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7화 (17/174)

#17

어깨를 으쓱하는 백 비서를 보고 웃은 권태정이 손을 내밀었다. 키를 달라는 말이라는 걸 바로 눈치챈 백 비서가 잠시 망설였다.

“같이 가.”

“회장님 만나기로 했다며.”

“아직 시간 있어. 데려다주고 거기서 가면 돼.”

“됐어. 넌 아빠 만나러 가. 적적한 회장님 이 약속까지 깨지면 우울해서 안 돼. 난 혼자 가도 돼. 아니, 혼자 가는 게 편해. 너 내가 뭐 하기만 하면 하지 말라고 말리고 잔소리할 거 아냐.”

“내가 잔소리할 것 같단 생각 드는 일은 안 하면 안 될까? 부탁이야, 태정아.”

“노력은 해 볼게. 줘, 얼른.”

어쩔 수 없이 키를 넘기는 백 비서에게 나름 괜찮다는 듯 씩 웃어 보인 권태정이 골목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차에 올랐다. 그리고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내비게이션에 한국대 사거리를 입력했다.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27분. 권태정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이겸이 알게 되기까지 남은 시간도 27분. 그 27분 뒤에 만날 이겸을 떠올린 권태정이 조금의 지체도 허용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다람동을 빠져나갔다. 그 성질머리를 닮아 바쁘게 돌아가는 바퀴를 따라 모래 먼지가 뽀얗게 흐트러졌다.

* * *

크게 울려 퍼지는 노래에 토끼 탈을 쓰고 있는데도 머릿속이 쿵쿵 요란하게 울렸다. 이겸은 분홍색 토끼가 된 채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휴대폰 세상에서 제일 싼 집!’이라는 문구가 적힌 풍선을 나누어 주었다.

원래 일을 하기로 했던 강지훈의 친구가 배탈로 나오지 못하게 되면서 이겸에게 돌아온 기회였다. 이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손을 흔들고, 같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며 열심히 일했다.

“야, 안 힘들어?”

“네, 괜찮아요. 할 만해요, 아직.”

요란한 음악을 틀어 놓고 그 앞에서 풍선이나 전단지를 나눠 주거나 춤을 추는 게 일이라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몇 시간 동안 무거운 탈을 쓰고 서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겸은 자꾸 목이 조금씩 돌아가는 토끼 탈을 정면으로 돌리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늘 매장에 들르기만 하셔도 액정 필름 무료로 갈아 드립니다! 액정 클리너도 드리니 매장에 들렀다 가세요!”

“오늘 액정 필름이 공짜!”

“안 사셔도 되니까 들어와서 시원한 것만 드시고 가세요! 드시는 동안 액정 필름 공짜로 갈아 드립니다!”

토끼와 곰, 고양이와 강아지가 제각각 회사에서 정해 준 멘트를 외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흘끗 휴대폰 매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시끄럽다는 듯 탈을 쓴 이겸과 아르바이트생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지날 뿐이었다.

“안 들어올 거면 말지, 왜 야리고 지랄이야.”

받은 전단지를 면전에서 바닥에 버리고 간 남자를 보며 욕을 내뱉은 강지훈이 사람이 없는 틈을 타 토끼 탈을 쓴 이겸을 툭 건드렸다.

“아, 맞다. 네 옷이랑 가방 내 락커에 있어. 이따 가져가.”

“…고마워요, 형. 어제 제가 너무 갑자기 가느라 가방이랑 옷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런데 어제 정말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좀 일이 있었어요….”

분명히 겪은 일이 있기는 한데 그걸 누군가에게 설명하기가 조금 그랬다. 이해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제가 다람동 철거촌에 산다는 것부터 그동안 쭉 용역 깡패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야기, 그러다가 방송에 나오고 요주의 인물이 된 것까지 전부 다 말을 해야만 했다.

“아, 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엄청 긴 얘기라….”

“그래, 그럼. 아, 근데 오늘따라 존나 힘들다. 나 어제 집에 가니까 두 시였어.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아침부터 씨발, 이딴 거나 쓰고…. 누나! 들어가서 시원한 거 드시고 액정 필름 무료로 갈고 가세요!”

불만스럽게 말하다가 조금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여자가 지나다 주춤대자 얼른 앞으로 나가 말하는 강지훈을 보고 웃은 이겸이 휴대폰 가게 앞으로 서는 까만 차를 바라보았다. 전단지를 들고 앞으로 튀어 나갔던 강지훈과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보였다.

“와, 차 존나 좋다. 저거 전 세계 스무 대인가 있는 한정판인데. 와, 우리나라에 저게 있네?”

“좋은 차예요?”

“씨! 말이라고 하냐, 그걸. 저거 10억은 할걸?”

“10억이요?”

10억이라는 말에 놀란 이겸이 다시 길에 선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비싼 차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그렇게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

운전석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내린 남자를 본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멀리서 봐도 신경질이 났다는 게 느껴지는 태도로 문을 확 닫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겸은 다가오는 남자, 권태정을 보며 처음으로 무거운 토끼 탈을 쓰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야.”

