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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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인사도 나누고, 또 기회가 되면 아르바이트를 어디에서 하는지도 묻고, 또 그 애한테서 나던 새콤달콤한 복숭아 향도 맡아 보고.
방송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이유가 가장 앞에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권태정은 이겸에게서 나는 그 복숭아 향을 다시 맡아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저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백 비서는 그 자리에 없어야 했다.
“어디로 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전에 갔던 려운 갈까? 너 거기 회 좋아하잖아.”
“나야 뭐 어디든 좋지.”
“그럼 거기로 가자. 나도 간만에 거기 초밥 먹고 싶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 백 비서를 흘끗 본 권태정이 시트 뒤로 몸을 깊게 파묻으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부디 식사를 다 마치고 나왔을 때는 연이겸과 더 가까운 어둠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기를 바라며.
* * *
식사는 꽤 즐거웠다. 딱히 생선이 끌리지 않았음에도 <려운>의 음식은 언제든 흡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권태정은 따뜻한 청주를 몇 잔이나 마신 백 비서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다람동으로 돌아왔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냐며 몇 번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던 백진우는 간만에 마신 술에 무너져 나중에는 군소리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저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면서 백 비서에게만 은근히 청주를 권한 권태정은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백진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겸을 만나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운 그사이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권태정은 차를 컨테이너 앞에 세우고 느릿하게 걸어 이겸의 집까지 가 문을 두드렸다.
낮보다 더 조용한 밤이라 그런지 크게 두드리지 않는데도 골목으로 문 흔들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집에 있다면 듣지 못할 수가 없는 정도의 소리였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이제 아홉 시가 조금 지난 것을 확인한 권태정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여섯 개비의 담배가 다 타서 바닥에 굴러다닐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일부러 천천히 피웠는데도 겨우 한 시간이 지나 있는 것에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오는 거 아냐.”
발로 담배꽁초들을 아예 짓이긴 권태정이 안 되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계속 한 곳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자니 지루해 미칠 것만 같았다.
천천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겸이 와서 집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맺혔다. 안 해도 될 짓을 일부러 하면서 이러고 있는데 자리를 비운 그사이에 혼자 쏙 들어가 버리면 진짜 억울할 것 같았다.
권태정은 열 시에서 딱 오 분 더 지난 시간을 확인하고 대문 맞은편에 있는 벽돌 더미 위로 걸터앉았다. 기다란 다리가 좁은 골목의 반을 가로지르며 아무렇게나 놓였다.
“…….”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다 보니 가까운 것에 있는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녹슨 대문, 가만히 놔둬도 몇 년 안에 혼자 무너질 것처럼 낡은 담, 툭 치면 불이 나갈 것 같은 가로등, 아무렇지도 않게 길에 버려진 쓰레기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밤인데도 빛나는 유리조각들.
권태정은 모래와 뒤섞여 반짝거리는 유리 가루들을 신발로 대충 문질러 흩트렸다.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서늘한 밤공기가 이 골목에서는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태어나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서 하는 고생에 짜증이 솟았다. 갑자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현실 자각과 함께 먼지 하나 없고, 늘 좋은 향이 나던 사무실이 떠올랐다.
그런 쾌적한 곳을 두고 지금 이 골목에서 뭐 하나 싶어 제대로 머리가 돌려는 순간 골목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치솟던 짜증을 억누르고 그쪽으로 온 감각을 기울였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분명히 걸음 소리였다. 몇 시간 만에 듣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기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권태정은 곧 눈에 보이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자가 조금 더 가까워진 순간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이겸이었다. 권태정은 그림자를 봤을 때부터 그게 이겸이라는 것을 알았다.
“늦었네.”
이겸이 골목을 반쯤 걸어왔을 때 권태정은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크게 해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가 지나치게 놀라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겸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벽돌 더미에 앉은 채 고개를 앞으로 더 기울여 뺀 권태정이 그런 이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연이겸은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도 예뻤다.
“놀라지 마, 나야.”
그래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이겸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 건지 다시 이겸의 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경계심이 잔뜩 묻은, 여차하면 뒤로 돌아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걸음이었다.
