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5화 (5/174)

#05

“놀랐잖아. 갑자기 집에 들어가서. 그러다가 정말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충 어떻게 사나 내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도 신고 안 당하고 간단히 끝냈잖아. 절차대로 하려면 인사하고, 몇 번 더 보면서 얼굴 익히고, 난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서 집에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받아야 하는데, 씨발, 3개월 안에 들어갈 수는 있겠어?”

“그래도 아까 정말 신고라도 했으면 언론 타는 거 금방이야.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새어 나갈 건 나가고.”

“알아. 그렇게 안 될 정도로만 하는 거지 뭐. 그리고 밀고 들어가서 얻은 수확이 있어서 괜찮아.”

“무슨 수확?”

이겸이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라는 사실을 백진우에게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권태정은 말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을 기울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베타인 백진우는 이겸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아도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을 것 같아 별로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겸이 숨기고 있는 것을 굳이 제 입으로 남에게 까발리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 조금 더 알아보고 확실해지면 말해 줄게.”

“알았어. 내가 뭐 알아볼 일 있으면 얘기해.”

“응. 고마워.”

깊이 없이 고마움을 습관처럼 말한 권태정이 아직도 코밑으로 아주 연약하게 달라붙은 복숭아 향을 느끼며 느릿하게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아주 재미있는 3개월이 될 것 같았다.

* * *

커다란 분홍색 토끼 탈을 쓰고 털로 된 옷까지 입은 이겸은 손을 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흔들며 풍선을 나누어 주었다. 인형 탈을 쓰고 하는 아르바이트는 버는 돈에 비해 너무 덥고, 탈이 무거워 어깨와 목이 아팠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의 종류를 가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오늘도 열심히 팔이 아플 만큼 흔들고, 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풍선을 나누어 주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수고들 했어. 자, 이건 고양이 거. 이건 토끼 거.”

새로 오픈한 휴대폰 가게 사장이 주는 봉투를 받고 꾸벅 인사한 이겸이 다른 동물 탈을 쓴 사람들과 함께 건물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3월이라 그리 덥지 않은데도 답답한 탈을 내내 쓰고 있어 그런지 땀이 나 옷과 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이겸아, 내일은 치킨 집인데 너 거기도 올 거지? 다음 주 주말에 호텔 알바도 올래? 연회장 알반데. 시급 꽤 세.”

“네. 저 할래요. 저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일 생기면 꼭 불러 주세요. 저 밤에도 할 수 있고, 아침에도 할 수 있어요. 새벽도 괜찮아요. 주말도 당연히 되구요.”

“알았어, 알았어. 안 그래도 사장님이 되도록 너 데리고 다니라고 난리야. 너 가는 데마다 사람들 존나 몰린다고. 요즘 일 잘 들어오지 않아?”

“네, 요즘 새로 개업하는 데가 많아서 그런지 전보다 많이 나아졌어요.”

“일 없는 것보단 낫지만, 취직해야 하는데 이게 뭐냐. 씨발, 오늘은 고양이, 내일은 닭대가리.”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문 강지훈이 이겸에게도 담배를 권하며 담뱃값을 내밀었다. 이겸은 두 손을 저어 거절하고는 차가운 물을 틀어 얼굴을 적셨다.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으로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본 강지훈이 연기를 뱉으며 페이퍼타월을 두어 장 뽑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베타나 되니까 매일 뺑뺑이 돌지. 알파나 오메가는 발정 나서 한 달에 반은 못하잖아. 가난하려면 그나마 베타가 낫다니까. 억제제 값도 안 들고.”

강지훈의 말에 물에 젖은 페이퍼타월을 쥔 이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억제제 부작용으로 오메가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된 지는 벌써 3년이나 됐지만, 아직까지도 누군가가 제 앞에서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지나치게 의식하게 됐다. 이제 저와는 크게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그래도 여전히 형질만은 여전히 오메가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야, 그래도 오메가는 얼굴 되는 애가 많잖아. 맘만 먹으면 얼굴 팔아 돈 존나 벌지. 베타는 씨발, 이도 저도 아니라 존나 애매해.”

화장실 칸 안에서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이겸은 물에 잔뜩 젖은 페이퍼타월을 버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곧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와 함께 옷을 갈아입은 유재민이 바깥으로 나와 땀에 젖은 머리를 헝클였다.

“하긴 알파 하나만 잘 물어도 팔자 존나 피는데.”

“가끔 베타랑 결혼하는 알파도 있던데 너도 찾아보던가.”

“씨발, 됐거든.”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도 섞이지 못한 이겸은 내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짓누르려 애썼다. 베타라고 나서서 말을 하고 다닌 적도 없고, 그냥 모두가 저를 베타로 알아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지만, 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겸이 너는 딱 얼굴이 오메가 쪽인데.”

