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8화 (18/174)

#18

“가자. 밥 먹어야지. 약속했잖아.”

“…자, 잠깐 만요….”

“이겸아. 자꾸 빡치게 하면 나 말하면 안 되는 거 다 말해 버린다?”

“…그게 무슨….”

“네 비밀 그거 말해 버린다고.”

“…비밀이요?”

보들보들한 토끼의 손을 놓은 권태정이 침음하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확 쓸어 넘겼다. 화창한 날의 빛과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바람이 그런 권태정의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이겸이 들으면 놀랄 말들이 얼른 나가게 해 달라며 입술 안쪽을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던 권태정이 그 요란한 말들을 목 뒤로 삼켜 다시 가두며 이겸의 촉촉한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지금 까기엔 너무 아깝다.”

탈을 오래 쓰고 있어 아직도 살짝 상기된 이겸의 얼굴을 손끝으로 다시 건드리자 조금 더 빨갛게 변했다. 얼른 제 손을 피해 분홍색 털이 가득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이겸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상체를 숙여 이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궁금하면 앞으로는 약속 절대 이딴 식으로 깨지 마. 너한테 무슨 사정이 있든 나랑 한 약속보다 중요한 건 없는 거야.”

권태정은 조금 더 아래로 고개를 숙여 이겸의 목덜미에 코를 댔다. 매끈하고 날이 선 콧대가 닿고, 코끝이 느릿하게 목덜미를 타고 오르자 이겸이 어깨를 움츠렸다. 숨이 닿을 때마다 아랫배가 울렁였다.

“이겸아.”

다시 귓가로 올라와 입술을 댄 권태정이 오직 이겸만 들을 수 있게 작은 구멍 안으로 제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너한테 존나 좋은 냄새 나.”

“…….”

“넌 땀 냄새도 안 나네.”

귓속으로 파고든 권태정의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흥분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그대로 이겸의 안으로 떨어져 또다시 낯선 감각을 부추기고 일으켰다.

귓가로 따뜻한, 아니 뜨거운 것이 아주 살짝 닿았다가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겸은 저에게서 몸을 완전히 떼고 선 권태정을 온통 빨개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옷 어디서 갈아입어?”

“…….”

“여기서 벗어도 돼? 그럼 여기서 벗기고.”

“…가게 안에 창고에서요.”

“가자.”

건물 쪽으로 턱짓하는 권태정을 보던 이겸이 여전히 멍하니 서서 구경하고 있는 강지훈에게 다가갔다.

“…형, 저 가방이랑 옷 좀 찾아갈게요.”

“어? 어…. 7번 락커 비번 5987….”

“…고맙습니다. 저 먼저 갈게요. 말씀 좀 잘 부탁드려요.”

“어, 어어…. 그건 걱정하지 마. 너 앞으로 일 존나 들어올걸? 아니, 야, 그건 됐고…. 저 사람 그 사람 맞지? 그 뉴스….”

이겸에게 속닥거리던 강지훈이 어깨 너머로 눈이 마주친 권태정을 보며 얼른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안 가고 뭐 해? 예약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요.”

“같이 가.”

바닥에 떨어진 토끼 탈을 들어 분홍색 털 위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낸 이겸이 휴대폰 가게가 있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동물 옷을 입고 뒤뚱뒤뚱 걷는 이겸의 뒷모습을 본 권태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겸의 본모습과 안 어울리게 꽤 경망스러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야?”

“…네. 여기 계시면 얼른 갈아입고 나올게요.”

“같이 들어가.”

이겸의 너머로 손을 뻗은 권태정이 창고 문을 열어 그 안으로 이겸을 들여보냈다. 동물 옷을 입고 있어 평소보다 움직임이 둔해진 이겸은 권태정이 미는 대로 하릴없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 페인트 냄새.”

새로 칠을 한 지 얼마 안 됐는지 창고 안에서는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코를 살짝 막았다가 뗀 권태정이 한쪽 벽면에 줄지어 선 락커를 보다가 7번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저절로 들려서 알게 됐다.

“네 거 꺼내.”

“…….”

조심스럽게 권태정의 앞으로 간 이겸이 제 백팩을 꺼내 지퍼를 열어 안에 든 옷을 확인했다.

“그게 다야?”

“…네.”

락커 문을 닫은 권태정은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창고 안쪽으로 가서 가장 끝에 있는 락커를 여는 이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작은 쇼핑백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가방이 없어서 오늘은 저 종이봉투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벗겨 줄까?”

“…네?”

“지퍼 뒤에 있는데.”

“…제, 제가 하면 돼요….”

평소에는 서로서로 지퍼를 내려 줘서 어렵지 않게 벗을 수 있던 인형 옷을 혼자 벗으려니 쉽지가 않았다. 이겸은 저에게 다가오는 권태정을 보며 당황해 얼른 지퍼를 혼자 내리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해 준다고 하면 그냥 해 달라고 해. 가만히 있던가.”

