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0화 (10/174)

#10

“뭘 하고 자빠졌어? 커피 안 줘?”

맞은 충격에 잠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가 아주 천천히 돌아와 귀 안으로 탁한 목소리가 담겼다. 이겸은 울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 손을 씻었다. 그리고 몸에 밴 대로 움직여 커피를 만들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나도 바쁘니까 꺼져 줄게. 허튼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수고해.”

이겸의 뺨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구대범이 커피를 가지고 카페를 나섰다. 카페 앞에 서 있던 차가 도로로 나가 사라지는 것을 본 이겸은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카운터 아래로 쪼그려 앉았다.

“…….”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보는 얼굴이라 이제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여전히 구대범의 얼굴을 보고, 협박을 들으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몸이 마구 떨렸다. 게다가 가끔 이렇게 폭력을 행사할 때면 더더욱.

무서웠다. 제가 오메가인 걸 모르지만, 언제든 알려고 들면 알아 버릴 것만 같아 무섭고, 정말 저를 어디로든 팔아넘길 수 있는 작자라는 것을 알기에 더 무서웠다.

할아버지라도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되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저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어떡하지….”

지금은 말뿐이지만, 방송사의 관심이 시들해지고 철거가 시작돼 사람들에게서 다람동이 잊힐 때면 누구도 저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구대범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세상에 혼자 남게 될 그때를. 이겸은 너무 무서워 웅크린 두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한껏 웅크려 작아진 몸이 애처롭게도 떨렸다.

* * *

구대범을 만나 그런지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도 이겸은 괜히 계속 주변을 살피게 됐다. 다행히 구대범이나 사채업자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들쑤셔진 마음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다람동과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이겸은 터덜터덜 익숙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 길도 3개월이면 끝이었다. 그 전에 여기를 나가기는 해야 할 텐데 그 생각만 하면 너무 막막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겸은 고개를 저으며 골목으로 들어가 점멸하는 가로등을 지났다.

“…….”

이겸의 시선이 대문 맞은편 벽돌 더미에 닿았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거고, 더 익숙한 일인데 빈자리를 보자 어제 여기 앉아 있던 실장이라는 남자가 떠올랐다.

어제도 남자와 조금 같이 있다가 집에 들어갔을 뿐인데 속옷이 조금 젖어 있었다. 여태까지 그런 적이 없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워 빨개진 얼굴로 수치심을 느끼며 한참이나 속옷을 빤 기억이 났다.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밀려드는 수치심에 귀가 빨개진 이겸이 자꾸만 달라붙는 깡패 실장의 기억을 흩트리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안에서 뭔가 말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도 없고, 이런 늦은 시간에 누군가가 찾아왔을 리도 없는데 분명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

문을 열자마자 묵직하고 향긋한 향이 확 끼쳤다. 이겸은 이제 그 향이 무슨 향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향을 맡으면 제 속옷이 조금이지만, 분명히 젖는다는 것도 알았다.

“왔어?”

하지만 깡패 실장이 왜 제집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할아버지와 함께 어디서 났는지 모를 텔레비전을 보면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어르신이랑 드라마 보잖아.”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권태정은 바닥에 다리를 접고 앉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한 이겸을 올려다보았다. 이 얼굴을 보기 위해 노인네 수발을 벌써 세 시간이나 들고 있었다.

“이겸아, 인사드려. 정희 엄마가 소개해 준 청년인데 얼마나 싹싹한지.”

“…아주머니께서요?”

세탁소 집 아주머니께서 소개를 해 주셨다는 말을 들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겸은 다시 바닥에 앉아 있는 권태정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으로 깡패를 집에 들인 건가 싶었다.

“너 왔으니 이제 난 가야겠다. 할아버지, 저 갈게요. 심심하시면 이제 저걸로 드라마도 보세요. 하루 종일 주무시기만 하면 시간도 안 가고 힘들잖아요.”

마치 진짜 손주라도 된 것처럼 웃은 권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살짝 숙였다. 천장이 워낙 낮아서 190cm에 육박하는 권태정은 완전히 허리를 다 펼 수가 없었다.

“쉬세요.”

“오늘 너무 고마웠어. 또 와.”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친해진 것 같은 권태정을 보며 더욱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잠깐 얘기 좀….”

“아야, 아…. 아, 다리 저려. 야, 무슨 집이 저렇게 좁냐. 다리가 안 펴져서 세 시간을 씨발….”

절룩이며 대문을 나서는 권태정을 따라나선 이겸은 집에 들어오기 전 봤던 그 벽돌 더미 위로 털썩 주저앉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어 있던 자리에 권태정이 채워진 걸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할아버지 말 들었잖아. 말 그대로야. 세탁소 집 아주머니 소개로 왔어.”

“그러니까 그게 다 무슨 말인지 여쭙는 거예요….”