성큼성큼 다가와 강아지 탈을 쓴 아르바이트생 앞에 선 권태정이 그대로 손을 들어 강아지 탈을 뒤로 확 벗겼다. 벗겨서 버려 버렸다는 게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머리 뒤로 너무나 쉽게 넘어간 탈과 함께 드러난 얼굴을 본 권태정이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개새끼는 아니고.”

이겸은 탈 안에서 점점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권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아지 탈을 벗긴 권태정은 이제 곰돌이 탈을 쓴 남자에게 다가가 탈을 벗기고 있었다. 곰돌이 머리가 뒤로 넘어가며 바닥을 구르는 순간 이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것도 아니네.”

이제 남은 것은 강지훈과 저 둘뿐이었다. 이겸은 고양이 탈이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드러나는 강지훈의 얼굴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뭐야, 토끼였어?”

이제 권태정은 제 앞에 서 있었다. 거침없이 탈을 벗기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저를 바라보았다. 이겸은 어둑하고 조금 더운 토끼 탈 안에 숨은 채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이겸아. 여기서 뭐 해? 오늘 나랑 만나기로 했잖아.

“…….”

“종이 쪼가리 하나 남기면 뭐 아, 아르바이트 갔구나…. 이해하고 넘어갈 줄 알았어?”

“…….”

“착하게 굴면 꼭 이러더라. 고마운 줄도 모르고, 호의도 무시하고. 씨발, 사람 서운하게.”

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이 바깥으로 나오며 얼굴로 다가왔다. 권태정의 손이 탈에 닿는 순간 이겸은 꼭 혼이 날 것을 예상한 어린애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무겁고 답답하던 토끼 탈이 머리 뒤로 넘어가는 느낌과 함께 서늘한 공기가 땀으로 촉촉해진 뺨으로 달라붙었다. 답답함에서 벗어나 제 앞에 선 권태정과 눈을 맞춘 이겸은 우습게도 찰나의 해방감을 느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기 전에는 벗을 수 없는 토끼 탈이 멋대로 벗겨져 떨어진 것도, 날이 따뜻해지며 며칠 전보다 더 빨리 젖은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찰나지만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진짜 토끼였네. 씨발, 이것도 뭐 자기 같은 걸로 골라 쓰는 거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게 궁금해? 난 왜 내 말을 우습게 들었는지가 더 궁금한데.”

“…우습게 들은 적 없어요.”

“그럼 왜 약속 안 지켜?”

“……전 정말 농담으로 하신 말씀인 줄 알았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철거촌에 새로 온 용역 실장이 진심으로 저에게 놀아 달라 말하고, 또 같이 밥을 먹자고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럴 관계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거니까.

여태까지 용역 관리실장이 저에게 한 일들만 생각해도 그렇게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는 없었다. 쫓아내려는 사람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만 하는 사람. 그래서 마주하면 늘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게 이겸이 생각하는 저와 용역 실장의 관계였다.

물론 전에 있던 실장과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권태정이라는 실장은 분위기와 행동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밤에 잠도 자지 못하게 고통을 주지도 않고, 때리려고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오메가면 팔아 버린다느니 집을 허물 때 죽여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린다느니 하는 험한 말도 권태정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저를 보자마자 욕만 내뱉던 사람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가까워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바라는 게 너무나도 다르고, 또 위치도 다르니까. 눈앞의 실장도 결국은 저를 내쫓는 게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주민이 다 나가야 흔적도 없이 다람동을 허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내가 한 말 중에 농담 하나도 없는데.”

“…….”

“서운하네. 그걸 다 농담으로 들었다니. 밥 먹자고 한 것도 나름 한참 생각해서 말한 거거든. 나 낯 많이 가려서 아무하고나 밥 안 먹어.”

땀에 살짝 젖은 이겸을 내리깔아 보던 권태정이 저에게 닿는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와 곰, 고양이 탈을 주워 든 채 어이가 없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눈을 차례대로 맞춘 권태정은 거침없이 몸을 돌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권태정이 다가오는 것에 놀란 사람들이 뒤로 주춤대며 물러섰다. 권태정은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토끼는 나랑 가야 할 것 같은데 대타로 아무나 불러.”

“네?”

“이 돈으로 대타 부르라고. 못 해?”

“아, 아… 네! 할 수 있어요. 열 명도 불러요! 데려가셔도 돼요!”

“말이 좀 통하네. 쟤 일 안 끊기게 사장한테도 잘 말하고. 남은 건 너 가져. 입단속 잘하고.”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더 꺼낸 권태정이 고양이의 두툼한 손 위에 얹었다. 그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것에 놀라 멍해진 얼굴들을 무관심하게 훑은 권태정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를 멍하니 보는 이겸의 보들보들한 분홍색 손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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