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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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씩 계속 나올 건데 그냥 한 번에 다 차려 달라 그럴까?”
“괜찮아요. 그냥 주시는 대로 먹을게요.”
“그래, 그럼.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그 뒤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는 따뜻한 수프가 나왔다. 해산물 수프라는데 이겸의 입에는 조금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온 치즈 샐러드도, 또 오리고기 요리도 이겸에게는 생소해서 조금 맛을 보고 잘 넘기지 못했다.
제가 다니는 파인다이닝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캐주얼한 곳이라 일부러 여기로 온 건데 이겸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겨우 스테이크만 조금 먹는 것을 본 권태정이 작게 한숨지었다. 그마저도 트러플 향이 낯설어 잘 먹지 못하는 게 보였다.
“억지로 먹을 거 없어.”
“…아니에요. 더 먹을 수 있어요.”
“그럴 거 없다니까. 그러다 체하면 나만 골치 아파.”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조심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 예쁘고 괜찮은데 모든 음식에서 뭔가 독특한, 낯선 냄새가 나서 그걸 참고 입에 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죄송해요…. 생각해서 좋은 곳 데려와 주셨는데….”
“되게 쉬울 것 같은데 진짜 어렵다, 너.”
“…네?”
“아니, 그냥.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잘 없다 싶어서. 그런 적이 살면서 거의 없었거든.”
직원을 불러 테이블을 정리하게 한 권태정은 마지막으로 복숭아 셔벗과 무스가 나오는 것에 이겸을 바라보았다.
“단 거 좋아한다며. 디저트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먹어 봐.”
“네….”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작은 스푼을 들어 복숭아 향이 달콤하게 나는 셔벗을 떠 입에 넣었다. 달착지근하고 향긋한 복숭아 향이 입 안에 맴돌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건 입에 맞아?”
“네, 진짜 맛있어요.”
“나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니고?”
“아니에요, 정말….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요.”
셔벗을 한 입 더 먹고, 옆에 있는 복숭아 무스까지 먹는 얼굴에는 여태까지 잘 보이지 않던 생기가 물들어 있었다. 권태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열심히 디저트를 먹는 예쁜 얼굴을 내내 눈에 담았다.
“…….”
늘 현실과 맞닥뜨려 지치고, 힘들고, 곤란해 보이는 모습만 봤지 이렇게 진짜 좋아하는 것과 마주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권태정은 제 몫의 셔벗과 무스도 이겸의 앞으로 놓아 주었다. 이걸 왜 주냐는 듯 마주치는 시선에 먹으라고 고개를 까딱하자 이겸은 거절하지 않고 권태정이 준 디저트까지 먹기 시작했다.
수치심이나 당혹감으로 상기된 게 아니라 정말 좋아서 달착지근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예뻤다. 복숭아 냄새가 폴폴 나는 애가 복숭아로 된 디저트에 푹 빠진 걸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더 시켜 줄까?”
“아니에요. 많이 먹었어요. 실장님 드실 것도 저 주셨잖아요.”
“난 여기 디저트는 별로 안 좋아해. 너무 달아. 뭐 그래도 하나라도 입에 맞는 게 있어서 다행이네.”
“…정말 맛있었어요.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에요.”
그래도 나름 고심해서 데리고 온 곳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디저트를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권태정은 복숭아 디저트를 먹어 그런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진 이겸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정말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애 같은데 생각보다 문제 읽는 것도 어렵고, 또 답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제가 생각한 것은 계속 오답이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 답이 있어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답을 찾아 문제에 동그라미가 쳐지는 건 물론 기분이 좋지만.
“다 먹었으면 가자.”
“네….”
직원을 불러 보관해 둔 겉옷을 받아 입은 권태정이 안내를 받으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는 전부 카드 정보가 입력이 되어 있어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괜찮아요. 실장님 몫까지 맛있는 거 먹었잖아요.”
“아이스크림이랑 그 작은 무스 그거 얼마나 된다고. 빼지 말고 말해 봐. 내가 가고 싶은 데 맘대로 데려갔으니까 이번에는 너 좋아하는 데로 가자.”
호텔 정문으로 나선 권태정은 타이밍에 맞게 제 차를 바로 앞으로 몰고 와 서는 직원에게 수표 한 장을 팁으로 내밀었다. 그것에 놀란 직원이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여 차가 호텔을 빠져나갈 때까지 내내 인사했다.
“말해 봐. 뭐 좋아해.”
“…저 정말 괜찮아요.”
“너랑 밥 먹고 싶었는데 정작 넌 얼마 못 먹었잖아. 괜찮으니까 말해. 평소에 좋아해서 잘 먹는 게 있긴 할 거 아냐.”
