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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 소년-11화 (11/174)

#11

권태정은 간병 경력이 많은 친절하고 눈치 빠른 간병인을 할아버지 곁에 붙였다. 다른 곳에서 받는 돈의 두 배를 지급하며 혹시라도 제가 없을 때 이겸이 방송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난다거나 통화를 하는 걸 들으면 저에게 바로 전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또 간병인에 이어 청소해 주는 사람들을 불러 낡은 이겸의 집을 청소하게 했다. 3개월 뒤에 무너질 곳을 돈까지 들여 청소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쾨쾨한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권태정은 생각보다 비위가 약했다.

“아, 이제야 좀 숨이 쉬어지네. 어제 씨발, 여기 집 냄새가 옷에 다 배서 옷 다 버렸잖아.”

오래된 집에서 나는 곰팡내와 세월이 찌든 냄새를 굳이 돈까지 써서 없앤 권태정은 이제야 좀 만족스럽다는 듯 방 안을 바라보았다. 제가 건 거지만, 벽에 걸린 벽걸이 텔레비전이 안 어울려 헛웃음이 다 터졌다.

“그럼 어르신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주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맡은 임무를 잘 해내겠다는 듯 의지를 다지는 간병인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권태정이 포켓 안에서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구대진 이 새끼는 왜 자꾸 전화질이야.”

“창립기념회 행사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창립기념회?”

“지난주에도 얘기하고, 어제도 얘기했잖아. 오늘 대국물산 창립기념회 행사라고.”

“그랬나? 들은 기억이 없지, 왜. 존나 쓸데없는 정보라 듣자마자 지웠나 봐.”

끊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본 권태정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야, 뭐.”

-전화 매너 봐라.

“씨발, 안녕하세요. 인사라도 할까?”

-됐다, 됐어. 오늘 올 거지?

“안 갈 건데.”

-아, 왜. 그러지 말고 와.

“자숙 중이라서.”

-지랄, 자숙은 무슨. 그리고 자숙이랑 창립기념회랑 뭔 상관이야?

은근히 긁는 구대진의 말에 전화 받은 것을 후회한 권태정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라이터를 찾아 포켓을 더듬었다.

-그러지 말고 와. 술 좋은 거 있어. 빨리 해치우고 한잔하자.

“자숙 중에 씨발, 무슨 술을 마셔. 나 요즘 새로 태어났거든. 일밖에 안 해.”

-아, 좀! 아, 맞다. 너 대범이 형 얘기했었지? 오늘 형도 와. 형 만나러 와, 그럼. 일단 와.

구대범이라는 말에는 좀 구미가 당겼다. 수준 떨어지게 굳이 사채업자와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겸과 관계가 있으니 한 번쯤 만나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다.

보는 눈도 있는데 따로 굳이 자리를 만들어 사채업자와 만나는 것보다 저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척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은 모양새일 것 같기도 하고.

“사채 확실히 와?”

-당연하지. 그 형은 오지 말래도 올 사람이야. 오늘 정재계 사람들 다 오는데 형이 안 올 것 같아? 돈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는 인간이?

“몇 신데.”

-일곱 시! 야, 태정아. 내 면 좀 세워 줘라. 그래도 창립기념회 행사 여는데 너는 와 줘야지. 너 안 오면 나 아버지한테 죽는다고. 너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네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주제 파악을 못 해서. 끊어.”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도 구대진은 꼭 오는 거라며 소리를 쳤다. 목소리를 들어 기분을 잡쳤다는 듯 혀를 찬 권태정이 결국,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구겨 바닥으로 대충 버리고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구대범을 좀 만나고 싶긴 한데. 구대진 생각하면 안 가고 싶어. 그 새끼 그냥 지 아빠한테 확 뒈졌으면 좋겠네.”

“구대범 씨 만나고 싶으면 오늘 잠깐 들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로열 캐피탈 사람을 굳이 외부에서 따로 만나 좋을 게 없잖아. 소문나기도 쉽고.”

“어, 그래서 만나려면 오늘이 제일 좋을 것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권태정이 백 비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가 모이는 곳에서 인사 정도를 나누며 가볍게 만나고 끝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태성그룹 삼남이 이제는 사채업자와 밀회했다는 기사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장소가 어디야?”

“로열 호텔. 구대범 씨 만나는 일 아니어도 그냥 잠깐 들러서 사람들한테 얼굴 비추자. 자숙 중이라고는 하지만, 뭐 사고만 안 치면 되는 거고…. 얼굴 좀 아는 사람들은 다 모일 텐데 네가 빠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럴 때일수록 그깟 일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보여 주면 좋잖아.”

“비서님 말씀 들어야지. 너도 갈 거지?”

“실장님 가시는데 당연히 나도 가야지. 집에 먼저 들를 거지?”

“어. 좀 씻고, 쉬었다 가자.”

골목 입구에 선 차에 오른 권태정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머리를 뒤로 기댔다. 제 필요로 가는 거기는 하지만, 제 이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자리에 제 발로 가려니 생각만 해도 벌써 피곤했다.

