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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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어 주면 내려.”
“…네.”
호텔 정문 앞으로 들어가자 직원 여럿이 나와 문을 열어 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곧 급히 문 바깥으로 나온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권태정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안내했다.
이겸은 그런 권태정의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얼마나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면 이렇게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는 걸까 싶었다. 깡패여도 돈만 많으면 모두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놓치지 말고 옆으로 와.”
“…….”
슬쩍 뒤로 뻗어 다가온 권태정의 손을 가만히 본 이겸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옆으로 섰다. 권태정의 손은 참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얼마 전 밤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잡으라고, 잡아도 된다고 저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뻗는 그 손을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잡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들었다. 조용하고, 특별할 게 전혀 없는 이겸에게 찾아온 참 드문 충동이었다.
“실장님께서 평소 좋아하시는 룸으로 준비했습니다. 다른 뷰를 원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좋은데요.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웃으며 상냥하게 말하는 권태정은 또 평소와는 몹시 달라 보였다. 참 잘 웃는 사람이구나 싶다가도 그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또 너무나 냉정해 보여서 도대체 어떤 모습이 권태정이라는 사람인 걸까 궁금했다.
“겉옷 보관해 드릴까요?”
“…아, 저는 괜찮아요.”
직원이 빼 주는 의자에 어색하게 앉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이겸이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권태정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높고, 대단한 곳에 와 보는 건 처음이라 어떤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 자꾸만 이런 곳이 익숙해 보이고 잘 어울리는 권태정만 보게 되었다.
“못 먹는 거 있어? 먹으면 죽는 거.”
“…없어요.”
“고기가 좋아, 생선이 좋아?”
“…고기….”
메뉴를 보며 삐딱하게 턱을 괴고 묻던 권태정이 자세를 바로 한 뒤 상체를 숙여 주문받을 준비를 마친 직원을 바라보았다.
“A코스로 준비해 주세요. 스테이크는 핏물 안 보이게 익혀 주시고, 디저트는 종류별로 하나씩 다 할게요.”
“와인이나 음료 준비해 드릴까요?”
“아, 와인…. 차가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네요. 술은 됐고, 어린 친구가 좋아할 거 한 잔이랑 단맛 없는 티 한 잔 부탁드립니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룸을 나서기 전에도 한 번 더 공손하게 인사하는 직원을 향해 이겸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이겸을 본 권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가깝게 당겨 앉았다.
“인사할 때마다 그렇게 반응할 거 없어.”
“…….”
“분위기는 마음에 들어?”
저에게 어울리는 질문이 아니라 생각한 이겸은 잠시 제집보다 넓고 쾌적한 룸 안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텐데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궁금했다.
“…네. 깨끗하고, 좋은 향도 나고….”
사실 이겸이 말하는 좋은 향은 룸에서 나는 방향제 향이 아니라 권태정에게서 나는 묵직하고 향긋한 그 특유의 향이었다. 이겸은 연회장 기둥 뒤 오목한 공간에서 몸을 맞대고 있었던 그 몇 분을 떠올렸다.
“…….”
권태정의 싫지 않은 무게가 몸을 누를 때마다 벽과 권태정 사이에 갇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밀어야 하는데 슈트 자락을 잡게 되고, 더 닿으면 안 되는데 그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가만히, 아주 가만히 그 순간을 보냈던 기억에 귓가가 뜨거워졌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도 권태정이 제 가까이에 있었다. 고개만 들면, 눈동자만 움직이면 보이고,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왜 그렇게 봐?”
“…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 어제도 그러더니 한 번씩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네.”
얼굴이 아니라 향 때문이지만, 사실 얼굴만 봐도 눈을 떼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가 움직이는 곳으로 느릿하게 따라붙는 시선이나 쉽게 입술로 번지는 웃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조화롭게 자리 잡은 권태정의 얼굴은 그 누구라도 한 번 보면 내내 잔상으로 남을 만큼 인상 깊었다. 얼굴만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깡패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되지, 왜 안 돼. 식사할 때는 뭐 꼭 맞은편에 앉거나 좀 떨어져서 앉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불편해?”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됐네. 물론 네가 불편하다고 했어도 여기 앉았을 거지만.”
씩 웃은 권태정이 이제 아예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노골적으로 이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겸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척 괜히 식탁보를 보기도 하고, 투명한 물컵을 보기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권태정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셔도 돼요.”
