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9화 (9/174)

#9

“뭐…. 그렇죠? 그런데 그런 사람을 구할 수가 있어야지. 구하려면 돈이 드는데 빚 갚느라 이리저리 뛰는 애가 그런 돈 댈 여유도 없고….”

아, 생겼다. 가까이에서 연이겸 감시할 수 있는 구실. 이제 권태정은 아주머니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저를 감히 용역 깡패 따위와 비교할 때 보이던 예민한 얼굴과는 몹시 다른 얼굴이었다. 면접장, 상견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프리패스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에 아주머니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르신 챙겨 드릴게요.”

“…총각이?”

“네. 어차피 전 철거할 때까지 여기 매일 올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맡겨 주세요.”

“나야 뭐… 그렇게만 해 주면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어르신 봉양이 쉽지 않을 텐데 총각이 그걸 할 수 있겠어요?”

“그럼요. 저도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거든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아주머니를 살살 녹이는 권태정을 보고 어색하게 웃은 백 비서가 뭘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권태정은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아주머니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예 간병해 주실 수 있는 분을 구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병원도 모시고 다니고.”

“어마, 병원까지? 정말 그래 줄 수 있어요? 돈도 많이 들 텐데….”

“저희 아버지가 생각나서 제가 또 이런 건 그냥 못 넘어 가거든요.”

“그렇구나…. 내가 총각을 오해했네. 아깐 미안해. 전에 여기 있던 깡패 놈들이 징글징글하게 이겸이네를 못살게 굴었거든. 사기 당한 뒤로는 사채업자 놈까지 와서는 애를 들들 볶고….”

“걱정해서 그러신 건데 괜찮습니다.”

아주머니를 살살 녹이다 못해 너무나 쉽게 제 편으로 만든 권태정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아주머니와 함께 골목 끝까지 걸어 나갔다.

“아…. 괜찮으시면 오늘 저녁 챙기러 오실 때 같이 어르신 좀 뵀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럼, 너무 괜찮지. 내가 다섯 시쯤 밥해서 여기 여섯 시쯤 오거든요? 이따 여섯 시에 와요. 같이 들어가서 인사도 하고 하게. 세상에. 총각이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도 너무 예쁘네. 우리 정희가 다섯 살만 많았어도 사위 삼는 건데. 우리 애가 이제 열일곱이거든. 너무 아깝다.”

“꿈이 크시….”

잘 간다 싶더니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말을 뱉어 내는 권태정에 놀란 백 비서가 얼른 말을 막듯 앞으로 나가 아주머니에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권태정은 그 뒤에서 너무 고맙다 인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적당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멀어지는 아주머니를 본 뒤에야 백 비서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 나가다가 왜 그래?”

“아니, 듣자듣자 하니 선을 넘잖아.”

“그냥 흘리면 되지. 그만큼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아, 난 그런 말 흘리는 게 잘 안 돼. 그럴 일은 죽어도 없다고 정확하게 집어서 알려 주고 싶어 미쳐 버리겠어.”

“…못됐다.”

“난 못됐단 말 좋아. 착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기지개를 쭉 켠 권태정이 뻐근한 목을 느릿하게 움직여 풀었다. 그냥 말 많은 아주머니를 만나 피곤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수확이 있어 다행이었다. 적어도 길바닥에서 시간 낭비를 하게 된 건 아니니까.

“아까 그 말 진심이야? 연규학 씨 케어한다는 거?”

“어, 그럼. 진심이지.”

“직접 네가 점심 저녁 챙겨 드리고 한다고?”

“사람 써야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하는 게 세상에도 좋아.”

“굳이 돈 써가면서 왜 한다고 한 거야? 정말 회장님 생각나서?”

백 비서는 가끔 꽤 순진한 면이 있었다. 제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되묻는 백 비서를 보고 웃은 권태정이 차가 있는 컨테이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어르신 케어하면 저 집 편하게 드나들 수 있을 거고, 그럼 굳이 만날 이유 만들지 않아도 연이겸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내가 자기 할아버지 챙기는데 날 모른 척할 수도 없을 거고.”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난 요즘 연이겸 생각밖에 안 해. 어떻게 하면 3개월 동안 걜 내 옆에 딱 붙여 놓나 그 생각만 한다고. 나만 집주인 기다리는 개 된 것 같아 짜증 났는데 잘 됐지, 뭐.”

“너 머리 좋은 건 알지만, 가끔씩 진짜 천재 같단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그게 지금이야?”

“응. 그런 쪽으로 진짜 머리 잘 돈다.”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맞아.”

“한 건 해서 다행이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에너지를 너무 썼어. 임원 꼰대들 싹 모아 놓고 브리핑하는 것보다 더 힘드네.”

쉬지 않고 흐르던 아주머니의 대화 속도를 떠올린 권태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몹시 피곤한 일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로 저를 다시 만나 놀랄 이겸을 떠올리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즐거웠다.

