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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 소년-16화 (16/174)

#16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권태정이 삐딱하게 서서 이겸의 얼굴 위로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이겸의 얼굴 위로 권태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권태정은 밤공기와 골목의 쾨쾨한 냄새 사이에 섞인 달착지근한 향에 느릿하게 또 혀를 입 안에서 굴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달착지근한 향에 혀끝을 대고 싶었다.

“들어가. 늦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응. 먼저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언제 협박했었냐는 듯 다시 나긋해진 권태정을 보던 이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대문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비상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열쇠가 든 가방이 호텔에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완전히 들어가기 전 다시 권태정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인 이겸이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가 조금 급히 문을 닫고 잠갔다. 급하게 문을 잠그는 소리에 권태정이 허리까지 구부려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권태정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묻으며 퍼져나갔다.

“아, 진짜 웃겨.”

이깟 문 따위는 지금도 제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너무나도 쉽게 열 수 있었다. 집 안에는 이미 저의 흔적이 가득한데 이겸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고작 이 문이 저를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권태정은 이겸이 선택한 얄팍한 보호막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 아직 그 보호막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돌리고 있을 이겸에게 말했다.

“나 진짜 간다?”

권태정의 예상대로 문을 닫고 바로 들어가지 못한 채 숨어 서서 골목으로 퍼지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이겸은 갑자기 저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제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싶었다.

“잘 자.”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이 말하는 잘 자라는 말은 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겸은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안도의 숨과 함께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인지 모르게 미열이 올라 더웠던 몸이 차가운 대문과 바닥에 닿자 천천히 원래의 제 온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겸은 이제야 완전히 말라 축축함이 사라진 와인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유니폼 셔츠를 앞으로 살짝 들어 그 냄새를 맡아 보았다.

“…….”

유니폼에서, 정확히는 유니폼에 묻은 와인 자국에서 권태정의 향과 비슷한 향이 났다. 아니, 권태정의 향은 이 와인 향보다 조금 깊고 더 향긋했다. 여기에 꽃잎을 으깨어 섞으면 그런 향이 날까? 이겸은 저도 모르게 어른의 냄새가 나는 권태정을 잔뜩 떠올렸다.

‘여기 무너질 때까지만 나랑 놀자. 싹 다 허물어질 때까지만.’

권태정이 말하는 석 달. 그 석 달이 지나면 제가 기댄 이 대문도, 앉아 있는 바닥도, 그리고 할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시는 저 집도 모두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시간 많아 보여도 생각해 보면 얼마 없어. 석 달? 뭔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 부지런히 놀아야 돼.’

뭔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라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럼 그 석 달이 지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

저는 할아버지와 지낼 새로운 곳을 석 달 안에 구할 수 있을까? 이겸은 석 달 뒤의 저를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내일의 저와 모레의 저도 모르는데 석 달 뒤에 저를 알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겸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놀아 달라고 말하던 권태정을 가득 떠올렸다. 팔자 좋은 소리를 한다는 생각으로 맺히기 시작한 권태정은 점점 부드럽게 이겸의 머릿속을 녹이며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겸은 두 무릎을 세워 앉은 채 그 위로 뺨을 기대었다.

‘내가 이 더러운 데를 매일 왜 오는 줄 알아? 너 보러 오는 거야.’

저를 보고 웃는 사람을 보는 게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잘 자라고 말하는 것도, 데려다주는 것도 정말 처음 듣고, 접하는 것이어서 날카로운 경계심과는 달리 자꾸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게 되어 곤란했다.

‘잘 자.’

세상에 저런 목소리로 잘 자라고 말하는 깡패가 또 있을까? 고개를 움직여 이제는 무릎에 입술을 묻은 채 권태정의 밤 인사를 떠올리던 이겸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깡패를, 결국은 내가 여기서 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원하는 게 있어 친절한 척하는 사람을 왜 자꾸 생각해.

‘잘 자.’

그래도….

“…….”

그래도 잘 자라는 말 정도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건 그냥 누구한테든 할 수 있는 말이니까. 그냥 인사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니까.

이겸은 결국, 다시 권태정을 떠올리며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늘 나던 쾨쾨한 냄새가 더는 나지 않는 것에 놀란 이겸이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옆으로 가만히 앉아 어둠 속에서 보기에도 두툼해 보이는 이부자리를 손으로 가만히 눌러 보았다.

