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21화 (21/174)

#21

볼펜을 든 이겸의 손이 움직여 수제 돈가스가 적힌 옆으로 있는 빈칸에 숫자 1을 적었다. 권태정은 고민하다가 돈가스를 고른 이겸을 보며 숨처럼 웃음을 탁 터뜨렸다. 씨발, 고르고 고른 게 수제 돈가스라니. 스무 살짜리들은 원래 저렇게 다 귀여운가 싶었다.

“그거 하나면 돼?”

“네…. 실장님은 안 드세요?”

“난 아까 다 먹었잖아. 그리고….”

눈동자만 움직여 누가 봐도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오래된 티가 나는 가게 안을 훑은 권태정이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여기에서 뭔가를 먹느니 그냥 굶어 뒈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하나만 주문할게요.”

“어.”

고개를 끄덕이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조심스럽게 사장님을 불러 돈가스에 체크한 주문서를 내밀었다.

“김밥만 사가더니 오늘은 돈가스네? 우리 집 돈가스가 얼마나 맛있다고. 매일 아침 우리 와이프랑 같이 두들겨서 직접 만들어. 맛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에….”

뭐야, 사장한테는 말도 늘려서 대답하네. 말꼬리를 살짝 늘여 말하는 이겸을 보던 권태정이 곧 제 앞으로 놓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시선만 떨어뜨려 바라보았다.

“우동 국물 좀 드시고 계세요.”

우동 국물을 먹으라고? 앞에 놓인 스테인리스로 된 국그릇을 노려본 권태정이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코 아래를 손가락으로 살짝 막았다. 찝찌름한 우동 국물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됐어. 난. 너 많이 먹어. 네가 좋아해서 온 거잖아.”

“…….”

손도 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삐딱하게 앉아 굉장히 불결하다는 듯 구는 권태정을 보니 자리가 너무 불편해졌다. 하지만 저까지 불편하게 굴면 가게 사장님에게 너무 죄송할 것 같아 주방을 바라본 이겸이 수저함에서 수저를 꺼내 제 앞에 놓았다. 그리고 닫기 전 권태정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안 먹을 건지 묻는 시선에 권태정은 됐다는 듯 손을 한 번 툭 털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먹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의자에 마지못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편하게 뭔가를 먹을 수 있을까. 이겸은 체념에 가까운 숨을 내쉬며 숟가락으로 우동 국물을 한 숟가락 떠 호오 불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겸은 조용히 몇 번 더 국물을 떠먹었다.

“그건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나랑 밥 먹으려면 입맛을 좀 고급스럽게 만들어 봐.”

“제가 아까 먹은 것처럼 그렇게 비싸고… 특이한 음식들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복숭아 아이스크림이랑 케이크는 진짜 맛있었어요.”

“얼마나 맛있었는데?”

“음… 매일매일 먹어도 안 질릴 것 만큼요.”

복숭아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진 이겸이 살짝 미소 지었다. 눈이 접히거나 소리가 나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웃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

씨발, 웃는 거 봐라. 존나 예쁘네. 개인적인 위생 기준에 맞지 않아 닿지 않으려 노력하던 테이블에 손을 올린 것도 잊은 권태정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초조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마음이 몹시 불안정하게 날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웃긴.”

그리고 설레어 버린 사람의 모습과도 같았다. 권태정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괜히 ‘하우스 오브 김밥’이라 문에 적힌 것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이름 한 번 거창하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아도 이겸의 웃음에 빨개져 버린 귀 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수제 돈가스 나왔습니다. 밥은 더 필요하면 말하고, 얼마든지 더 줄 테니까.”

“네, 고맙습니다.”

“맛있게 먹어. 같이 오신 분은 뭐 서비스로 국수라도 말아 드릴까요?”

그냥 가지 저한테 자꾸 국물을 주고, 말을 거는 사장님을 바라본 권태정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앉아 최대한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식사를 하고 와서 괜찮습니다. 뭐 맛있어 보이는 게 많은데 다음에는 꼭 식사하러 오고 싶네요.”

“아, 이 학생 밥 사 주러 오신 거구나. 다음에는 꼭 식사하러 오세요. 우리 집에 맛있는 게 진짜 많은데 다음에 오시면 여기 오므라이스나 제육볶음 드셔 보세요. 아니면 라볶이도 맛있고, 또 저희가 양념장을 다 손맛 좋은 우리 와이프가 개발해서 쓰거든요. 면류 좋아하시면 비빔국수나….”

그럴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 제발 입 좀 다물라고 화를 내거나 분위기를 망치면 아마 이겸은 다시 이 가게에 오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저야 상관이 없지만, 괜히 조금만 참으면 될 걸 못 참아서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권태정은 뉴스 메인에 [단독] ‘보복 운전’에 이어 이번에는 ‘진상 손님’이 된 태성그룹 삼남이라는 문구가 뜨는 것을 떠올리며 만인에게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웃음을 유지했다.

