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화 (13/174)

#13

구대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구대범과 잘 아는 사람일 것이었다. 아니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그중에는 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금 저를 보고 구대범에게 제가 여기 있다고 말이라도 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그 끔찍한 얼굴과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이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화장실이 있는 복도를 빠져나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 왜 이제 와.”

“죄송해요….”

강지훈을 찾아 옆으로 선 이겸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걱정과는 달리 구대범이나 그동안 제가 봐 온 사채업자들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날 때까지 잘 피해 다니면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파고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이겸의 약한 마음을 뒤흔들었다.

대국물산 회장의 기념사로 시작한 행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대국물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기업이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 인사가 흐르자 모두의 박수가 터졌다.

그리고 이어 회장의 아들이 단상에 올라 감사 인사를 전하고, 미리 준비된 축하 영상이 나가는 것으로 1부가 마무리되었다.

본격적으로 2부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홀 안으로 가득 찼다. 이겸은 와인 병을 들고 제가 맡은 구역을 반복해 다니며 와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잔을 채워 주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구대범이나 저를 아는 사람을 마주할까 봐 내내 긴장이 되어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가 점점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사람들은 테이블을 벗어나 자유롭게 홀을 왔다 갔다 하며 인사를 나누고,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터링이 따로 준비가 된 쪽으로 간 이겸은 아무렇게나 놓인 빈 잔을 수거하거나 빈 그릇 같은 것들을 치우며 제 몫의 일을 해 나갔다.

“발코니 쪽도 돌아 주세요. 발코니에 나가 드시는 분들도 계셔서 식기 수거 부탁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지나가던 매니저가 하는 말에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이겸은 빈 트레이를 들고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밤바람이 좋은 3월이라 그런지 발코니에도 몇몇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잔을 가져가라고 내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빈 잔을 받아 다시 홀로 들어온 이겸은 그다음 발코니로 나가기 위해 살짝 열린 문 안을 살폈다. 혹시라도 구대범이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발코니에서 와인 잔을 든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구대범을 본 순간 이겸은 너무 놀라 빈 잔이 놓인 트레이를 든 채 몸을 확 돌렸다. 그 반동으로 트레이 위에 놓인 와인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발코니 바로 앞이라 카펫도 깔려 있지 않아 유난히 소리가 더 컸다.

고상하고 우아한 목소리들이 뒤섞이던 주위가 조용해지며 시선이 몰려들었다. 이겸은 저에게 닿는 많은 시선에 어쩔 줄을 모른 채 고개를 숙였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발코니 안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망가야 하는데,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구대범을 피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완전히 가까워진 발소리에 이겸은 바보처럼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꼭 감았다. 구대범에게 들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제 옆으로 온기가 스민 순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얼굴로 닿아 왔다.

“아, 역시 맞네. 아까 화장실에서 나 보고 도망갔지.”

구대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겸은 꼭 감고 있던 눈을 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상체를 구부린 채 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

권태정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겸은 심장을 따라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쩌지 못한 채 권태정을 정신없이 눈에 담았다.

“시끄러운 게 딱 도떼기시장 수준이라 나와 봤더니 반가운 얼굴을 다 보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버틴 보람이 있네.”

“…….”

“이겸아. 넌 나 안 반가워?”

남자는 몇 번 마주쳤을 때와 똑같았다. 뻔뻔하고, 또 나긋하고… 위협적이면서도 다정한 척을 했다. 위협적인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는데도 무척 위험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신기했다.

“아까 너 맞지? 화장실에서 나간 거.”

“…네.”

“어떡해, 이겸아. 씨발, 나 이제 네 뒷모습만 봐도 널 알아본다?”

부드럽고, 친밀한 것 같은 말투 사이에 섞인 욕이 자연스러웠다. 또 웃음을 머금은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눈빛은 날카롭고,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이건 왜 깼어? 나 보고 놀라서? 아니면 구대범?”