이겸은 평소에 제가 잘 먹는 것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작은 크기의 컵라면과 삼각김밥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머릿속에 맺히는 것은 분식집에서 파는 가장 기본 김밥 한 줄. 이벤트 일을 나간 곳에서 시켜 줄 때면 자장면이나 볶음밥 같은 것을 먹을 때도 있었다. 이겸은 그중 가장 먹기 간편한 것을 얘기했다.
“…김밥 자주 먹어요. 빨리 먹을 수 있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고….”
“김밥?”
권태정은 잠시 ‘김밥’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일 년에 한 번, 아니 몇 년에 한 번도 먹을 일이 없는 음식이었다. 어릴 때도 김밥 같은 걸 싸서 소풍을 다니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권태정과는 조금도 가까운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 건 어디서 팔아? 뭐 김밥 파는 데가 있나? 아, 초밥 먹을 때 그런 거 봤다.”
“…편의점에도 있는데 분식집에서 주로 팔아요.”
“분식? 떡볶이 뭐 그런 거?”
“네….”
“자주 가는 데 있어?”
권태정이 말하는 ‘자주’의 의미를 떠올리던 이겸은 잠시 고민했다. 분식집에 김밥을 사러 가끔 가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가끔이지 ‘자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주… 까지는 아니고 가끔 가는 데는 있어요….”
“주소.”
“한국대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건데…. 그런데 거기는 왜 물으세요?”
“가려고. 밥 먹어야지, 너.”
“저 정말 괜찮아요….”
“너도 넌데 궁금해서. 나 분식집 한 번도 안 가 봤거든.”
집에서 먹는 것에도 수준이 있다고 가르쳤다거나 길거리 음식, 또는 간이 센 음식들을 먹어 좋을 게 없다고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권태정은 그냥 권태정 자체로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도 그 흔한 분식집 한 번 가 본 적이 없었다.
각종 모임을 하느라 빌린 술집이나 고기를 파는 식당도 권태정의 위생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태정은 모두 다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그런 식당에 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늘 따로 샌드위치 같은 것을 사서 먹거나 호텔 도시락 같은 것을 배달해 먹고는 했다.
“거기 더러워?”
“…아니요. 오래된 집이기는 한데 깨끗해요. 그리고 사장님도 너무 좋은 분이세요.”
“돈 벌려고 착한 척하는 거지.”
표지판에 적힌 ‘한국대입구’를 보고 좌회전을 한 권태정이 그대로 쭉 뻗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뭘 더 먹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말해 봤자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 줄 사람이었으면 아까 몇 번 괜찮다고 했을 때 포기했을 테니까. 그래서 이겸은 그냥 가만히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해지는 풍경을 내내 눈에 담았다.
“…….”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제가 지금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알 수 없는 것은 일방적인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정말 서운한 얼굴을 하다가 또 눈을 뗄 수가 없을 만큼 따뜻한 얼굴로 웃는 권태정이었다. 이겸은 잠자코 운전하는 권태정을 몰래 훔쳐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권태정은 한국대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노란 간판의 분식집을 심란한 얼굴로 보다가 들어갔다. ‘하우스 오브 김밥’이라는 상호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간다고 말을 뱉어 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사장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불결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내보이며 두 손가락으로 의자를 잡아 뺐다.
“학생 왔네? 주문할 거 체크해서 올려 두면 바로 만들어 줄게.”
메뉴판 겸 주문서를 테이블에 얹은 사장님이 다시 창가로 가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권태정은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넣지 않고 옆으로 삐딱하게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뭐 해? 먹고 싶은 거 체크하라잖아.”
“…전 그럼 김밥 먹을게요.”
“야, 이겸아. 메뉴가 백 개는 되는 거 같은데 무슨 김밥이야. 진짜 먹고 싶은 거 먹어. 너 여기 오면 김밥만 먹어?”
“…네.”
“왜.”
“…그게 제일 싸고… 가져가서 빨리 먹을 수 있고, 바쁘면 보관해 뒀다가 나중에 또 먹을 수도 있고….”
역시 돈이 이유라 말하는 이겸을 보며 혀를 찬 권태정이 메뉴를 눈으로 슥 훑어 내렸다. 만 원도 안 되는 메뉴들 수십 가지의 이름만 봐도 음식에 질려 버릴 정도로 파는 게 많았다.
“그럼 여기서 먹어 보고 싶었던 거 먹어.”
“…….”
“좋아하는데 비싸서 못 먹었던 거.”
뭔가 생각하는 걸 보니 그런 게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하나 걸친 채 곰곰 생각에 잠긴 이겸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첫 칸부터 끝 칸까지 전부 다 대신 체크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조금 전 제가 레스토랑에서 먹은 코스 하나 값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치 보지 말고 골라. 야, 만 원도 안 되는 거에 뭔 눈치를 보냐.”
“그럼 전… 이거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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