“얼마 전에 산 슈트 개시해야겠다. 이딴 자리에 입을 건 아닌데 그래도 기왕 가는 거 내가 다 압살해야지.”

“그런 거 안 입어도 너 이길 사람 없어. 알파 그레이드부터 다른데 누가 널 이겨.”

“이기기는커녕 수준도 안 되는 것들이 말 좀 섞어 주니까 친구인 줄 알고 나대는 게 문제지.”

권태정은 10만 명 중 한 명꼴로 발현이 된다는 우성알파였다. 우성알파인 아버지와 우성오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당연히 우성으로 발현을 했고,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집에 있는 모두가 우성이기에 권태정에게는 특별한 일도, 또 유난스럽게 굴 일도 아니지만, 집 대문을 나서는 순간 권태정은 형질 하나만으로도 모두의 관심과 시기, 질투 그리고 동경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내로라하는 각종 모임을 다니면서도 권태정은 우성알파를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희귀하고 또 대단한 존재였다. 태성그룹의 오너 일가가 참석을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행사의 격이 달라질 만큼. 구대진이 굳이 전화까지 해서 오기만 하라고 애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구대범은 만나서 뭐 하려고?”

“그냥. 궁금해서. 빚은 얼만지, 얼마씩 갚는지, 구대범 계획은 뭔지.”

“알려 주려고 할까?”

“지가 안 알려 줄 이유가 뭐가 있어. 안 알려 주려고 하면 내가 대신 돈 갚는다고 하지 뭐. 그럼 설설 기면서 꼬리 흔들걸. 그런 것들 뻔해.”

이겸에 대해 알아낼 생각을 하면 꽤 재밌는데 구대진과 구대범. 그 외에 저를 아는 인간들의 반갑지 않은 낯짝들을 볼 생각을 하니 보기도 전부터 또다시 피로가 몰려들었다. 권태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이겸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랗고 아주 유명한 호텔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시급이 세고 평소보다 좀 더 큰 건의 연회장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며 강지훈을 따라왔는데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건인 것 같아 조금 긴장이 됐다.

“야, 뭘 그렇게 쫄아. 연회장 알바 한두 번 해 보냐?”

“저 이렇게 큰 호텔 아르바이트는 처음이라서요. 그동안에는 거의 동네 예식장에서 했었잖아요.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대국물산에서 하는 것 같던데…. 대국물산이면 재벌 아니에요?”

“대국정도면 뭐 재벌 맞지. 아, 저쪽이다.”

문자로 온 모이는 장소를 확인한 강지훈이 2층으로 올라가 한쪽 구석에 있는 홀로 가자 그 앞에 선 직원이 웃으며 인사하고, 명단을 확인했다.

“야, 오늘 진짜 역대급 쩐다. 동네 예식장이랑은 존나 레벨이 다르네. 이러니까 시급이 센 거야. 오늘 알바는 얼굴도 본다더라고. 오도현이랑 김승민도 한다는 거 내가 다 자리 없다고 구라치고 너만 데려온 거야. 그 새끼들은 어차피 와도 와꾸에서 잘리니까. 이겸이 너는 와꾸는 무조건 합격이잖아.”

“고마워요, 형…. 형이 소개 많이 해 주셔서 저번 달에는 두 배나 갚았어요.”

“그게 뭐 내 덕이냐. 네 와꾸 덕분이지. 그래서 얼마 남았어?”

“음…. 삼억 정도요.”

이겸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강지훈이 귀에 열 개는 꽂힌 피어싱을 하나씩 빼며 고개를 저었다.

“씨바, 진짜 네 인생도 존나…. 말을 말자.”

호텔 측에서 준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이겸이 마지막으로 까만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 끈을 꽉 묶었다. 다른 연회장은 유니폼 정도만 주고, 신발이나 다른 사항들은 비교적 자유로운데 호텔이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규정이 엄격했다.

제 사이즈의 까만 구두까지 골라 신고 서서 매니저의 검사를 받은 이겸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살피는 매니저의 시선에 조금 긴장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았다. 이겸과 일렬로 서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머리색이 지나치게 붉거나 밝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제외되었다.

“…형, 아무 말도 없으면 우리는 된 거예요?”

“어, 된 거.”

쫓겨나지 않은 것에 안도한 이겸은 매니저가 앞에서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중요한 행사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휴대폰 사용은 절대 금지이며, 사용하는 게 보일 때에는 곧바로 압수한 뒤, 검사까지 한 다음 퇴장시킨다는 웃음기 하나 없는 말이 이어졌다.

확실히 동네 예식장 아르바이트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 이겸은 곧바로 연회장으로 투입되어 홀 안에 있는 의자에 커버를 씌우고, 또 와인을 날랐다.

왔다 갔다 몇 번만 해도 지칠 만큼 큰 홀이라 강지훈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쉽게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강지훈을 눈으로 찾던 이겸이 결국, 찾는 것을 포기하고 커버를 씌운 의자를 테이블 아래로 잘 맞춰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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