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6화 (6/174)

#06

탈취제 향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남자에게서도 묵직한 향이 났었다. 조금 더 맡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향이. 향수일까? 아니면 알파 페로몬? 아마 향수일 가능성이 클 것이었다. 저는 알파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까.

‘저 오늘 컨테이너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거든요.’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게 이상하고, 또 조금 무서웠다. 키도 크고, 몸도 커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남자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다가오니 입이 저절로 닫히고, 몸도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례 좀 할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에 막 밀고 들어올 수가 있지…. 이겸은 정리실 문을 잡고 선 채 정신없이 실장이라는 남자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키도 크고, 몸도 크고, 또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었다.

무섭고, 어쩔 줄을 모르겠는 상황에서도 계속 한 번씩 저절로 눈길이 가고, 잘생겼다는 생각을 그중에도 하게 하는 얼굴이었으니까. 이겸은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

또 무례하고, 막무가내고,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얼마나 이상하냐면 그 실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보며 말을 하고, 또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조금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느낌이라 아직도 그 감각이 몸에 남아 있었다. 오싹한데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손끝이 저릿하면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는 그런 느낌. 그리고….

“…….”

실장이라는 남자가 간 뒤에 보니 속옷이 아주 조금 젖어 있었다. 언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 남자 때문이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고, 오싹한 느낌이 들 때 아랫배가 살짝 울렁이는 느낌이 났었는데 그때인 것 같았다.

왜 그랬지. 위압감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이 정말 알파라서? 아닌데…. 난 알파 페로몬에 반응 안 하는데…. 알파랑 같이 있어도 페로몬 향을 맡은 적도 없고. 이겸은 아침에 느낀 저릿함을 떠올리며 괜히 손끝을 다른 쪽 손끝으로 꾹 눌렀다.

‘미안,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하나도 안 미안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양아치…. 깡패.

“…….”

재개발 일 때문에 왔다는 걸 보니 아마 새로 온 용역 깡패일 것이었다. 작년 말까지 까만 슈트를 입고 손에는 쇠파이프를 든 채 철거촌을 누비고 다니던 용역 실장이라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얼굴은 아주 다르지만, 까만 슈트를 입은 것도 비슷하고, 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저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것도 똑같았다.

‘다음에 봐.’

용역, 그것도 용역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도대체 왜 저한테 인사를 하러 온 걸까. 철거촌에서 빨리 나가라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굳이 시간을 내어 인사까지 하러 올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전처럼 그냥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밤마다 쇠파이프로 문을 두드리고 다니거나 볼 때마다 욕을 내뱉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또 보자고 말한 걸까.

또 보면 뭘 하려고? 다음에는 본론으로 넘어가서 욕을 하려고 그러나? 아니면 때리려고…?

“…….”

저보다 키도 엄청 크고, 몸도 커서 그런 사람에게 맞으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오싹해져 어깨를 움츠린 이겸이 카페 문 열리는 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정리실을 나섰다.

계산대 앞에 서서 메뉴를 보는 손님 앞으로 선 이겸은 머릿속에 가득한 실장이라는 남자를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계속 생각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유해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위협적인 깡패 실장에 대한 걱정은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드는 동안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느낀 울렁임과 축축한 속옷의 불쾌한 느낌처럼, 아주 한참이나.

* * *

철거촌에서의 휴가는 생각보다 무료했다. 물론 진짜 휴양지로 떠난, 또는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정식 휴가는 아니라 딱히 즐거울 일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권태정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하고 싶은 만큼 운동을 하고, 또 느긋하게 철거촌으로 가서 시간을 죽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근 권태정의 일과였다.

자숙 중이라 누군가를 만나 술을 마시러 가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바쁜 누나와 형을 붙잡고 놀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본의 아니게 평소보다 더 단조롭고, 재미없는 그런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권태정이 심심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마크해야 할 상대인 이겸이 무척 바쁘다는 것에 있었다. 이겸과 만나 얘기도 하고, 농담 따먹기라도 하면 그래도 시간이 좀 갈 것 같은데 대화는커녕 일주일째 이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를 못했다.

씨발, 진짜 뭐 머리꼭지라도 보여야 뭐 말이라도 꺼내지. 이러다 3개월 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보겠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있던 권태정이 드르륵 다리 옆에서 몸을 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백 비서에게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백진우 : 절대 나오지 마]

조합장에게 뭘 받아올 게 있다며 나가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권태정은 소파에서 일어나 슬쩍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바깥을 살폈다. 컨테이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 비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웬 낯선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 때문에 절대 컨테이너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권태정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다가 문을 닫았다.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때 문이 열리고 백 비서가 들어왔다. 권태정은 심각한 얼굴을 한 백 비서를 보며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야?”

