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화 (1/174)

#01

뽀얀 모래 먼지가 까만 구두 위로 내려앉았다. 권태정은 잠시 무표정하게 눈앞에 펼쳐진 철거촌을 바라보다가 이내 옆에 선 백 비서를 보며 웃음 지었다.

“휴가지로 딱이네요. 백 비서님. 사람도 없고, 그래서 조용하고, 차도 없으니까 보복 운전할 일도 없고.”

휴가지라는 말은 황량하기까지 한 철거촌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위치 좋고, 채광 좋은 사무실에서 하루아침에 철거촌으로 사무실이 바뀌었는데도 권태정은 불만 한마디 없이 아까부터 휴가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여기로 나오면 된단 거잖아요. 출퇴근도 내 맘대로 하면 되고. 음, 또 뭐 결재받을 일도 없고.”

“네…. 실장님.”

“철거가 언제랬지?”

“6월 16일입니다.”

“한 3개월 남았네. 이야, 뉴스 타서 유명해지고 3개월 휴가도 받고,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사자성어 뭐 있는데. 아, 생각났다. 존나씨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권태정이 싱긋 가볍게 웃으며 백 비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웃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말을 정말 농담처럼 말한 권태정이 어쩔 줄 모르는 백 비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여기 뭐 사무실 할 만한 건 있긴 해요?”

“아…. 전에 조합 사무실로 쓰던 컨테이너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거기를 임시 사무실로 쓰시면 좋을 것 같아서 청소를 해 두라고 하기는 했습니다.”

“컨테이너?”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권태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백 비서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영원히 쉴 수 있게 당장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적당히 타협을 해야 했다. 3개월 노는 대신 멀쩡한 사무실이 사라진 것 정도는 감수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뭐 일단 가 보기나 하죠.”

권태정은 백 비서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거두고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 불만스럽다는 듯 시트 뒤로 몸을 푹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깥은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또 지저분했다.

낡고 무너진 벽에는 여기저기 재개발 반대, 주민 탄압을 멈추라는 태성그룹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이 적혀 있었고, 또 군데군데 성적인 말들이 적혀 있기도 했다.

하여튼 씨발, 뇌가 섹스에 절여졌지. 아무 데나 섹스, 섹스. 권태정은 담장에 크게 쓰인 섹스라는 단어를 보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와, 저게 뭐야.”

낙서가 가득한 벽들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빨간 컨테이너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게 보였다. 권태정은 가볍게 주먹을 쥔 채 컨테이너가 보이는 창을 몇 번 두드렸다.

“설마 저거?”

“…네.”

“색이 왜 저래.”

“어디서든, 누가 보든 눈에 잘 뜨여야 한다고 저런 색으로 준비를 했답니다.”

“와, 저딴 색을 고른 이유도 있어? 아, 난 좀 밝고 환한 게 좋은데.”

“새 컨테이너 준비할까요?”

“됐어요. 색 마음에 안 든다고 멀쩡한 거 바꾸면 또 난리 날 거 아냐. 우리 회장님이 또 그런 거 엄청 싫어하시잖아요. 뭐 바꿀 이유가 있으면 몰라도.”

백 비서가 문을 열어 주기 전에 먼저 내린 권태정이 차에 기대어 새빨간 컨테이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 여기 확 불이나 질러 버릴까요? 불에 타 버리면 새 걸로 바꿔도 되잖아.”

“…네?”

권태정은 때때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들을 하고는 했다. 진담이라기에는 과하고,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진담 같아서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백 비서님 또 놀라신다. 농담이에요. 제가 설마 또 사고 치겠어요? 보복 운전으로 뉴스 탄 다음 날 방화로 뉴스 또 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권태정은 하얗게 질린 백 비서를 보고 웃으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권태정이 정말 여기 불을 지르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것을 아는 백 비서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은 더 후지네. 씨발, 소파 봐. 깡패 새끼들이 골랐나.”

컨테이너 안에는 큰 책상 두 개와 까만 사무용 의자 몇 개, 그리고 군데군데 가죽이 찢어진 소파와 요즘에도 저런 테이블을 쓰나 싶게 오래되어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불쾌함에 이어 불편함까지 숨기지 않은 권태정이 손을 들어 코를 가볍게 막으며 인상을 썼다.

“이 냄새는 또 뭐야.”

권태정은 무엇보다도 청결을 중요시했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난 이후 늘 깔끔을 떨고 살아서 그런지 이런 거, 그러니까 누군가가 함부로 쓰다가 두고 간 가구나 컨테이너 안에 밴 불쾌한 냄새 같은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윽, 씹.”

기분 잡친 티를 내며 컨테이너 밖으로 나간 권태정이 인상을 쓴 채 백 비서를 바라보았다.

“저 쓰레기 같은 데가 이제 내 사무실이라는 거네요?”

“…죄송합니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결정이 나는 바람에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내일까지 가구 전부 교체하고, 클리닝도 전부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더러운 건 못 참는 거 아시잖아요. 특히 저 담배 찌든 내랑 섞인 좆같은 냄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네. 완벽하게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차 뒷문을 열자 백 비서가 얼른 문을 잡았다. 권태정은 그대로 뒷자리에 다시 올라 시트 뒤로 몸을 무너뜨리듯 깊게 파묻었다. 그런 권태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요란하지 않게 문을 닫은 백 비서가 조수석에 올랐다.

