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
한참을 일하다가 제가 속한 조의 쉬는 시간이 왔을 때 이겸은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30분 안에 먹어야 한다는 말에 다들 서둘러 담아 온 밥과 국, 반찬을 입에 욱여넣었다.
이겸도 식탁 끝자리에 앉아 밥을 국에 말아 얼른 몇 숟가락을 넘겼다.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어 그런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국만 넘겨도 살 것 같았다.
서둘러 밥을 먹고 양치까지 한 이겸은 다시 홀로 돌아와 마무리 작업을 도왔다. 30분 뒤부터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할 거라는 매니저의 말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연회장을 점검했다.
“이제 손님들이 입장하실 겁니다. 자리 안내 맡으신 분들 실수 없이 안내 부탁드립니다. 문제가 있을 땐 당황하지 마시고, 각 입구마다, 구역마다 있을 매니저 호출해 주시면 됩니다. 손님과의 사적인 대화는 절대 금지이며, 촬영 및 녹취, 또는 개인 연락하시는 거 발각될 시에는 책임 엄하게 묻겠습니다. 자, 각 구역으로 이동해 주세요.”
단순 서빙을 맡은 이겸은 얼른 홀 구석으로 가서 저에게 다가오는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강지훈을 보는 순간 조금 안도가 되었다.
“형, 어디 있었어요. 찾았는데….”
“나 존나 구석에서 일하다가 밥도 존나 늦게 먹고 이제 왔어. 야, 보니까 자리 안내나 저기 테이블에서 물 따르고 그런 애들은 미리 뽑았나 봐. 좀 전에 자리 안내하는 애랑 밥 먹었는데 며칠 전부터 어디가 누구 자리인지 동선이랑 이름 존나 외웠다고 하더라. 그거 안 하는 게 어디야. 난 외우는 게 제일 싫어. 일은 존나 단순노동이 최고야. 그치?”
세상에서 암기하는 게 제일 싫다고 계속 말하는 강지훈을 보며 웃은 이겸이 곧 하나둘 입구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보며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창립기념회를 축하하는 절차가 다 끝난 다음, 제대로 된 식사가 시작될 때부터 와인을 들고 다니면서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따라 주는 것이 저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조용히 연회장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형, 저 집에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빨리 와.”
“네….”
행사가 시작하기까지 오 분 정도 남았을 때 이겸이 조심스럽게 연회장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 이겸은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열 번 정도 울렸을 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저 이겸이에요.”
-응, 이겸아. 할아비야.
“네…. 저녁 드셨어요?”
-응, 어제 그 청년이 보내 준 사람이 와서 밥 같이 먹었어. 간병 일을 오래 했다는데 말도 재밌게 잘하고, 어찌나 친절한지.
“…어제 그….”
머릿속으로 가득 권태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겸은 괜히 휴대폰을 잡고 발끝을 세워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실장이라는 남자가 집에 간병인까지 보낸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함께 계시고, 또 같이 식사를 하셨다니 마음이 놓이는 한편, 겨우 얼굴만 아는 사람에게 자꾸 뭘 받게 되는 상황이 불편해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우리 강아지는 저녁 먹었어?
“…네. 저도 저녁 잘 먹었어요. 그… 간병해 주신다는 분은 지금도 계신 거예요?”
-응, 열 시쯤 간다네.
“네…. 저 오늘 일이 늦게 끝나서 새벽에나 들어갈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시라고 전화했어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평소보다 더 밝아진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실장이라는 사람을 또 보게 된다면 그땐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 이겸은 저를 보자마자 흥분해 어딘가를 가리키는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야, 좀 전에 이채린 왔어.”
“이채린이 누군데요?”
“야, 넌 진짜 존나 심각하다. 아이돌이잖아, 아이돌. 저기 안 보여? 얼굴 존나 작고, 개예뻐.”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요….”
“야, 요즘은 다 폰으로…. 아, 너 효도폰이지. 됐다. 그래, 네가 이채린 알아서 뭐 하겠냐. 알바 하나 더 뛰는 게 낫지.”