갑자기 파고드는 말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강지훈의 말에 놀란 이겸이 순간 흐트러진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넌 진짜 어디 기획사 이런 데 가 봐. 얼굴 파는 게 돈 제일 많이 벌잖아. 그 얼굴이면 딱 아이돌이야.”

강지훈의 말에 이겸은 괜히 물기가 있는 세면대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솔직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데뷔하기엔 늦었지. 요즘은 초딩 때부터 연습생해. 이겸이 너 스물 아냐?”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유재민이 강지훈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손짓하며 이겸을 바라보았다. 이겸은 긴장한 손끝에 살짝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올해 스무 살 됐어요.”

“그럼 좀 늦었지. 스물에 데뷔하면 몰라도. 아님 너 연기로 나가. 연기 좀 해?”

“…아니요. 저 그런 거 못 해요.”

“나 다른 알바 같이 하는 형이 연기학원 다닌다는데 소개 시켜 줄까?”

그냥 이 얘기가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어지는 것에 불편해진 이겸이 다시 두 손을 살살 저으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딱히 집요하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는 금세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저 먼저 가 볼게요. 다음 아르바이트 바로 가야 해서요.”

“아, 카페?”

“네…. 내일 뵐게요.”

“엉, 낼 보자.”

토끼 탈과 옷을 안고 건물을 나온 이겸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 냄새가 너무 독해서 머리가 아프고, 오메가 소리를 들어 여전히 심장이 아플 만큼 빠르게 뛰었다.

“…하아….”

괜찮아. 오메가인 거 아무도 모르잖아. 페로몬 향도 안 나고, 또 히트 사이클도 안 오고, 알파들이 봐도 다 베타라고 생각하잖아. 그냥 이대로 지내면 돼. 의식할 거 없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도 돼….

“…….”

심호흡을 한 이겸이 얼른 길가에 선 이벤트 회사 차로 다가가 트렁크에 제가 썼던 토끼 탈과 옷을 반납했다. 그리고 폴더로 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교대 시간까지는 겨우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아, 뛰어야겠다. 이겸은 생각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무사히 전 타임 직원과 교대를 한 이겸은 카페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계산대에 서서 숨을 돌렸다. 저녁 먹기 전 애매한 오후에는 사람이 밀려들지 않아서 몇 시간 정도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쇼케이스 안에 케이크와 빵, 병 음료 같은 것들을 채우고 계산대 의자를 당겨 앉자 그제야 발과 다리가 아픈 게 느껴졌다. 이겸은 몸을 숙여 종아리를 두드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렇게 다리가 아파 화끈댈 때까지 일을 하고 또 하는데도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게 답답했다. 할아버지가 사기 당한 이주비를 조금씩이라도 일해 갚고는 있지만, 솔직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는 것을 이겸도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이 나아질 수는 있을까? 빚이라는 게 없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

할아버지는 점심 잘 드셨을까. 또 바로 누워 계시면 탈이 나실 텐데.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걱정되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겸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할아버지였다. 저의 유일한 가족이자 책임감, 그리고 힘들어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

많이 편찮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명치가 답답했다. 아직 철거촌에 남아 계시는 세탁소집 아주머니께서 감사히도 점심과 저녁 챙기는 것을 도와주고 계시지만, 이제 그 도움을 받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이겸아, 아줌마 다음 달에 여기 나가. 우리 정희 이제 학교도 보내야 하고…. 철거도 곧 될 것 같아서 이제 나가려고. 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안 좋네.’

세탁소집마저 이사를 가면 이제 철거촌에 남는 집은 일곱 집이 될 것이었다.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제가 될 것만 같았다. 이겸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지끈대는 머리에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겸은 여유가 생기는 게 싫었다. 생각이 맺힐 틈이 생기면 늘 이렇게 현실이 몰아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내내 바쁜 게 훨씬 나았다.

그렇게 종일 바쁘다가 집에 들어가서 할아버지가 드신 것을 치우고, 또 아무 생각도 없이 쓰러져 자는 게 현실을 떠올리며 울적해지는 것보다 훨씬, 정말 훨씬 더 좋았다. 물론 보통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지만.

우울한 생각 그만하고 청소나 하자. 고개를 저은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실 안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나와 사람이 많이 없는 쪽 홀 바닥을 쓸려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담배 냄새.”

아까 형들이 화장실에서 담배 연기를 막 뱉어 내는 옆에 있었더니 저에게도 담배 냄새가 밴 모양이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바지에 밴 건지 움직일 때마다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아, 이러면 손님한테까지 날 텐데…. 정리실 안에 있는 탈취제라도 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겸은 빗자루를 놓고, 다시 정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문을 반쯤만 열고 탈취제를 바지 쪽에 뿌린 이겸은 묵직한 탈취제의 향을 맡자마자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문을 열자마자 그 틈으로 보이던 그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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