“다리가 너무 아파서 생각이 안 나.”

저릿한 다리를 두드린 권태정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이겸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애처로워 보이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예쁜 얼굴에 맺힌 불행해 보이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나아가 마구 울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저 텔레비전은….”

“내가 샀어. 더 큰 거 하고 싶었는데 벽이 좁아서 큰 건 못 걸겠더라고. 벽에 달 때 못 좀 박았는데 괜찮지?”

“…….”

“아, 어차피 무너질 집이지.”

다 들리게 중얼댄 권태정이 이제야 피가 좀 통하는 느낌에 다리를 쭉 펴고 여전히 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화 많이 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내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

“…생각보다 안 나서 이상해요.”

늘 조용한 방에서 종일 말할 일도 거의 없이 혼자 지내는 할아버지가 웃는 걸 봐서 그런 건지, 집에 들어왔을 때 대화 소리가 들린 게 처음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화가 나지 않았다.

“이상할 거 없어. 사람들 대부분 그래. 내가 빡치게 굴어도 내 얼굴 보면 다 풀린다더라.”

“…….”

“너도 그런 거 아냐?”

저를 보며 웃는 권태정을 담은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뻔뻔한 말을 잘도 한다는 감상보다 저를 보며 웃는 그 순간의 모습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

허물어진 담도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도 그 웃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겸은 제가 참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권태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봐?”

“…….”

“네 눈에도 내가 잘생겼어?”

하고 있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시선을 급히 내린 이겸이 바닥에 놓인 권태정의 기다란 다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랑… 같이 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텔레비전도 감사합니다…. 돈 드려야 하는데 제가 상황이 좀 안 좋아서 지금 당장은 못 드릴 것 같아요.”

“서운하게도 말한다.”

“…….”

“내가 설마 너한테 돈 받을 생각하고 샀겠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있긴 한데 그게 돈은 아니니까 그딴 걱정 집어치워.”

“저한테… 바라시는 게 뭔데요?”

저를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게 보이는데도 궁금한 걸 묻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이 작게 웃었다. 여차하면 들어가 문을 잠그려고 대문 쪽에 서서 가까이 오지도 않으면서 시선은 내내 그 선을 넘어 저에게 닿는 게 좋아서 묻는 말에 자꾸만 그냥 미친놈처럼 패를 다 까게 됐다.

“말하면 다 해 줄 거야?”

“…그건 아니에요.”

이겸의 대답에 권태정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좁다란 골목으로 권태정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퍼져나갔다.

“아닌데 왜 물어.”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싫은 건 아닌데 네가 놀랄까 봐.”

딱히 놀랄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꾸 이겸을 놀리고 싶고 당황하게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권태정은 허물어진 담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기댄 채 이겸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이겸의 시선이 제 손에 닿는 게 느껴졌다. 거기 닿은 시선이 손목을 타고 팔로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팔로 흘러든 시선은 권태정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고 주르륵 흘러내려 아랫배에 고였다. 아, 씨발. 또 꼴리네.

단순히 닿는 시선 하나에 꼴리는 게 아니었다. 제 손을 보며 무려 머뭇대고 있다는 게 몸 여기저기를 울렁이게 했다. 경멸이 아니라 고민의 시선이었다.

그 정도는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담은 그 시선과 살짝 발이 움직여 모래가 까끌대는 그 소리에 쉽게 일지 않는 흥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안 들어줄 줄 알았어.”

조금만 더 약한 척을 하며 당기면 한 걸음 정도는 저에게 먼저 다가올 것이었다. 경계는 하고 있지만, 제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 줬다는 이유 하나로 감사를 표할 만큼 착한 애니까.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이겸을 다가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권태정은 저릿함이 없어진 다리를 몇 번 더 움직여 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으면 내일 세탁소집에 물어봐.”

“…….”

“늦었다. 들어가.”

“저기….”

돌아가려는 권태정의 어깨를 이겸의 목소리가 잡았다. 권태정은 기꺼이 몸을 반쯤 돌려 저를 붙잡은 이겸의 목소리와 마주했다.

“응?”

“…다리는… 괜찮으세요?”

아, 사고치고 싶다. 권태정은 이겸에게 확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이겸은 제가 웃으면 자꾸만 시선을 먼저 피했다. 낮이라면 어디가 빨개졌는지 더 잘 보였을 텐데 어두워서 그게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갈게. 잘 자.”

눈을 맞춘 채 두어 걸음 뒤로 움직인 권태정이 느릿하게 뒤돌아 어느새 익숙해진 골목을 빠져나갔다. 만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등 뒤로 이겸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아, 씨발.”

진짜 존나 사고치고 싶네. 한숨을 내쉰 권태정이 답답하다는 듯 앞머리를 확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이 골목을 사고 다발 구역으로 지정해야 할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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