“아, 좀 설레네.”

“뭐가?”

“이제야 좀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서.”

“싱겁긴. 점심 뭐 먹을래?”

“너 좋아하는 데로 가자.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운전석에 오르는 백 비서를 보며 답한 권태정이 시트로 몸을 푹 묻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저를 보고 놀랄, 멍해질, 어쩌면 화를 낼 이겸만이 가득했다. 이 모든 시간을 건너뛰고 얼른 고요한 어둠이 머리 위를 뒤덮기를 바랄 만큼.

* * *

“오천오백 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버려 주세요.”

“네, 진동벨 울리면 좌측 픽업 데스크에서 음료 찾아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하도 말해 입에 밴 안내를 한 이겸이 주문서를 보고 음료를 만들어 트레이에 올렸다. 오늘은 이상하게 손님도 별로 없고, 주문하는 것도 다 만들기 쉬운 음료들이라 딱히 힘들지 않고, 여유가 넘치는 날이었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 숨통이 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없어도 되나 싶을 만큼 한가한 날이라 손님이 들어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겸은 카운터에 선 채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몰래 확인했다.

[강지훈 형 : 야 주말 말고 금요일에 연회장 가능?]

[강지훈 형 : ㅈㄴ 큰 건이야 뭔 창립기념회?]

[강지훈 형 : 시급 ㅈㄴ 쩔]

요즘 이겸이 들은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겸은 얼른 강지훈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두 손으로 답을 보냈다.

[저 할 수 있어요]

[강지훈 형 : ㅇㅋ 그럼 너 한다고 한다]

[네 감사해요 형]

[강지훈 형 : ㅇㅇ 낼 확정되면 콜할게 ㅅㄱ]

말과 행동은 꽤 거친 편이지만, 그래도 강지훈은 이겸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꽤 괜찮은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자주 소개해 주고는 했다. 집에 빚이 있고, 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유독 더 이겸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겸은 그런 강지훈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연회장 아르바이트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비교적 깨끗한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고, 식사도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어 좋았다. 이겸은 작은 화면으로 달력을 보며 머릿속으로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정리했다.

“야, 손님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뭘 그렇게 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이겸이 휴대폰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카운터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누구인지 인식을 한 순간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카운터를 짚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문받아야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오늘 월급날 아닌데요.”

“씨팔, 야. 카페에 커피 마시러 오지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해? 주문이나 받으라고.”

이겸의 할아버지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 구대범은 뻔뻔한 낯짝으로 메뉴를 보다가 이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아메리카노. 아이스.”

“…….”

“겁나 불친절하네. 확 잘리게 해 줄까? 주둥이 안 벌려?”

“…기본 사이즈로 준비해 드릴까요?”

“제일 큰 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일 큰 사이즈로 주문받았습니다. 오천 원입니다….”

얼굴 앞으로 다가온 카드를 받은 이겸이 떨리는 손으로 계산을 이어 갔다. 그런 이겸을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구대범이 주먹으로 카운터를 두어 번 두드렸다.

“야, 이겸아. 나한테 커피 값 받으니까 좋아?”

“…….”

“홀랑 쓰고 못 갚는 돈이 삼억이 넘으면서 오천 원은 꼬박꼬박 받는 게 너무 웃기잖아. 나 같으면 내지 말라고 말이라도 할 텐데.”

“…그럴 돈이 없어서요.”

“돈은 없어도 할 말은 꼬박꼬박 있나 보다.”

“…영수증 버려 드릴까요?”

겨우 작게 할 말만 하는 이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구대범이 영수증을 받아 제 손으로 확 구겨 이겸의 얼굴로 던졌다. 구겨진 영수증은 그대로 이겸의 뺨을 때리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구대범은 그대로 이겸의 귓가를 후려쳤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이겸이 그대로 카운터 아래로 넘어졌다. 구대범은 카운터를 두 손으로 짚고 바닥에 넘어진 이겸을 내려다보며 살벌한 목소리를 냈다.

“씨팔, 진짜 넌 오메가 아닌 걸 고맙게 생각하고 살아라.”

“…….”

“그때 방송에 얼굴 잠깐 팔리게 해 준 방송국에도 큰절 하고. 씨팔, 저거 얼굴만 안 팔렸어도 확 팔아넘기는 건데. 세상이 너무 좋아졌지? 돈 못 갚는 놈 인권도 생기고.”

구대범은 한 번씩 이렇게 이겸을 찾아와 매번 같은 협박을 하고는 했다. 방송을 타지만 않았어도, 방송국에서 지금도 이겸을 찾지만 않았어도 확 팔아 버렸을 거라며 협박하고, 오메가가 아닌 걸 고맙게 생각하라 말했다.

이겸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 제가 오메가라는 것을 알면 제대로 된 구실을 못 해도 저를 팔아넘길 거라는 걸 알기에 최대한, 정말 최대한 그것만큼은 절대 들키지 않도록 의연하게 굴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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