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2화 (2/174)

#02

“어린애도 있네.”

“아…. 지금 말씀드릴 집이 그 학생이 사는 집입니다. 현장 르포 방송 당시에 잠깐 이주비 사기를 당한 걸로 같이 나왔었는데요. 돕고 싶다는 반응이 꽤 커서 그 뒤로 제작진 쪽에서 후속 보도를 하고 싶다고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후속 보도? 여기 와서 또 찍겠다고?”

“…네.”

“그래서 하겠다고 했대요?

“아니요. 방송에 나갈 사정이 안 된다면서 계속 거절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네. 잠깐만요. 좀 보고.”

화면 속 앳된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권태정이 옆으로 시선을 옮겨 ‘연이겸’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 얼굴과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그 옆으로 쓰인 주민등록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저보다 열두 살이 어렸다.

“아깝다. 너무 어리네.”

“네?”

“얼굴은 예쁜데.”

아쉽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창에 머리를 댄 권태정이 화면을 내려 기다랗게 뭔가가 많이 적힌 비고란을 바라보았다.

• 베타

• 연규학(89) 씨의 손자

• 부모 없이 할아버지인 연규학 씨와 둘이 7년 전부터 거주

• 용역들과 트러블이 잦았음

• 다람동 내 최연소자

• 다른 주민에 비해 언론 접촉 가능성이 가장 큼

• 로열 캐피탈에 빚 상환 중.

“로열 캐피탈? 그, 그…. 구대진 사촌이 하는?”

“네. 연이겸 씨는 바로 앞 페이지에 있는 연규학 씨의 손자인데요. 연규학 씨가 이주비를 받아 투자사기를 당하셨는데, 그때 로열 캐피탈에서 대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사기라….”

페이지를 앞으로 넘긴 권태정이 조금 전에 살핀 것처럼 집중해 이겸의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눈에 담았다. 거기에는 백 비서가 말한 것처럼 이주비를 받아 투자사기를 당한 것도 모자라 빚까지 생긴 일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말년에 사고 크게 치셨네. 투자사기에 빚까지 지시더니 본인은 충격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셨네요?”

“네. 그래서 그 손자가 빚을 갚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페이지를 넘긴 권태정이 소년, 이겸의 사진을 다시 눈에 담았다. 사진 속 예쁘장한 얼굴이 눈동자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전혀 꾸미고 찍은 사진이 아닌데도 증명사진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구나 싶게 감탄이 나오는 예쁜 얼굴이었다.

아마 사진 속 이 애는 평생 예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었다. 오늘 처음 본 저도 그런 생각을 제일 먼저 하고 있으니까.

“예쁘네.”

“네?”

“얼굴 말이야. 예쁘잖아요.”

저보다 한 세 살, 아니, 많이 봐줘서 다섯 살만 어렸어도 큰 흥미를 가졌을 텐데 아쉽게도 사진 속 소년은 너무 어렸다. 권태정은 금세 흥미를 거두고 무심한 얼굴로 험난한 이겸의 비고란을 다시 눈에 담았다.

“빚 갚아야지 할아버지 병 수발 해야지. 인생이 얼마나 좆같을까. 그나마 베타라 다행이네. 오메가였으면 로열 새끼들이 진작 팔아먹었을 거 아냐.”

아니, 차라리 오메가였으면 빚 갚기가 더 쉬웠으려나. 다시 이겸의 증명사진을 본 권태정이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용역들이랑 트러블? 이건 또 뭐예요?”

“아, 용역 중에 몇 명이 처음 봤을 때 오메가인 줄 알고 손을 대려 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는 뭐 병신들만 데려다 놨어요? 빨간 컨테이너에 의미나 부여해서 가져다 두는 또라이에 일거리 줬더니 주민 손대려는 깡패 새끼들에. 그러니 일이 될 리가 있나. 몇 년을 왜 저 지랄만 하고 있나 했더니 이유가 거기 있었네. 그리고 그걸 용역들과 트러블이 잦았다고 적으면 되겠어요? 누가 보면 같이 싸운 줄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백 비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권태정은 다 봤다는 듯 태블릿PC를 옆으로 툭 던져 놓았다. 보라고 해서 보기는 했다만, 역시 골치 아픈 일은 딱 질색이었다.

“실장님께서는 3개월 동안 그 집을 담당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기에서 제일 문제가 되기 쉬운 집이고, 또 제작진들이 수시로 연락을 하거나 찾아와 연이겸 씨를 설득하려 하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

“아, 그러니까 이 어린애 방송 못 나가게 해라?”

“네. 그리고 철거 시작 전에 안전히, 또 무사히 이주할 수 있도록 설득해 주시면 더 좋습니다. 이주비도 사기 당하고, 빚까지 있는데다가 로열 캐피탈 측도 종종 찾아오고 있어서 상황이 많이 복잡합니다.”

“이겸이는 좋겠다. 방송국에서도 찾고, 사채업자도 찾고. 심심하진 않겠네.”