“…….”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

등 뒤, 그것도 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가 꼭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낮은 목소리에 몸 여기저기가 오싹했다. 이겸은 조용한 창고 안으로 울리는 지퍼 내려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 락커를 짚으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목 뒤에서 시작된 지퍼가 아주 천천히… 등을 지나 허리까지 내려간 뒤에야 몸을 문지르듯 울리던 소리가 멈췄다.

“더 벗겨 줄까?”

“…아, 아니요. 이제 제가 할 수 있어요….”

“응, 편하게 갈아입어. 안 볼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리던 권태정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입을 막고 있어 숨에 젖은 손바닥을 뗀 이겸이 조금 몸을 돌려 저와 상당히 떨어져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권태정을 보다가 흘러내리는 동물 옷에서 다리를 빼냈다.

“…….”

쇼핑백 안에서 여분으로 챙겨온 티셔츠를 꺼낸 이겸이 저를 바라보지 않고 있는 권태정의 눈치를 보며 땀이 나 몸에 살짝 달라붙은 티셔츠를 조용히 벗었다. 그리고 빨랫비누 냄새가 폴폴 나는 하얀색 티셔츠에 얼른 머리를 넣고 팔을 꿰었다.

“다 입었어?”

“…네.”

원래 입고 있던 옅은 색 티셔츠를 잘 접어 쇼핑백에 넣은 이겸이 아예 쇼핑백 채로 반을 접어 백팩 안으로 넣었다. 그제야 가까이 다가온 권태정은 땀에 살짝 젖은 이겸의 앞머리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장난스럽고, 또…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내가 무서워?”

“…….”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만날 때마다 자꾸 떨어서.”

“…안 무서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사실은 조금, 아니, 가끔은 아주 많이 무서웠다. 제가 어디 있는지 너무나 쉽게 찾아 이렇게 찾아온 것도 무섭고 거침없이 협박하고, 제가 하는 일을 중단시킨 뒤 데리고 가는 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무서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두려움을 약점 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이겸은 권태정에게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운 마음을 꼭꼭 숨기고, 최대한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자.”

“…네.”

권태정은 저를 순순히 따라나서는 이겸을 보며 휴대폰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호객 행위를 하는 동물들 사이를 지나 차로 향했다.

다시 제대로 탈을 쓴 각각의 동물들이 저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권태정은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조수석 안으로 이겸을 태운 뒤 운전석으로 향했다.

“씨발, 밥 한번 먹기 힘드네.”

들으라는 듯 말한 권태정이 안전벨트를 당기며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이해한 이겸도 얼른 안전벨트를 당겨 고정했다.

“아침은 먹었어?”

“…아니요.”

“이런 데에서 일하면 뭐 점심은 줘?”

“…보통 편의점 가서 먹어요. 아니면 시켜 먹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뭘 먹는데.”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이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차선을 바꾸려 움직이자 지나던 차들이 주춤하는 게 보였다. 엄청난 고가의 차라는 걸 알고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권태정은 유유히 그 사이로 들어가 목적지로 향했다.

“아까 그 고양이 쓴 새끼가 어제 전화한 걔지?”

“네….”

“베타야?”

“…네.”

형질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이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조수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하긴 그런 일도 베타들이나 편하게 하지. 발정 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

“아, 억제제 먹을 일도 없으니까 세상 편하고.”

“…실장님은… 알파… 세요?”

“응.”

너무나 명확하고 간결한 대답에 이겸이 다리 위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너무나 좋은 향이 나고, 또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몸이 이상해지는 느낌이라 알파, 그것도 보통 알파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추측을 하는 것과 본인에게 확인을 받는 것은 무척 느낌이 달랐다.

“이겸이 넌….”

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놀란 이겸이 얼른 반사적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신호에 걸려 선 권태정이 이겸과 눈을 맞춘 채 상체를 기울여 핸들에 얼굴을 기댔다. 이겸은 그 웃음이 머문 입술 사이에서 나올 말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먹는 거 뭐 좋아해? 특별히 더 좋아하는 거 있어?”

오메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안도한 이겸이 마음을 짓누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조금 어색하게 화제를 돌린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게 훨씬 더 나았다.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니까 없나 봐요. 진짜 좋아하는 거면 바로 생각날 텐데.”

“그건 나랑 비슷하네. 나도 특별히 좋아하는 건 거의 없거든. 존나 싫어하는 것만 많아.”

“…….”

“나랑 한 약속 깨는 것도 싫어하고, 나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한 것도 싫어. 페인트 냄새도 싫고, 돈만 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그 고양이 쓰고 있던 새끼 같은 놈도 싫어해. 부리기 쉬워서 편하기는 한데 이상하게 싫더라.”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저 앞으로 보이는 호텔을 보며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차가 애매하게 많은 도로인데도 권태정의 앞과 뒤는 계속 비어 조금의 지체도 없이 편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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