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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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건이든 전 깡패는 싫어요.”
와, 뭔가 오기 생기네. 권태정은 제가 깡패라고 착각한 채 어떻게든 이겸이 깡패를 택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질문을 떠올렸다.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게 된 사람이 알고 보니 깡패야. 그래도 싫어?”
“…네.”
“헤어질 거야?”
“헤어져야죠. 어떻게 생각해 봐도 좋게 생각이 안 들어요. 제가 겪어 본 깡패들은 전부…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싫어요. 전에 있던 관리실장님도 사채업자 아저씨도.”
“난 다를 수도 있잖아. 그 새끼들이랑 난 얼굴부터 다른데. 그리고 난 너 안 괴롭히잖아.”
가만히 권태정의 얼굴을 보던 이겸이 그래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깡패는 깡패잖아요.”
“하…. 씨발. 그래, 맘대로 하세요. 나도 너 좋아할 일 없거든.”
“…네.”
밀어 둔 커피를 당겨 한 모금을 마신 권태정이 잠자코 먹기 좋게 녹은 바닐라 프라페를 쪼옥 빨아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가 진짜 깡패면 몰라도 깡패도 아닌데 왜 이겸의 말에 성질이 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확 깡패가 아니라 재벌 아들이라고 말해 곤란하게 할까 생각하던 권태정은 그냥 하려던 말을 관두었다. 어차피 3개월 보고 말 사이인데 그냥 저를 깡패로 아는 게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제가 태성그룹의 막내 권태정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앞으로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할 거고, 다른 사람에게 그러듯 이겸에게도 가면을 쓰고 웃기 싫을 때도 웃고, 화내고 싶을 때도 화내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방송국과 접촉할 수 있는 이겸이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고,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만큼 태성그룹의 타이틀을 단 제가 방송을 탈 확률이 적다는 거니까.
“뭘 봐, 깡패 처음 봐?”
제 눈치를 보는 이겸에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한 권태정이 부드러운 뺨을 톡 건드렸다. 어깨를 움칠하면서도 피하지는 않는 것에 장난기가 발동한 권태정이 아까처럼 말랑한 뺨을 아프지 않게 만지작댔다. 이겸은 한참이나 그 손길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목덜미가 달아오른 채.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이겸에게 무척 낯선 일이었다. 다람동이 재개발 사업에 들어가고, 할아버지가 이주비 사기를 당한 뒤부터 이겸에게는 일을 안 하고 보내는 날, 일을 안 해도 되는 날이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섞어 했고, 그 과정에서 무시를 당해도, 또 조롱을 당해도 모두 다 견뎠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런 이겸에게 오늘은 아침에 일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그건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하루였다. 근사한 곳에서 너무너무 맛있는 디저트를 만났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먹기도 하고, 또 마음이 편해질 만큼 예쁜 카페에서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시간을 제가 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저의 상황에서 보내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어 마음 한 편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미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돈 줘야지.”
“돈이요?”
“내가 네 알바 두 번 깼잖아.”
“…안 주셔도 돼요. 연회장은 저 도와주신 거고, 또 오늘은 제가 약속 안 지켜서 그렇게 된 거니까 괜찮아요.”
“그럴 땐 괜찮다고 하지 말고 악착같이 돈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어쨌든 내가 중간에 다 데리고 나온 건데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은 해야지.”
이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앞 도로 한쪽으로 차를 세운 권태정이 지갑을 꺼내 비상시를 위해 들고 다니는 백만 원짜리 수표를 두 장 꺼내 이겸에게 내밀었다. 아침에도 쓰고, 지금도 써서 이제 지갑 안에는 수표가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 받아.”
얼결에 받은 수표가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백만 원짜리인 것을 본 이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겸은 다시 수표를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너무 많아요.”
“뭐가 많아? 어제는 연회장, 오늘은 토끼. 이 정도 되잖아.”
“어제는 십오만 원이고, 오늘은 오만 원이에요. 그리고 정말 안 주셔도 괜찮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 받아야 할 일로 보여서 주는 거야. 그냥 받아. 아님 뭐 깡패가 그렇게 싫은데 종일 같이 있어 준 값으로 치던지.”
“…아까 그건 같이 있는 게 싫어서 드린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확고하게 깡패는 싫다고 말하던 애가 미안한 얼굴이 된 것을 본 권태정이 소리 내어 웃으며 이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트렸다. 손에 닿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좋았다.
“그럼 앞으로도 나랑 놀아 줘.”
“…….”
