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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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아르바이트 있어?”
“네. 이따 카페 아르바이트 있어요.”
“그건 매일 해?”
“매일은 아니고 월, 화, 수 오후에만 해요.”
“오늘 토요일이잖아.”
“아…. 이번 주는 사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셔서 다음 주 월, 화, 수 대신 이번 주말에 하기로 했어요.”
이겸의 말에 핸들을 두드린 권태정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매일도 아니고 월, 화, 수 그것도 오후에만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꽤 특이한 일정이었다.
“월, 화, 수만 하는 건 뭐야? 특이하네.”
“그게… 사장님께서 대부분 직접 가게 보시는데 월, 화, 수 오후에는 따로 하시는 일이 있어서 그때만 하고 있어요.”
“차라리 풀타임으로 구하는 게 낫지 않아?”
“저도 그 생각 했었는데… 이벤트 회사에서도 일이 많이 들어오고 그 일이 카페 일보다 시급이 더 높을 때가 많아서요. 연회장 같은 일도 그렇고…. 풀타임으로 하면 이벤트 아르바이트 일은 주말에만 할 수 있어서 일단은 지금처럼 하고 있어요.”
진지하게 질문을 하니 또 제법 진지하게 답이 돌아왔다. 저와 말을 아예 하기 싫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한 권태정이 다시 도로로 차를 몰았다.
“알바 전까지 할 거 없지.”
“…네.”
“그럼 커피나 마시자. 오늘 한 잔도 못 마셨더니 머리 아파. 카페는 내가 아는 데로 가도 되지?”
“네.”
“여기서 별로 안 멀어. 한 이십 분? 이따 안 늦게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 말고.”
권태정은 평소 분위기도 좋고, 개인 룸을 사용할 수 있어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물론 커피 맛도 아주 예술인 곳이었다.
“커피 마실 줄 알아?”
“…네.”
“어른이네.”
“…달콤한 커피만 마실 줄 알아요. 쓴 건 잘 못 마시겠어요, 아직.”
“단 거면 뭐. 시럽 든 거?”
“네…. 바닐라 라테나 슈크림 라테 같은 거요.”
달콤한 커피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권태정은 제 형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바닐라 라테는 기정이 형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였다. 일할 때만 카리스마 있지 평소에는 부들부들하고 성격이 동글동글한 형은 늘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단 커피를 좋아했다. 권태정은 저를 늘 ‘우리 막내’라 부르며 걱정하고, 웃는 형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 지었다.
“밥 대신 그거 사 마시는 거야?”
“아니요. 커피값이 너무 비싸서 전 못 마셔요. 카페 사장님께서 마시고 싶은 거 뭐든 하루에 석 잔은 마셔도 된다고 해 주셔서… 가끔 한 잔씩 만들어 마시는 게 전부예요.”
“석 잔 마셔도 된다는데 왜 가끔만 마셔. 월, 화, 수 아홉 잔 마셔.”
권태정의 말에 작게 웃은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앞만 보고 가던 권태정은 옆에서 터지는 달착지근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연이겸이 웃고 있었다.
“너무 많이 마시면 잠도 잘 안 오고,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한 잔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몇 시간 일하지도 않는데 석 잔이나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너 같은 직원만 있으면 회사들 다 존나 발전할 텐데. 뒤로 뭐 빼돌리지도 않고.”
다시 조수석에서 숨소리와 비슷한데 그보다 조금 더 톡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말랑한 과일을 베어 물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약한 바람에 연한 색의 꽃잎이 흔들릴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
왜 자꾸 웃고 난리야. 기분 존나 이상하게. 권태정은 귓가에 묻은 이겸의 아주 작고,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뭔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자꾸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고, 귀를 기울이고 싶고, 또 웃는 게 보고 싶은 충동을 짓누르며.
카페에 도착해 마실 걸 고르라니 제일 싼 오늘의 커피를 마시겠다는 이겸을 자리로 데려가 앉힌 권태정이 혼자 카운터로 가 제가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이겸이 마실 바닐라 프라페를 주문했다. 휘핑크림을 올릴 거냐는 생소한 물음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잊지 않았다.
달콤한 커피만 좋아한다면서 오늘의 커피를 고르는데 정말 기가 막혀 하마터면 지랄도 참 구질구질하게 떤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 말을 참고 얌전히 데려다 앉힌 것은 저보다 열두 살 어린애를 향한 어른의 배려이자 어른만 가질 수 있는 인내심이었다.
“12번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손보다 작은 진동벨이 울리는 것에 픽업 데스크로 간 권태정은 평생 한 번도 시켜 보지 않았고, 당연히 먹어 본 적도 없는 휘핑크림이 가득한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이겸과는 꽤 어울리는 모양새의 커피였다. 하얗고 몽글몽글해 보이는 휘핑크림이 딱 이겸과 비슷했다. 예쁘고, 연약해 보이며… 또….
“…….”
차마 사람을 상대로 맛있어 보인다는 생각까지 할 수는 없어 뭉그러뜨린 권태정이 저를 보고 웃는 직원에게 똑같이 웃으며 인사한 뒤 트레이를 들고 카페 정원 쪽 가장 끝에 있는 개인 룸으로 들어갔다. 이겸은 바깥으로 난 창밖에 보이는 꽃을 보고 있었다.