“추천해 주신 것들 하나씩 다 먹어 보러 와야겠는데요. 단골 되겠어요.”

“그래 주시면 너무 좋죠! 꼭 오세요, 라면 서비스 드릴 테니까!”

빈 테이블을 닦으며 웃는 사장에게 의례적으로 싱긋 웃어 대화를 마무리한 권태정이 지친 얼굴로 돈가스를 자르고 있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 먹기 좋게 돈가스를 조각조각 자르는 게 귀여워 보였다. 아까 긴장해서 커틀러리를 쥐고 엄청 손에 힘을 주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저기….”

먹기 좋게 썬 돈가스 조각 하나를 포크로 찍은 이겸이 조심스럽게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권태정은 제 앞으로 다가온 포크, 이겸의 손을 보며 잠시 머뭇댔다. 머리는 절대 안 먹는다고 저를 말리는데 마음은 이겸을 무안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

평소의 저였다면 당연히 머리의 말을 따랐을 것이었다. 아니, 마음이 말을 하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금은 뭔가 달랐다.

앞에 앉은 저를 생각해서 먼저 하나라도 먹으라고 내민 이겸의 마음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권태정은 제가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시무룩해져 뒤로 손을 거두는 이겸의 손목을 잡아당겨 다시 앞으로 다가온 돈가스 조각을 입에 넣었다.

“…….”

“…….”

한 번 더 권하기는 했지만, 정말 권태정이 먹어 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이겸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권태정은 눈을 마주하며 입 안의 것을 씹어 목 뒤로 넘겼다. 생각보다 바삭하고, 또 생각보다 맛있었다. 왜 평소에 이겸이 이걸 먹고 싶어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맛있네.”

“정말요?”

“어. 그러니까 이제 얼른 너 먹어.”

“…네.”

걸린 듯 만 듯 옅은 미소가 또 잠깐 이겸의 입술을 스쳤다. 권태정은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넣은 채 턱을 괴고 그런 이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크.”

“네?”

“내가 먹은 건데.”

“아…. 괜찮아요.”

당연히 새 포크를 쓸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제가 먹은 포크로 돈가스를 집어 입에 넣는 이겸을 본 권태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위가 상해 속이 울렁인 게 아니라 제가 머금은 것을 그대로 입에 머금는 이겸을 보니 마음이 마구 소란해졌다. 원래 그렇게 먹던 포크로 남을 잘 먹여 주나? 아니면 나한테만…?

“맛있어?”

“네, 너무너무 맛있어요.”

그 비싼 코스는 거의 입도 제대로 대지 못하더니 육천 원짜리 돈가스는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는 게 권태정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제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부터 제 이해 영역을 벗어났기에 그냥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많이 먹어. 천천히.”

“…네. 더 드실래요?”

“아니. 너 먹어. 난 너 잘 먹는 거 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거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이겸이 다시 잘라 놓은 돈가스를 포크로 찍어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계속 먹는 걸 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잠시 시선을 돌려 낡은 가게 안을 보던 권태정의 두 눈은 금세 흥미를 잃고 이겸에게 돌아왔다.

“…….”

달달하니 생각보다 꽤 괜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게 저렇게 맛있나 싶었다. 권태정은 가만히 또 조용히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 가는 이겸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퍼런 불빛이 들어오는 컵 보관함을 열어 스테인리스 컵 하나를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권태정은 물이 찰랑이는 컵을 이겸의 앞으로 놓아 주었다. 저를 줄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이겸의 눈이 컵에 한 번 닿았다가 권태정에게로 옮겨 가 닿았다.

“물은 셀프래.”

“…….”

다시 이겸의 맞은편에 앉은 권태정이 얼른 더 먹으라는 듯 가볍게 주먹을 쥐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그에 정신을 차린 이겸이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컵을 들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찬물을 처음 마시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조금 더 시원하고, 또 조금 더 달게 느껴졌다.

조금 남은 돈가스를 마저 먹은 이겸은 권태정이 가져다준 물도 전부 다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간 권태정은 카드를 꺼내 수제 돈가스값 육천 원을 계산했다. 최근 계산한 것 중 가장 저렴하고, 또 가장 뿌듯한 소비였다.

“이제 배불러?”

“네,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사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밥을 좋아해서 먹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김밥보다 돈가스가 늘 먹고 싶었을 거라 생각하니 소란했던 마음이 막 울렁이기 시작했다. 씨발, 오늘 아주 간만에 마음이 지 의견도 내고, 멋대로 뒤집히고 흔들리고 혼자 지랄을 해 대네. 권태정은 요란한 마음의 움직임을 무시한 채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