“할 말? 없는데.”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뭐 그렇게 생겼나 싶어서.”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아 괜히 뺨을 한 번 문지른 이겸이 허벅지 위로 두 손을 내려 꼼지락거렸다. 그냥 지금이라도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고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예뻐서 하는 말이야.”
“…….”
“얼굴은 진짜 내 취향이거든.”
면전에다 대고 취향이니 뭐니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할 수가 없었다. 이겸은 당황한 얼굴을 조금도 숨기지 못한 채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너도 내 얼굴은 좋아하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복잡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고.”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럼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남자의 얼굴이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좋다거나 또 싫다거나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제가 살아가는 매일에 있어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구대범한테 또 전화 왔어.”
“…….”
“내일 만나자는 거야. 어제 나랑 말 몇 마디 해 보니 좋았나 봐. 그래서 네 이야기 다 해 준다고 내일 만나자는데 됐다고 그랬어.”
“…안 만나실 거예요?”
“응. 약속했잖아. 안 만난다고. 넌 약속 안 지켰지만, 난 지킬 거야.”
사실 권태정이 구대범을 만난다고 해서 크게 뭔가가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저 저를 안주 삼아 시간을 보낼 거고, 권태정은 구대범이 알고 있는 저의 시시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공유하게 되는 게 전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걸 권태정이 알든 모르든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냥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약속 못 지킨 거 죄송해요.”
“농담인 줄 알았다면서 쪽지는 왜 썼어?”
“…혹시, 정말 혹시 몰라서요….”
“그래도 내가 진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단 거네.”
“네….”
“그럼 기왕 거기까지 생각한 거 한 번 믿어 보지 그랬어.”
그러기에는 돈 천 원이 아쉬운 상황이라 갑자기 생긴 일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기다렸는데 정말 오지 않는다면, 만나자고 한 게 전부 다 농담이었다면 괜히 시간만 날리는 게 되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뭐 됐어. 과정이 어쨌든 같이 밥 먹으러 왔잖아.”
턱을 괸 채 싱긋 웃은 권태정이 노크 소리에 느릿하게 몸을 바로 해 의자에 기대고 앉았다. 서빙카를 밀고 들어온 직원이 공손히 인사한 뒤 전채를 권태정과 이겸의 앞으로 놓아 주었다.
“허브 페스토를 곁들인 그릴에 구운 관자 요리입니다.”
요리에 쓰인 재료를 설명하고 먹는 방법까지 알려 주는 직원의 말이 끝날 때까지 따분히 기다리던 권태정은 나름 열심히 듣고 있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설명을 듣는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을 보니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맺혔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설명을 마치고 인사하는 직원에게 마주 인사하던 이겸이 일일이 인사할 필요 없다던 권태정의 말을 떠올리고 눈치를 살폈다.
“그딴 걸로 눈치 볼 거 없어. 인사하면 안 된다는 거 아니니까.”
“…네.”
“먹어.”
아주 익숙한 모양새로 커틀러리를 들어 관자를 반으로 잘라 입에 넣는 권태정을 유심히 보던 이겸이 조심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권태정이 하는 것처럼 쥐고 관자를 잘랐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뭔지도 모르겠는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라 자꾸 긴장이 되어 커틀러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가니 한 번씩 포크와 나이프가 그릇에 닿으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이겸은 어쩔 줄을 모른 채 또 권태정을 살폈다.
“그냥 편하게 먹어도 되는데.”
커틀러리를 내려 둔 권태정이 그대로 손을 뻗어 이겸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포크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프겠다, 손. 힘 빼.”
손 위를 완전히 덮은 따뜻함에 움찔한 이겸이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제야 포크를 빼낸 권태정이 반으로 잘린 관자를 찍어 이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아.”
“…제가 먹을게요.”
“벌리라면 그냥 벌리자.”
명령 같은 말에 이겸은 잠시 머뭇대다가 작게 입을 벌렸다. 제가 입을 벌려 먹지 않으면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입에 맞아?”
명령과 같은 말을 할 때의 고집스러운 눈과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였다. 이겸은 녹을 것처럼 아주 부드러운 관자를 먹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어요.”
대답이 흡족했는지 남은 관자 반을 찍어 올린 권태정이 마저 이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겸은 한 번 더 군소리 없이 권태정이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짭짤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소스와 부드러운 관자가 맛있기는 했지만, 평소 제가 먹는 음식들과는 무척 다른 맛이라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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