이겸은 권태정의 얼굴을 보다가 구대범의 이름에 불안한 눈으로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이 빨리 다시 들어가지 않으면 무슨 일인지 궁금해 구대범이 여기로 나올 것이었다.

“아, 진짜 구대범 때문이야?”

눈치가 빠른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둘 다 똑같은 깡패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도와줄까?”

“…네….”

이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권태정은 대답을 듣자마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숙이고 있던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이겸의 손을 잡아 발코니 문이 달린 커다란 기둥 뒤로 숨기고 그 위를 제 몸으로 덮었다.

“…….”

“…….”

벽과 남자의 몸 사이에 완전히 갇힌 이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겨우 눈을 깜빡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권태정의 어깨와 빳빳한 셔츠 깃, 넥타이의 매듭 같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

제 몸을 숨기듯 누르는 힘과 품에서 나는 아주 좋은 향, 그리고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사부작대는 소리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겸은 겨우 손을 들어 권태정의 몸을 살짝 밀어냈다. 하지만 권태정은 조금도, 정말 아주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구대범 나왔는데 보고 싶으면 더 밀고.”

권태정이 만든 어둑한 공간 안으로 시선과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낸 권태정이 화면에 뜬 ‘구대범’이라는 이름을 보여 주었다.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홀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니 전화를 거는 것도 당연했다.

“떨어질까?”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다시 포켓으로 넣은 권태정이 몸을 뒤로 빼는 것에 놀란 이겸이 고개를 저으며 얼른 그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간절함에 웃은 권태정이 다시 이겸과 몸을 맞대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겸은 어쩔 수 없이 권태정의 어깨에 입술을 누르며 슈트 자락을 더 꼬옥 쥐었다. 이겸의 몸으로 아주 약한 열이 번졌다.

“왜 이렇게 떨어. 구대범이 그렇게 무서워?”

“…….”

구대범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리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권태정의 어깨에 입술을 누른 채 고개를 저은 이겸이 다시 울리는 진동과 함께 살짝 몸을 떼는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댄 권태정이 이겸과 눈을 맞추며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아, 죄송해요. 갑자기 급한 연락을 받아서, 네. 네, 그럼요.”

몸을 떼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차하면 몸이 다시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이겸은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전화를 받는 권태정을 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얼굴 위로 닿는 권태정의 시선이 이제야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또 이상하기도 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 네. 다음에 약속 잡고 제대로 봐요, 네. 형.”

통화를 간단히 마친 권태정이 검지로 이겸의 턱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이겸은 강제로 권태정과 눈을 맞추며 겨우 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몇 번 봤을 때와 오늘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형이랑 네 얘기하고 있었는데.”

“…제 얘기요?”

“응. 너한테 물으면 말 안 해 줄 것 같은 거 묻고 있었어.”

“…그게 뭔데요?”

“몰라. 제대로 듣지도 못했어. 네가 시끄럽게 굴어서.”

묘한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물어도 대답 안 해 줄 것 같은 말이라면 분명 저에 대한 사사로운 질문들이었을 것이었다. 이겸은 권태정이 구대범에게 저에 대해 물은 것도, 구대범이 저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도 전부 싫었다.

“…친하세요?”

“누구. 나랑 구대범?”

“…네.”

“오늘 처음 봤는데.”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기분인 걸까. 이겸은 기둥 뒤에 여전히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작은 심란함을 내쉬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살짝만 몰래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조금 부끄러웠다. 아까부터 내내 남자의 시선이 제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몰래 볼 수가 없었다.

“…또 만나실 거예요?”

“네 얘기 제대로 들으려면 만나기는 해야지.”

“…….”

“왜, 만나지 말까?”

제 기분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구는 권태정을 바라본 이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는 곳에서 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싫고, 구대범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권태정이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싫었다.

“알았어. 안 만날게.”

“…정말요?”

“응. 만나지 말라며.”

너무나 쉽게 말하는 권태정을 바라보던 이겸이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권태정은 너무나 솔직하고, 또 거침이 없어서 그 말과 행동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이제 넌 나한테 뭐 해 줄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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