“3개월 동안 조용히만 지나가면 철거 문제없이 진행될 겁니다.”

“하라면 해야지. 그래야 복귀 가능하니까. 아버지가 철거 무사히 진행하거나 결혼할 사람 데려오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기조실 다시 나 준다고 그랬는데. 백 비서님은 뭐가 더 빠를 것 같아요? 철거? 아니면 결혼?”

“현재 만나시는 분이 안 계시니…. 아마 철거가 더 빠르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정말 휴가네. 그러니까 3개월 동안 어린애 마크하면서 놀기만 하면 된단 거잖아. 아, 재밌겠다.”

진심으로 재밌겠다는 듯 웃은 권태정이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집 근처 풍경을 보며 눈을 감았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며칠 시달리느라 못 잔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 * *

욕조에 몸을 기댄 채 마지막 와인 한 모금을 마신 권태정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빈 잔을 바라보았다. 그냥 병째 가지고 들어올 걸 그랬다는 후회와 함께 잔을 놓은 권태정은 반갑지 않은 진동이 울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기 젖은 손으로 아까부터 내내 울려 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구대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어제 제 기사가 터진 뒤부터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일 전화가 오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전화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죽겠어서 저를 약 올리고 비웃으려 전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전화를 건 대국물산 구대진도 분명 다 죽어 가는 제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쩌지, 나 안 죽어 가는데? 짜증 섞인 시선으로 휴대폰을 대충 욕조 옆 어딘가로 처박으려던 권태정은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구대진이라면 아까 백 비서가 말한 로열 캐피탈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운영은 하지 않지만, 그걸 운영하는 사촌과 워낙 친하고 잘 어울려 다니니 구대진을 통하면 요주의 인물로 분류가 된 그 어린애의 빚 상황이나 그런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응, 대진아.”

필요한 게 생겼으니 전화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었다. 수준이 안 맞아 말도 섞고 싶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이용하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지.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쪽팔려 죽었나 했다.

“너도 사는데 내가 왜 죽어.”

-입 살아 있는 거 보니까 생각보다 타격 없나 보다? 자리에서도 쫓겨났다며.

“일 안 하고 좋지. 자리 없어진다고 내가 대국물산 자식 되는 것도 아니고, 뭐 크게 달라질 게 있나?”

-재수 없게도 말한다. 걱정돼서 전화한 내가 병신이지.

“그래도 우리 대진이는 자기 객관화가 참 잘돼 있어.”

걱정이라는 말에 욕실이 울릴 만큼 크게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옆으로 놓인 빈 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야, 까지 말고 너희 형 번호나 찍어 보내.”

-형?

“사채.”

-아, 대범이 형? 형은 왜. 너 뭐 돈 빌리게?

“어. 사채 좀 써서 내 사업 좀 하게.”

-…야, 너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있어 보이는 척은 하지만, 멍청한 구대진은 애초에 권태정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권태정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해도 믿고 자빠진 구대진에게 금세 전의를 상실했다.

“어, 죽을 지경이니까 번호나 보내라.”

-알았어. 해결 좀 되면 술 사 줄게. 나와라.

“미안한데 내가 자숙 중이라. 자숙해야 하니까 끊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대진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구대범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대로 번호를 저장한 권태정이 볼일이 끝났다는 듯 휴대폰을 대충 욕조 뒤쪽으로 놓고 물 안으로 몸을 깊게 담갔다. 따뜻하고 편안하며, 또 좆같았다.

* * *

흐리멍덩한 정신 안으로 기계음이 파고들었다.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던 권태정이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어 새벽 다섯 시 반에 맞춰진 알람을 껐다.

평소라면 지금 일어나 운동을 하고, 출근 준비를 했겠지만, 3개월 동안은 굳이 새벽 일찍 일어나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출퇴근 도장을 찍을 사람도 없고, 제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막중한 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정도 더 자고 일어나서 느긋하게 운동을 하고, 백 비서를 만나 천천히 아침을 먹은 다음에 철거촌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가서 그 귀신 나올 것 같은 컨테이너가 좀 쓸 만하게 바뀌었나 좀 보고, 슬슬 한 바퀴 산책 겸 동네나 한 바퀴 돌다가 대충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뭐 컨디션이 괜찮으면 어린애 집에도 한번 가 보고.

아, 여유롭고 좋네. 권태정은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우며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재벌 아들이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몰두하면 미친 기량을 보인다는 이유로 지난 5년 동안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형의 기대를 온몸으로 받으며 내내 일만 하고 살았었다. 물론 중간에 지금처럼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전부 제 기량으로 쉽게 수습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일어난 ‘태성그룹 삼남의 보복 운전’사건도 이전과 그리 다를 게 없는 사고였다. 충분히 수습하려면 쉽게 수습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보복 운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말이 저에게 붙은 것을 떠올린 권태정이 잠이 사라진 눈을 떠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씨발.”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권태정은 저에게 그 불명예스러운 말이 붙던 날을 떠올렸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던 날이었고, 시작 역시 평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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