“어, 저 주세요.”
권태정이 들어오는 소리에 놀란 이겸이 얼른 다가와 트레이를 받아 테이블에 놓았다.
“크림 있는 게 네 거.”
“…….”
“싫어?”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이겸은 권태정이 사 온 커피 위에 얹힌 휘핑크림을 빨대로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면서 달콤함만 남는 느낌이 좋아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이런 거 좋아하면서 오늘의 커피 마시겠단 소리는 왜 했어?”
“…전 정말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 저 점심도 두 번이나 사 주시느라 돈도 너무 많이 쓰셨잖아요.”
“안 그래도 걱정 존나 많아 보이는데 내 돈 걱정까지 하지는 말지? 네가 걱정할 필요 없는 거거든, 그거.”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게….”
순식간에 가라앉은 이겸을 물끄러미 보던 권태정이 손을 뻗어 그 뺨을 톡 건드렸다. 고개가 들리고 저를 보는 동안에도 권태정은 톡, 톡 이겸의 뺨을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너 좋아하는 거 다 사 줘도 나 안 굶어.”
“…….”
“그러니까 돈가스 먹고 싶고, 이런 커피 마시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 줄 테니까.”
“…….”
“존나 감동이지.”
씩 웃은 권태정이 이번에는 이겸의 뺨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찹쌀떡 같은 피부가 권태정의 손가락 사이에서 짓주물렸다.
“아님 내가 너한테 돈 쓰고 싶게 만들어 보던가.”
“…….”
“혹시 알아? 내가 너 좋아하게 돼서 매일 돈가스 사 줄지.”
하도 만져서 조금 빨개진 뺨을 매만진 권태정이 손을 떼 열이 오른 손끝으로 차가운 커피잔을 쥐었다.
“그럼 우리 이겸이는 완전 땡잡는 걸 텐데.”
철거촌에서 태성그룹 입성까지 하고. 뒷말을 삼킨 권태정이 커피를 크게 한 모금 삼켰다. 전에 회사에서 일할 때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며 일을 해서 그런지 최대한으로 줄여도 한 잔이라도 안 마시면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전… 깡패는 싫어요.”
카페인 중독인가…. 커피를 보며 생각하던 권태정은 그 생각 사이로 파고드는 이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전… 깡패는 안 좋아할 거예요.”
갑자기 깡패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다. 권태정은 가만히 이겸을 본 채 조금 전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고, 너한테 돈 쓰고 싶게 만들어 보라고 농담을 했고, 그러다가 혹시 아냐, 내가 널 좋아하게 될 지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런데 그 말들에 나온 대답이 깡패는 싫다는 거라니.
“내가 깡패라는 거야?”
“…컨테이너에 계시잖아요. 실장님이시고….”
“…….”
“전에 용역 관리하던 실장님도… 거기 계셨어요. 그분 나가시고 온 분이니까….”
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권태정은 심각하게 지난 모든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건지 궁금해 생각해 보던 권태정은 가장 처음 지점에서 그 답을 찾았다.
‘저 오늘 컨테이너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거든요.’
‘…컨테이너요?’
‘네. 빨간 컨테이너. 아시죠? 완전 여기 다람동 랜드마크던데.’
처음 이겸을 직접 찾아가 컨테이너에 이사 왔다고 한 그 순간부터 이겸이 저를 용역 관리실장 후임으로 온 새로운 실장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태성그룹 본사에서 나온 기조실장 권태정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그냥 컨테이너 이야기를 꺼낸 바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권태정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뭐 깡패라 치고. 깡패는 왜 싫은데? 내가 널 패기를 했어. 뭐 목숨 가지고 협박을 했어. 돈 뜯은 적도 없고 도와주기만 했는데 왜?”
“…무섭기도 하고, 또… 위험하기도 하고… 자주 싸우는 것도 싫고….”
“너한테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
이겸의 말에 흥미가 생긴 권태정이 커피를 멀리 밀어 둔 채 턱을 괴고 이겸에게 집중했다.
“…위험한 일해서 다칠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잖아요. 전 그런 거 싫어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누군가를 좋아해야 한다면 전 평범한 사람 좋아할 거예요.”
“평범한 사람이 뭔데?”
“…그냥 자기 일 열심히 하고, 퇴근하고 만나서 같이 저녁도 먹을 수 있고… 오래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일은 열심히 하는데 돈이 없어. 그래도 돼?”
“돈이야… 같이 벌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돈도 그럭저럭 벌고 너랑 저녁도 먹고 뭐 다 평범하게 하는데 얼굴이 진짜 못 봐 줄 정도야. 그래도?”
“얼굴은 하나도 안 중요해요.”
권태정은 저도 잘난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제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이겸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럴 리가. 하나도 안 중요할 리가 없는데.
“잘생기고 돈 많고 진짜 모든 면에서 끝내주는 깡패랑 못생기고 돈도 없는데 그냥 건실한 직장인.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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