“댁으로 모실까요?”

“네. 할 일도 없고, 자숙 중이니까 집에나 가야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권태정이 제 옆으로 놓인 파일과 태블릿PC를 무심하게 들어 올렸다.

“이건 뭐예요?”

“아, 다람동 재개발 건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정리해 둔 겁니다.”

“너무 많다.”

파일 안에 정리된 많은 서류들을 대충 넘기다가 금세 흥미를 잃은 권태정은 태블릿PC 화면을 켜 눈으로 훑었다. 그 안에도 딱히 재밌어 보이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내가 3개월 동안 할 일이 뭔데요? 여기 3개월 뒤에 철거한다면서요. 뭐 그럼 끝 아닌가?”

“파일 안에 제가 주민 리스트를 넣어 뒀는데 한 번 봐 주시겠습니까?”

“주민 리스트?”

파일로 들어가 주민 리스트라는 이름의 문서를 누른 권태정이 무심한 눈으로 나열된 주민들의 정보를 훑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아직 다람동에 남아 있는 주민 리스트입니다. 여덟 세대가 아직 남아 있는데요. 3개월 안에 모두 주민들이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 집이라도 남아 있으면 철거 진행에 차질이 생기니까요.”

“집 부서진다는데 결국 알아서 나가지 않겠어요?”

“그게…. 실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작년 11월에 <철거촌의 악몽>이라고 현장 르포 방송됐던 거 기억하실 겁니다.”

“음, 아…. 그거. 용역이 슈퍼 아저씨 팬 거.”

“네. 그때 다람동 철거촌 위주로 방송이 됐고, 폭력 사건까지 있어서…. 공사가 중단됐던 것도 기억하실 텐데요. 그 뒤로 보상할 부분 보상하고, 용역 업체 싹 없애고, 조심하면서 겨우 다시 철거 일자가 잡힌 거라 조금이라도 잡음이 생기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현재 언론의 시선이 그룹을 향해 있기도 해서….”

백 비서의 말을 듣던 권태정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백 비서와 정 기사가 잠시 권태정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우리 백 비서님이 너무 내 심기를 안 거스르려고 돌려 말하니까. 한마디로 겨우 잠잠해져서 철거일 다시 잡아 놨더니 내가 뉴스 타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단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더 사고 쳐서 시선 끌면 안 된다는 거고.”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사실인데. 아니, 그런데 백 비서님도 내가 참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 새끼가 먼저 내 차를 위협하고 튀었는데?”

권태정은 태블릿PC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태성그룹 삼남, 분노의 보복 운전!>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눌러 영상을 재생했다. 솔직히 제가 뭘 잘못해서 뭇매를 맞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먼저 깐족대며 제 슈퍼카를 위협한 건 찌질이였고, 저는 그 찌질이를 응징하러 30분 정도 쫓아갔을 뿐이었다. 세상은 그걸 보복 운전이라고 부른다는데 글쎄. 권태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죽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더 컸다.

“위협한 놈은 피해자고, 그대로 갚아 준 나는 가해자고? 재벌한테 그런 일 당해서 너무 무섭단 그 말 하나로 철거촌에 꼬라박힌 나도 억울한데?”

“솔직히 이번 일은 상대편 차주의 이야기에 너무 치우쳐 보도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이 자꾸 앞뒤 다른 인터뷰를 해 대서 여론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실장님의 억울한 입장을 아는 분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잠잠해질 것 같습니다.”

백 비서의 말에 창밖에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조수석 헤드레스트를 바라본 권태정이 웃음 지었다.

“그래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은 역시 우리 백 비서님밖에 없네요.”

“저, 저도 있습니다. 실장님!”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같은 의견임을 피력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영상 재생을 멈췄다. 저에 대해 지껄이던 기자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차 안이 고요해졌다.

“우리 정 기사님도 내 마음 알아주는구나.”

“그럼요! 제가 실장님 모신지도 벌써 3년인데요.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특히 어제 일은 진짜 편파적인 보도였고…. 상대 차주 그놈 딱 봐도 양아치던데 언론이 그런 놈한테 놀아나서는…. 진짜 제대로 된 사람들은 그거 하나도 안 믿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실장님!”

“고마워요, 정 기사님.”

정 기사의 커다란 목소리에 웃은 권태정이 뒷머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더 푹 기대고 다시 주민 리스트를 휙휙 넘겼다.

“하시던 말씀 계속하세요. 백 비서님.”

“아…. 네. 지금 상황으로는 언론에 책잡힐 수 있는 일은 조금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현장 르포 방송에 나갔던 슈퍼를 운영하던 주민분의 경우에는 보상을 받으신 뒤 현재 이주를 하신 상태라 걱정할 일이 없는데요.”

“아, 그 용역이랑 싸운 아저씨는 철거촌 나갔어요?”

“네. 두 달 전쯤 나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문제없지 않나. 다른 주민들도 여기 철거한다면 나갈 거 아니에요. 그냥 평화롭게 알아서 나가게 두면 되지.”

페이지가 더 넘어가지 않을 때까지 넘긴 권태정은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주민의 증명사진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본 주민들과 달리 굉장히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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