고 대놓고 그래?”
“아니, 내가 뭔 말하다가 힘들게 일하느니 나한테 잘 보여서 내가 너한테 돈 쓰고 싶게 만들어 봐라. 뭐 그런 말을 했더니. 자긴 깡패는 싫다는 거야.”
권태정의 말에 백 비서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겸의 말도 말이지만, 그 말을 듣고 당황했을 권태정을 떠올리니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자꾸 웃음이 났다.
“그래서 좀 캐보니까 날 새로 온 용역 관리실장으로 알고 있더라고. 씨발, 진짜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어디를 봐서 내 얼굴이 깡패냐고.”
“제대로 알려 주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말았어.”
“왜?”
“걔가 내 얼굴을 보고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인터넷도 안 하고, 뭐 아예 세상 소식에 깜깜하단 건데…. 뭐 굳이 내가 누구라고 알려 줄 필요가 없겠더라고. 어차피 3개월 보고 말 거고, 3개월 동안 그냥 깡패로 알고 있는 게 걔나 나나 더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감히 저를 깡패 따위로 알고 그딴 말을 한 건 자존심이 상해 싫지만, 그래도 3개월 동안 깡패처럼 사는 게 확실히 더 편하기는 할 것 같았다. 재벌 아들이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욕을 먹지만, 깡패는 열 번 못하다가 한 번만 잘해도 꽤 착한 깡패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태성에서 나온 실장이 자꾸 놀아 달라고 지랄한다고 누구한테 말이라도 해 봐. 깡패가 지랄한다고 하는 게 낫지.”
“그건 그렇지.”
“연이겸은 나한테 맡겨. 오늘 같이 있어 보니까 뭐…. 입맛이 저렴해서 그렇지 그거 빼면 나쁘지 않더라고. 무던해. 조용하고, 순하고.”
부드러운 볼을 계속 만져도 그만하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하던 이겸을 떠올린 권태정이 괜히 손을 들어 볼을 만졌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 손끝에 말랑말랑 보들보들 기분 좋은 감각이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고 목덜미에서 나던 그 새콤달콤한 복숭아 향도 자꾸 코끝에서 감돌았다. 제 어깨를 쥐던 손의 느낌도,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목덜미를 핥은 순간 터지던 여린 숨도 권태정의 머릿속에 엉겨 붙어 있었다.
“걔가 깡패는 무조건 다 싫다는 거야. 잘생기고 돈 많아도 깡패는 그냥 싫대. 보니 그 전에 있던 관리실장 놈이랑 구대범한테 당한 게 많은 것 같더라고.”
“그렇겠지. 구대범이야 뭐 돈이 엮여 있으니 악랄하게 굴 거고, 전에 있던 실장도 대단했잖아. 나도 그때 르포 나온 거 보고 놀랐어.”
“날 그런 놈들이랑 같은 깡패로 보는 게 빡치는데 또 뭔지 모를 오기가 생기는 거야?”
“무슨 오기?”
“뭔가 예외가 생기게 하고 싶은 기분?”
저를 바라보는 백 비서를 본 권태정이 심각하게 볼 것 없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사실 정말 심각한 생각은 아니었다.
“깡패는 무조건 싫다더니 난 좋아하게 되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태정아.”
“아, 잔소리 미리 하지 마. 나 아무것도 안 했고, 앞으로도 특별히 뭐 하지도 않을 거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예외가 생기면 재밌을 것 같다고. 말은 할 수 있잖아. 백진우, 생기지도 않은 일에 잔소리하지 마.”
“너무 잘해 주지도 마. 정말 마음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건 걔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책임져야 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한숨이 나오는 말에 백 비서가 대꾸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잘해 준 것도 없어. 그냥 밥 두 번 먹이고, 커피 사 준 게 다야. 아, 알바 깽판친 거 보상해 주고.”
“그래, 앞으로도 그 정도로만 해. 정들어 좋을 거 없으니까.”
“정은 무슨.”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떤 권태정이 소파 뒤로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나 이따 열 시에 걔 데리러 가야 돼.”
“데리러 가기까지 해?”
“방송국 사람 만날 시간을 안 줘야지. 아, 그냥 집에 데려다가 한 석 달 두면 편할 텐데.”
나름 열심히 마크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백 비서가 테이블 위로 길게 놓인 권태정의 다리를 격려하듯 토닥였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 머릿속에만 남긴 채 내내 그 복숭아 향과 숨소리, 손끝에 남은 부드러움 따위에 흠뻑 젖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권태정의 속내는 꿈에도 모른 채.
* * *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권태정은 왜인지 모를 싸한 기운에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아, 씹.”
10시 58분이라는 시간을 보자마자 정신이 확 들며 마음이 급해졌다. 권태정은 그대로 컨테이너를 박차고 나가 서둘러 차에 올랐다. 할 일이 없어 너무 지루해 딱 삼십 분만 눈을 붙이고 미리 카페 앞에 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도 넘게 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 비서를 보내지 말고 같이 있거나 알람이라도 맞췄을 거라 생각한 권태정이 재빨리 철거촌을 빠져나갔다.
전화번호라도 알면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너무 당황을 해서 그런지 백 비서에게 이겸의 전화번호를 알아봐 달라고 할 생각조차 못 한 권태정은 밤이라 차가 많지 않은 도로를 일단 달렸다.
평소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밤이라 차가 없고, 또 속도를 내서 달린 덕에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권태정은 아까 차를 세웠던 카페 앞 도로에 주차하고 얼른 운전석에서 내렸다.
“…….”
불이 꺼진 카페와 간판을 먼저 본 권태정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카페로 오르는 얕은 계단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이겸과 마주했다.
제가 말도 없이 늦어 그냥 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지 않고 저를 정말 기다리고 있는 이겸을 보니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권태정은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의 앞으로 가 서서 시선을 내려뜨리다가 다리를 구부려 이겸과 눈을 맞춰 앉았다.
“늦어서 미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런 건 아니고 자다가 늦게 일어났어. 삼십 분만 자려고 했는데 한 시간도 넘게 잔 거 있지.”
옆 가게의 간판 불빛만 겨우 비치는 어둑한 계단 위에서 이겸이 작게 웃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고, 또 그걸 솔직하게 말하는 권태정 때문에 나온 웃음이었다.
“갔을 줄 알았는데.”
“…기다리라고 하셨잖아요.”
“…….”
“또 약속 어기면 안 되는 거기도 하고….”
제가 가 버리면 서운해할 것 같은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 오 분만 더, 딱 오 분만 더 기다리자고 하다가 한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는 말은 굳이 소리 내지 않은 이겸이 내내 저에게 닿는 시선과 마주했다. 어쩐지 기다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미안해.”
“…괜찮아요.”
“얼른 가자. 진짜 늦었다.”
계단에 앉아 있던 이겸이 옆에 놓아둔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태정은 이겸이 든 테이크아웃 컵을 흘끗 바라보았다.
“다 마신 거면 줘, 버리고 가게.”
“…그게 아니라….”
컵을 두 손으로 든 채 이겸이 머뭇댔다. 권태정은 이겸이 이야기를 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드리려고 만든 건데… 식었어요.”
“나? 나 주려고 만들었다고?”
“…네. 데리러 와 주시는 게 감사해서요. 그런데 식어서…. 제가 다음에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컵을 숨기려 괜히 내리는 이겸의 손을 잡은 권태정이 아직 미지근한 컵을 받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달콤 쌉싸름한 향과 맛이 확 나는 걸 보니 핫초코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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