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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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정이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에서 다급한 얼굴을 한 주차요원들이 달려왔다. 최대한 공손하게 선 주차요원들을 향해 권태정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불행히도 남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해 허둥댔다.
“키 좀 주시겠어요?”
기어이 짜증이 묻은 목소리를 낸 뒤에야 손에 차 키가 놓였다. 고개를 조아리고 선 주차요원들 사이로 걸음을 옮긴 권태정이 버튼을 누르자 정면에 선 까만 차에서 불이 반짝였다.
“타.”
조수석을 열고 삐딱하게 고갯짓을 하는 권태정은 영락없이 깡패 같았다. 주차요원들도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겁에 질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아주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깡패도 이렇게 유명해질 수가 있구나…. 이겸은 운전석으로 타는 권태정을 보며 몰래 혼자 생각했다.
“안전벨트.”
“…네….”
안전벨트를 길게 당긴 이겸은 축축하게 젖은 유니폼을 가로지르는 벨트를 옷에 닿지 않게 잡은 채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옷이 젖어서…. 여기 묻을 것 같아요.”
“벗을래?”
“…네?”
“옷이 젖었으면 벗어야지.”
농담 같은데 진담처럼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이겸은 안전벨트만 손에 쥔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이겸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대신 벨트를 쭉 당겨 버클을 채워 주었다.
“집으로 가면 되지?”
“…네….”
핸들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차가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이겸은 창밖에 일렬로 선 채 허리까지 구부려 인사하는 직원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어디인지 모를 길에 들어설 때까지 권태정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겸은 괜히 어색한 기분에 유니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켜 화면을 바라보았다. 딱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구대범이랑 자주 만나?”
정적을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이겸은 고개를 들어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달가운 질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한 것보다는 이런 질문이라도 도는 게 더 나은 것 같았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이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걔가 너 만나러 오는 거야?”
“…네. 일하다 보면 월급 이체하는 시간이 조금 늦어질 때가 있고, 또 바빠서 전화 못 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일하는 데나 집으로… 오세요. 가끔은 그냥 지나다가 들렀다고 오시기도 하고….”
“만나서 뭐 해?”
질문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사채업자가 채무자를 만나 뭘 하겠는가. 돈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고, 갚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는 그 당연하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힘이 쭉 빠지는 말을 자꾸만 해서 주입한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사실대로 하면 되는데.”
“…빚 얼마 남았는지 듣고, 도망치면 죽는다는 말도 듣고…. 팔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도 들어요.”
“아까 나한테도 그런 말하더라. 얼굴만 보면 딱 팔고 싶은데 베타에, 방송까지 타서 못하는 게 한이라던데. 그 새끼도 그거 진짜 미친 새끼야. 천박하게 사람을 파느니 마느니.”
“…친하신 줄 알았는데 오늘 처음 보신 거라고 해서 놀랐어요.”
“야, 이겸아. 내가 씨발, 수준이 있지. 너만 아니었어도 그딴 새끼 볼 일 없어. 씨발, 어디 감히 그런 밑바닥 새끼가 날 만나.”
깡패들 안에서도 수준과 서열을 엄청 따지는 모양이었다. 이겸은 작게 한숨 지으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주 작은 창에 뜨는 강지훈이라는 이름을 본 이겸이 얼른 몸을 반쯤 돌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형…. 네, 저 사정이 있어서 먼저 나왔어요. 아…. 맞다. 가방이랑 옷…. 네, 좀 챙겨 주세요. 네, 죄송해요.”
남자에게 끌려 나오느라 락커에 가방과 옷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던 이겸은 강지훈에게 가방과 옷을 챙겨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누구? 애인?”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형이에요.”
“아, 형이구나. 난 또 사귀는 줄 알았지. 나한테는 안 그런데 걔한테는 엄청 사근사근하게 말해서.”
신호에 걸려서 선 권태정이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에 이겸은 괜히 몸을 가로질러 누르는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눈을 맞추니 아까 기둥 뒤에서 몸을 밀착한 채 있었던 게 생각나 귓가가 뜨거워졌다.
“그 형이랑 안 지는 얼마나 됐어?”
“…일 년 정도 됐어요.”
“그럼 일 년 뒤에는 나한테도 그렇게 말해 줄 거야?”
“…….”
“예쁘게.”
권태정은 알 수 없는 말을 너무 잘했다. 대답을 찾을 수 없고,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잘해서 자꾸만 바보처럼 입만 벙긋하게 됐다.
“또 대답 안 하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묻는 거에만 답하면 되는데. 예쁘게 말할 거다, 안 할 거다.”