“…컨테이너…?”
“응, 컨테이너. 아, 그게 랜드마크긴 한가 보네. 그런데 이름 대신 불리기는 좀 그런데. 내가 내 이름 말 안 했나?”
“…네.”
“권태정. 나이는 대충 너보다 한참 많아.”
생김새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 이겸이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흩트리고 다시 경계심 묻은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하세요?”
“너 기다렸어.”
“저를 왜….”
아까보다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는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권태정은 그 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이겸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열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 여기서 두 시간도 넘게 기다렸어.”
“…….”
“아니다. 일주일을 기다렸지. 어떻게 나 이사 온 거 알면서 한 번을 안 와. 심심했잖아.”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네가 불리할 텐데.”
“네?”
소리 내어 웃으며 벽돌 더미에서 일어난 권태정이 슈트 재킷을 툭툭 털고 단숨에 이겸에게 다가오며 그 거리를 좁혔다. 이겸은 순식간에 제 눈앞에 와 있는 권태정을 보며 뒤늦게 뒤로 한 걸음을 크게 물러섰다. 권태정은 굳이 더 다가가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냥 많이 바빠 보여서 한 번 보러 온 거야. 내가 너한테 할 말이 뭐가 있겠어. 그런 거 없어.”
“…….”
굳이 방송 이야기를 꺼내며 처음부터 경계심을 더 키우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은 밤이 늦어 방송국 사람을 만나지도 못할 테니까. 권태정은 마음속에 목적을 깊숙하게 숨긴 채 눈앞에 있는 이겸에게 집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먹은 억제제 효과가 슬슬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페로몬을 가라앉히는 것과 동시에 감정 컨트롤도 어느 정도 도와주는 억제제 효과가 떨어지자 자꾸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한 충동이 일었다. 이겸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권태정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전처럼 살짝 제 페로몬을 노출했다.
“…….”
“…….”
분명히 달라지는 게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이겸이 움찔대고, 조금 전보다 길어진 숨을 입술 바깥으로 내쉬는 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이겸을 보며 조금 더 페로몬을 열었다.
이제 이겸은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골목을 급히 뛰어온 사람처럼. 권태정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쁘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올라와 입술 안쪽을 건드렸다. 물론 소리 내지는 않았다.
“내일도 일 나가?”
“…네? 네….”
“매일 이렇게 늦는 거야?”
이번에는 입술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허벅지를 오므렸다. 권태정은 이겸의 두 무릎이 안으로 살짝 맞닿는 것을 보며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겸이 멀어진 만큼의 거리를 채우며 앞으로 반걸음을 옮겼다. 이겸에게서 저번보다 진한 복숭아 향이 났다. 새콤하고 달콤해서 여기저기 깨물고 싶은 그런 향이.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들어갈게요.”
“응, 그래. 또 봐. 시간 나면 컨테이너도 들르고 그래. 내가 기다리는 거 잊지 말고.”
“…….”
“나랑 뭐 하고 싶은 거 생겨도 오고.”
“…하고 싶은 거요?”
내내 권태정의 눈을 피한 채 있던 이겸이 뒤로 살짝 더 물러서며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아, 씨발. 어린 게 까져서 굳이 또 확인하려 드네. 뒹굴고 싶으면 오라고 할 걸 그랬나. 권태정은 싱긋 웃으며 이겸과 완전히 거리를 벌려 섰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야.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
“…….”
“잘 자.”
이겸을 보며 뒤로 서너 걸음을 옮긴 권태정이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을 걸었다. 곧바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제가 골목을 반이나 벗어나도록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제가 멀어지는 걸 이겸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 안으로 내려간 감각이 느릿하게 뭉치는 게 느껴졌다. 드물게 찾아드는 흥분이었다.
씨발, 러트 올 때가 됐나. 낯짝 하나 반반한 어린애가 뭐 그렇게 꼴린다고. 애초에 흥미와 흥분은 다르다는 것을 권태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제가 이겸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이제 막 스물이 된 어린애가 형질을 속여 가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한 흥미지 그 이상의 열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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