“…….”

권태정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방에 남은 그의 흔적 때문에 이겸은 한참이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생각…. 권태정은 이겸이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이겸의 귓가와 머릿속, 그리고 마음 어디인가에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 * *

유난히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다. 평소보다 운동을 한 시간이나 더 했는데도 조금도 힘들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나름 바른 생활을 하며 살아 그런지 날마다 컨디션이 더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산뜻한 기분으로 새빨간 컨테이너를 나섰다.

“오늘 기분 좋네?”

“컨디션 최고.”

“좋다니 다행이다. 점심은 연이겸 씨랑 먹기로 했다고?”

“응. 그런데 뭘 좋아할지 모르겠네. 비싸면 대충 다 좋아하려나. 스무 살짜리랑 뭘 해 본 적이 없어서.”

권태정은 제가 스물이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벌써 12년 전이라 그런지 그리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 갔는데 기부금을 주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고 4년 내내 과탑을 놓친 적이 없었던 정도만 어렴풋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마레 예약해 뒀는데 괜찮은가?”

“네가 다니는 레스토랑 중에서는 제일 캐주얼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디저트도 맛있잖아.”

“너도 거기 좋아하지. 같이 가.”

“어쩌지, 난 잠깐 회장님 뵙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아빠는 왜.”

“너 걱정되니 그러시겠지.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 주셨어. 너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웃는 백 비서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린 권태정이 이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곧 안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실장님, 오셨어요?”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이겸이 아니라 간병인이었다. 조금 실망한 권태정은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안으로 대문을 넘었다.

“연이겸은요?”

“이겸 학생은 아침 일찍 아르바이트 있다고 나갔는데요. 아, 실장님 오시면 이거 전해 달라고 했어요.”

권태정은 간병인이 스웨터에서 몇 번 접힌 종이를 꺼내 주는 것을 받아 무심한 얼굴로 그것을 펴 보았다. 안에는 동글동글한 글씨가 몇 줄 적혀 있었다.

[아르바이트 대타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어요.

농담으로 하신 말씀 같기도 한데…. 정말 오실지도 몰라서 남겨 둬요.

약속 못 지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연이겸 드림-]

이겸이 남긴 쪽지 내용을 가만히 전부 눈에 담은 권태정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옆에서 내용을 같이 확인한 백 비서가 한숨을 쉬며 권태정의 눈치를 봤다. 레스토랑 예약까지 한 권태정의 말을 농담 정도로 여겼다는 것부터 집에 없다는 것까지 모든 것이 문제였다.

“백 비서님.”

“…네, 실장님.”

“연이겸 어디서 일하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어요?”

“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십 분 안 넘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대문 바깥으로 나가는 백 비서를 따라 걸음을 옮긴 권태정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어린 게 불쌍해서, 또 좀 예쁘고 재밌어서 잘해 줬더니 아주 저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뱉으며 이겸이 남긴 쪽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농담으로 하신 말씀 같기도 한데?”

그러니까 연이겸은 제가 어제 한 말 자체를 전부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놀아 달라는 말도, 또 같이 점심을 먹자는 말도. 도대체 어디가 농담 같았을까.

웃으며 말해서? 주제도 수준도 안 맞는 걸 무려 조수석에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줘서? 그것도 아니면 오메가인 걸 알고도 입을 다물어 줘서?

반쯤 탄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이긴 권태정이 사장이라는 사람과 통화하는 백 비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 통화를 마친 백 비서가 몸을 돌려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한국대 사거리 신규 오픈 매장에서 인형 이벤트가 있다는데 거기 대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디 전화해서 알아낸 거야?”

“연이겸 씨한테 일 주는 이벤트 회사요.”

“이벤트 회사는 또 뭐야. 뭐 그딴 회사도 있어?”

“음, 말 그대로 소소한 이벤트 하는 회사인데요. 예를 들면 새로 오픈한 가게 앞에서 인형 탈 쓰고 전단지 나눠 주거나, 풍선을 주거나 뭐 그런 것도 하고, 하객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어제처럼 연회장에 투입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거긴 어떻게 알았어?”

“어제 호텔 측 매니저랑 얘기하는데 제가 배상하겠다고 하니까 소개해 준 이벤트 회사 측이랑 얘기를 해 봐야 한다고 해서 그때 번호 받아 뒀습니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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