“방송국에서 답사 나온 모양이야.”

“아, 씨발. 진짜 후속 방송 할 모양이네. 그래, 뭐래?”

“나한테 주민이냐고 하더니 방송 하게 되면 인터뷰도 나오고 할 건데 협조 좀 해 달라고 하더라고. 주민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조합 사람이냐, 아니면 태성 사람이냐 캐묻는 거야.”

다시 소파에 앉아 뒤로 몸을 기댄 권태정이 피곤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방송국 놈들은 저를, 태성을 한시도 가만히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아는 주민이 있어서 잠깐 들렀다고 둘러대긴 했는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답사까지 나왔다는 건 제대로 해 보겠다는 거잖아.”

“아, 씨. 그럼 내가 연이겸 못 만난 사이에 저것들이 걔 만났을 수도 있단 거잖아.”

“그렇지.”

“아니, 뭐 얼굴이라도 봐야 곱게 여기서 나가라고 설득을 하든 데려가 내 집에 가두든 하지. 도대체 뭔 아르바이트를 얼마나 하고 다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 이러다가 3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겠어.”

의자를 끌고 와 권태정의 앞에 앉은 백 비서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는 들었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

테이블에 다시 기다란 다리를 올린 채 몸을 의자 뒤로 기대고 있던 권태정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휴가는 씨발, 무슨 휴가.

방송국 놈도 답사를 한답시고 철거촌을 헤집고 다니는 이런 때에 저는 아무것도 할 게 없이 가만히 컨테이너에 처박혀 있는 건 휴가가 아니라 고문이었다. 또 자존심이 상해 더는 여기 처박혀 연이겸을 볼 날을 기다리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가도 할 일 없는데 오늘은 얼굴 좀 보고 가야겠다.”

“연이겸 씨?”

“응.”

“언제 올 줄 알고.”

“시간 많은 사람이 기다려야지. 별수 있나. 아, 넌 퇴근해. 난 기다렸다가 보고 갈 테니까.”

“어떻게 그래.”

백 비서는 불안한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철거촌으로 일터가 바뀐 뒤로 백 비서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권태정을 마크하는 일이었다. 권태정이 연이겸을 마크하듯, 백 비서는 권태정이 과격한 일이나 선 넘는 짓을 하지 못하게 마크해야만 했다.

“진우야. 내가 못 미더운 건 알겠는데 내가 언제 같은 사고 연달아 치는 거 봤어? 뉴스 나올 짓 안 해.”

“그래도 언제 올 줄 알고 일부러 기다리기까지 해.”

답답하다는 듯 삐딱하게 서서 고개를 기울인 권태정이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백 비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계속 기다려? 그사이에 씨발, 방송 백 번은 찍겠다. 너 연이겸이 밖에서 뭐 하고 다니는지 알아? 방송국 사람 안 만난다고 확신할 수 있어?”

“…아니.”

“완전히 차단하려면 내가 걔랑 종일 같이 있어야 한다고. 밖에 돌아다니는 놈들 못 만나게 내가 걜 데리고 뺑뺑이 쳐야 할 거 아냐. 방송국 놈 만나서 얘기까지 하고 왔으면서 지금 일부러 만날 필요 없다는 말이 나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까지 세운 권태정의 말에 백 비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잘 먹지 않아서 그렇지 권태정은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유능한 인재였다.

한동안 그 재능을 써먹지 않아 그 사실을 잊고 있던 백 비서는 권태정의 말에 얼른 제가 간과한 것들을 떠올리며 사과했다.

“네 말이 맞아. 방송국 사람들 접촉 못하게 하려면 사람을 붙이거나 같이 있는 수밖에 없지. 미안.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어.”

“미안할 건 없고, 넌 퇴근해. 너까지 부려먹을 마음은 없으니까.”

“아냐. 너 혼자 밤까지 뭐 하려고.”

“그럼 저녁이나 먹고 가든지. 어차피 걔 밤늦게나 올 거 아냐. 나가자. 배고프다.”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정이 컨테이너를 나가려는 것을 막은 백 비서가 먼저 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철거촌 안을 돌아다니던 방송국 사람이 근처에 보이지 않는 것을 면밀히 확인한 뒤에야 백 비서는 문을 더 열어 권태정이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

권태정은 백 비서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컨테이너를 나섰다. 맛있는 저녁을 먹이고 백 비서는 집으로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 어린애랑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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