강지훈의 타박에 그냥 웃음 지은 이겸이 아침에 나올 때 본 벽에 걸려 있던 텔레비전을 떠올렸다. 아, 이제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건가….
강지훈에게 정정해야 하나 싶어 바라보던 이겸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텔레비전이 생겼다고 해도 제가 그걸 볼 시간도 없고, 또 본다고 해도 강지훈이 꿰고 있는 아이돌이나 연예인을 알게 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헐, 정은원이다. 저기, 저기. 정은원은 알지?”
“…….”
“와…. 넌 뭔 재미로 사냐, 진짜. 와씨! 백지유다!”
연예인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강지훈에게서 시선을 뗀 이겸은 가만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눈에 담았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들 좋은 옷을 입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겸은 그렇게 웃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일상에서는 웃는 얼굴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늘 힘든 얼굴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한숨을 푹푹 쉬는 철거촌 사람들, 화를 내는 용역 깡패들과 사채업자.
“…….”
머릿속으로 현실이 확 파고드는 찰나 저에게 손을 내밀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벽돌 더미 위에 앉아 웃던 얼굴도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자는 자꾸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또 아예 집 안에 있기도 하고…. 저를 보고 웃기도 하고, 저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리 와.’
조용한 골목으로 울리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을 뻔했다. 아니, 사실은 잡아 보고 싶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 제 앞에 다가온 손을 잡고 정말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야, 뭘 그렇게 멍때려.”
“네? 아…. 아니에요.”
툭 치는 강지훈을 보며 정신을 차린 이겸이 어쩐지 뜨거워진 것 같은 뺨을 괜히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이래서 이겸은 생각이 고일 수 있는 시간이 싫었다.
여유가 없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려 완전히 실장이라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떨친 이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제가 서 있는 쪽 문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
구대범이었다. 이겸은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구대범이 여기에 있는 걸까? 혹시 제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이겸은 다시 한번 제가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
잘못 본 것이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불행히도 문에 서 있는 남자는 구대범이 맞았다. 매번 심심할 때마다 저를 찾아와서 온갖 무서운 말을 쏟아붓고, 마음에 품은 작은 희망마저 엉망으로 만드는 그 얼굴을 제가 어떻게 헷갈릴 수 있을까.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카페로 찾아와 저를 보고 이죽대고, 귓가를 후려치던 그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흔들렸다. 이겸은 하얗게 질린 채 강지훈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저기 형….”
“어? 야, 너 갑자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엉, 빨리 갔다 와. 너 자꾸 자리 비우면 오늘 일당 까인다?”
겨우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고개를 숙인 채 구대범 옆을 지나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다행히 구대범은 저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뱉어 낸 이겸은 몰아치는 두려움에 몸을 숙여 떨리는 두 무릎을 쥐었다. 이런 곳에서 구대범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
잠시라도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는 구대범이 문만 열고 나오면 바로 마주칠 수 있는 곳이라 위험했다. 저를 보면 또 시비를 걸 거고, 그러면 오늘 일을 완전히 그르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대범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힘이 빠진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연회장 벽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긴 이겸은 복도 끝에 있는 조용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세면대를 짚고 섰다. 구대범을 보고 놀란 심장이 아직도 과할 만큼 빠르게 뛰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괜찮아…. 마주칠 일 없어, 괜찮아.”
그 말을 해 줄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주 작게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해도 큰 효과가 없다는 건 오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헤집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홀이 엄청 크니까 잘 보고 피해 다니면 돼. 맞아, 그러면 돼. 조심하면 돼.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참이나 두 팔로 세면대를 짚은 채 버티던 이겸은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는 호흡에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까처럼 숨이 엉망으로 튀어나오지도 않고, 또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다가오는 두 사람의 다리를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로 낯설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냥 오지 말걸. 뭔가 쪽팔린데. 씨발, 내가 왜 여기 와서 행사 수준을 높여 줘야 하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구대범이라도 만나고 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던 이겸은 다른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구대범이라는 이름에 놀라 그대로 굳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