“…예, 예쁘게 말한 적 없어요. 그냥 그 형은… 잘 아는 사이라서 조금 편하게 말하는 거고….”
이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운전을 시작한 권태정을 몰래 바라보았다.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실장님은… 아직 잘… 모르는 분이기도 하고, 어려운 분이기도 해서….”
“내가 왜 어려워? 나 진짜 쉬운데.”
또 저를 보고 웃는 남자를 보며 이겸은 또 먼저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확실히 예전에 있던 실장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사람 같기는 했다.
폭력을 쓰지도 않고, 할아버지에게 잘해 주기도 하고, 철거촌을 비우고 당장 꺼지라고 욕을 하지도 않아 솔직히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쉽다는 말은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볼 때마다 속을 알 수 없고, 행동도 말도 전부 다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매일 보다 보면 친해질 거야. 매일 같이 노는데 안 친해져도 이상하지.”
같은 곳에 있으니 오다가다 자주 보게 될 거라는 뉘앙스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매일 일부러 만나고, 같이 놀 것처럼 말하는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괜히 휴대폰 화면을 손끝으로 괜히 문질렀다.
아까부터 권태정이 하는 말은 뭐가 농담이고 뭐가 진담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전부 농담 같은데 사실은 전부 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내일은 몇 시에 볼까.”
“…내일이요?”
“놀아 달라고 했잖아. 난 운동하고 나가면 열 시 반쯤 될 것 같은데.”
“…내일은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요….”
“그 돈 내가 준다니까.”
차가 어둑한 철거촌으로 들어섰다. 가로등이 있어 비교적 밝은 바깥과 달리 다람동의 밤은 유난히 더 캄캄했다. 몇 개 없는 불빛이 약한 가로등을 보며 안으로 들어간 차는 결국, 좁아터진 골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입구에 서야만 했다. 이겸은 안전벨트를 조심스럽게 풀고 운전석으로 몸을 반쯤 틀었다.
“…오늘 도와주시고, 태워다도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서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
“집 앞까지 가자.”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할 말을 아직 다 못해서 그래.”
운전석에서 내린 권태정이 차 앞을 지나 조수석으로 오는 것을 고개까지 돌려가며 멍하니 보던 이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조수석 밖에는 벌써 도착한 권태정이 열리는 문을 잡고 있었다. 크지 않은 움직임으로 차에서 내린 이겸은 말쑥한 남자의 옆에 선 채 유니폼에 크게 물든 와인 자국을 괜히 손으로 덮었다.
“이겸아.”
“…네?”
“내가 이 더러운 데를 매일 왜 오는 줄 알아?”
약한 불빛이지만, 분명히 빛이 드리우는 골목 안으로 먼저 걸음을 옮긴 권태정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찌그러진 캔을 발로 아무렇게나 찼다. 그대로 날아간 캔이 아무 곳에나 부딪히며 나는 요란한 소리가 잠시 골목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너 보러 오는 거야. 장난 같지. 저 새끼 또 시작이네 싶지?”
“…….”
“나도 농담이면 좋겠고, 장난이면 좋겠는데 미안하게도 둘 다 아니거든.”
“…….”
“남은 석 달 정말 나랑 놀면서 보낼지 아니면 어디 갇혀서 보낼지는 너 하기에 달렸어.”
“…갇혀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집까지는 세 걸음 정도 남아 있지만, 그 세 걸음 안에 무엇도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겸은 제집 앞에 멈춰 서는 권태정을 올려다보며 달싹이던 입술을 가만히 닫았다. 늘 비틀대던 가로등 불빛이 정확하게 권태정을 비추고 있었다. 꼭 권태정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 왔네.”
“…저를 가두신다는 거예요?”
“나 피곤해. 오늘은 그만 말할래. 아직 석 달이나 남았는데 천천히 얘기하자. 나 만날 때마다 내가 너 궁금한 거 하나씩 얘기해 줄게. 어때?”
“…….”
“시간 많아 보여도 생각해 보면 얼마 없어. 석 달? 뭔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 부지런히 놀아야 돼.”
장난기가 조금도 묻지 않은 눈과 마주한 이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으로 가까이 다가온 권태정이 연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겸의 머리칼을 다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기 무너질 때까지만 나랑 놀자. 싹 다 허물어질 때까지만.”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하는 협박은 처음이라 이겸은 잠시 이게 협박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권태정의 얼굴과 입가에 머문 웃음,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와 시선, 가로등 불빛까지 모든 것이 겁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일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뭐 좋아해?”
“…….”
“잘 생각해 놔. 열한 시쯤 올게. 여기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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