“어차피 3개월이잖아. 아니지, 이제 3개월도 안 남았어.”
“…….”
“시급 열 배로 쳐 줄게. 나쁠 거 없잖아. 빨빨대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그냥 나랑 같이 있기만 하면 되는데.”
이겸은 권태정의 속내가 궁금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많은 돈을 주면서 단순히 같이 시간을 보내 달라고 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
“저한테 따로… 바라시는 게 있으신 거예요?”
“따로 바라는 거? 음, 뭐 이런 거 말하는 거야?”
핸들에 엎드려 이겸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손을 뻗어 이겸의 티셔츠를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얼굴처럼 하얗고 보송해 보이는 배와 허리를 보자 솔직히 구미가 당기기는 했다. 놀란 이겸이 얼른 제 손을 잡아 티셔츠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예 가슴 위로 더 확 올려 버렸을지도 몰랐다.
“왜, 네가 말한 게 이런 거 아냐? 난 왜 이런 쪽으로만 머리가 돌지.”
“…이, 이러시면 진짜 안 만날 거예요….”
“내가 너한테 발정 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 알파가 굳이 베타랑 뭘 할 필요가 없잖아.”
제 말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이겸을 보며 대수롭잖게 웃은 권태정이 아직 잡혀 있는 손을 빼내 위로 올려 그대로 이겸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아…!”
몸을 바로 세우며 조수석으로 기울인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목덜미에서 아주 약한 복숭아 향이 났다.
“뭐, 뭐 하시는…!”
“너한테서 그 디저트 냄새 난다.”
“…….”
“복숭아 냄새.”
“…….”
“먹고 싶네.”
권태정이 말할 때마다 목덜미로 따뜻한 숨이 닿는 게 느껴졌다.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해지는 뜨거움에 이겸은 겨우 권태정의 어깨를 잡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까이 닿아 있는 권태정에게서 나는 좋은 향 때문에 자꾸만 머리가 멍해지고, 몸에서 힘이 빠졌다.
“비누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흣….”
목소리와 함께 닿은 코끝이 약한 피부를 문지르며 올랐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밀어야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꼭 권태정을 붙잡고 있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이겸은 목소리 사이로 말캉하고 뜨거운 것이 목덜미에 닿은 순간 너무 놀라 권태정을 뒤로 밀고, 혀끝이 닿은 곳을 손바닥으로 숨기듯 감쌌다. 손바닥 안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 돈은 받아. 그다음은 받고 난 다음에 생각하고. 네가 원래 받아야 할 돈의 열 배를 준 거니까 열 배 만큼 나랑 놀아 준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래도….”
“나랑 노는 게 어려워? 그냥 밥이나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고. 좆같은 컨테이너에 처박혀 있는 게 지겨우니까. 그렇다고 내가 다른 집 노인네들이랑 놀 수는 없잖아.”
“…….”
“놀아 주는 값으로 선금 받았다고 생각하던가. 그럼 돈 얘기는 이제 됐고.”
피곤하다는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권태정이 수표를 보며 만지작대는 이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은 몇 시에 끝나?”
“…….”
“말 안 해 주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열 시 반에 끝나요.”
“데리러 올게.”
“…안 그러셔도 돼요.”
“아직 얘기 다 못 했잖아. 끝날 때쯤 올 테니까 기다려. 먼저 가면 나 또 서운해. 그게 반복되면 화도 날 거고, 화가 나면 더는 너한테 착한 척 안 하겠지?”
나긋한 목소리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다. 이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긍정 쪽의 대답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다시 한번 인사하려 몸을 숙이는데 조수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이따 봐.”
언제 협박을 했었냐는 듯 저를 보고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작게 한숨지었다. 그리고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멀어지는 차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직 목덜미에 남은 화끈거림과 함께.
* * *
이상한 사람. 바보 같은 정의지만, 권태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속을 너무 잘 드러내는 것 같다가도 속내를 하나도 알 수 없는 것처럼 굴기도 하고, 나긋하게 굴다가 어느 순간 협박을 하기도 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제가 봐 온 철거촌 용역 관리실장이나 구대범 같은 깡패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기는 했다. 거친 말을 툭툭 뱉어 낼 때도 있지만, 폭력적이지 않아 같이 있어도 맞거나 크게 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고, 아직 폭력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아직까지 제가 느낀 바로는 그랬다.
“…….”
락커에 넣어 둔 수표 두 장도 그랬다. 놀아 주는 것에 대한 선금이라 말은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큰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줄 수가 있는 건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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