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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109)화 (109/115)

109화

한참이 지나서야 서준호가 생사를 오가고 있다는 내용을 인지했다. 괴물의 습격에 휘말려 중상을 입고 중독도 된 상태라고.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비교적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발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주방에서 걸어 나오던 심태성이 나를 불렀다. 아마 창백하게 질렸을 내 얼굴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순식간에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 쥔다.

“왜 그러십니까. 얹히시기라도…….”

“……경호원님.”

심태성은 내 시선이 꽂혀 있는 화면을 돌아보았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입을 다문다. 심태성도 서준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테다. 생일 파티에 동행했었으니까. 나는 심태성의 팔뚝을 붙잡았다.

“많이 다쳤나 봐요.”

“…….”

“죽을지도 모른대요.”

침착하자. 왜 이렇게 동요해.

“얼굴…… 보러 가면 안 될까요?”

그래도 차은수로 태어난 이후 어린 시절부터 어울렸던 상대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사귀었지만, 개중 서준호는 망설임 없이 친구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생명이 위험하다는데 살아 있을 때 만나 보고 싶은 건 당연했다.

심태성은 말을 고르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아시잖습니까. 저분은 도련님을 모릅니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꾸하는 심태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화를 나눌 만한 상태도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이라도 딱 한 번만 잡아 주고 싶어요.”

울컥 올라온 슬픔을 삼키는 눈이 뜨끈하게 달았다.

“경호원님…….”

온갖 부탁하는 단어들을 쏟아 내고 싶지만, 목이 꽉 메서 간곡히 부르는 것밖에는 못 하겠다는 듯 심태성을 불렀다. 나를 내보내 주든 네 능력을 빌려주든, 서준호에게 갈 수 있도록 어떻게든 좀 도와 달라는 의미였다.

얼굴을 들었다. 심태성은 석상처럼 굳은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들어주고 싶지만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 고통을 느끼는 표정이다. 생각보다 그 거절 의사가 뚜렷해 보여서,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이상하진 않다. 장희강에게 가는 것을 도왔다가 그대로 나와 헤어졌던 만큼, 어딘가로 데려가 달라는 내 부탁에 대해 트라우마라도 생겼을지 모를 일이지. 그냥 나를 외부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만일의 위험에 대비해서.

그래도 잠깐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남들 눈 피하는 건 사실 일도 아닐 테고. 내가 너희 떠난 것도 고의가 아니었다니까? 우리 조금은 프리하게 갈 수 있지 않아?

생각들이 조급하게 엉키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심태성의 입에서는 내가 기대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 사과봇이…….

그러잖아도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좌절감마저 들었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시발, 답답하네.

“도련님을 이곳에 모시기 전까지 매일같이 악몽을 꿨습니다.”

심태성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말했다. 나는 흠칫했다.

“저는 이제 도련님을 철저히 지키고 싶습니다.”

어깨를 쥐고 있던 커다란 두 손이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심태성은 내 차가운 손등에 얼굴을 묻어 왔다.

“…….”

철저히 가둬두고 싶은 거겠지.

확고히 거절하는 주제에, 동정심을 유발하는 저자세였다. 겨우 마음 한 자락을 녹였다고 생각했는데 미움을 받을까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꽉 다문 입에서, 나 못지않은 슬픔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머릿속을 가렸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으로 심태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어차피 내가 서준호한테 가 봤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의식이 있는지도 모르겠는 녀석을 붙들고 정신 차리라고 주절거리는 일밖에 없겠지. 권능 같은 건 당장 쓰지도 못하는데.

이건 시발, 무슨 적응 기간이 이렇게 길어. 필요할 때 쓰지도 못하고. 존나 도움이 안 되네.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다스리고자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찰나였다.

띠링!

[시스템 동기화 완료]
[보조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관리자의 의사에 따라 소통이 가능합니다.]

어……?

심태성의 머리 위로 나타난 창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심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죄송한데, 혼자 있고 싶네요.”

“…….”

심태성이 머뭇거리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축 처진 곰 같은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우선순위가 달랐다.

심태성을 뒤로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창의 위치가 깜빡이며 내 앞으로 변경되었다.

관리자는 나를 말하는 것 같고……. 내 의사대로 보조 시스템이란 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가?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건조하고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새로운 관리자님, 반갑습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다. 추가적으로 생성된 창에는 목소리가 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는 관리자님께서 권능을 원활히 사용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보조 시스템 ‘블루’입니다.]

이름도 있네. 나는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두드렸다. 원활한 사용을 돕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관리자님이 내리시는 명령을 수행합니다.]

……아무래도 설명을 길게 하지는 않는 편인 듯했다. 하긴, 뭐든 직접 경험해 봐야 알지. 메시지와 방문을 번갈아 보다가 문고리를 가리켰다. 잠가 봐.

딸깍.

별다른 대답도 없이 문고리가 잠겼다.

“…….”

내가 시켜 놓고도 어쩐지 섬뜩해졌다.

아니, 아니지. 유능한 만능 비서가 생긴 셈이잖아. 매개체를 이용해 머릿속으로 지시만 하면서 능력을 휘두르는 거니까, 얼마나 단순하고 편해.

근데 시스템이 남은 권능이 엄청 적다고 하지 않았던가. 범용성이 높고 대단한 능력들을 쓸 수 있다고는 해도, 혹시 서준호를 치료하기에는 권능이 부족한 건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패널티가 심각하다든지…….

[권능의 사용 범위와 한계는 관리자로서의 역량 즉, 권능의 보유량에 따라 정해집니다.]
[‘서준호’에 대한 치료를 현재 상태 기준으로 1,968,351,472회 반복 시, 보유 중이신 권능이 전부 소모됩니다.]

전혀 문제없으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녀석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이 차오르면서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남한테 들키느니 마느니 이런저런 상황을 따지기보다, 일단 서준호를 찾아가서 치료부터 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서준호’의 위치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내 사고를 읽은 보조 시스템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뭐?

[관리자는 관리 영역에 속하는 어느 곳으로든 즉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

심태성은 홀로 소파에 앉아 주먹 쥔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친구였던 이를 걱정하는 차은수의 면전에 대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결코 자유를 주지 않겠다고 통보한 행태는…… 스스로가 돌이켜 보아도 비인간적이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에스퍼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차은수가 얼마나 상심하고 실망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방에 들어간 그는 무척 조용했고, 어제 가이딩을 양껏 받아 무뎌진 심태성의 기감은 차은수가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차은수는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간혹 잠을 자고는 했다.

“후우…….”

일자로 다물렸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파장이 더없이 완벽한 상태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악몽이라느니, 뭐라느니 약한 소리만큼은 구태여 꺼내지 말 것을.

하지만 단언컨대 거짓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잠이 들 때마다 찾아들었던 악몽은 기존의 불면을 더욱 지독하게 만들었었다. 악몽 속에서 심태성의 시간은 언제나 차은수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날에 멈추어 있었다.

폭주가 시작되려던 장희강은 이 세계의 괴물보다도 더 괴물 같았다. 방어가 전혀 의미 없던 공격에 당한 자신은 한심하게도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다. 일시적으로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어,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간신히 희미하게나마 돌아왔을 때는 절망적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쓰러져 있던 차은혁. 주저앉아 있던 차은수.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던 장희강.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장면에 머릿속에서는 차은수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는 의지만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흐름과 신체의 움직임은 아주 둔했고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미동하는 것이 끝이었다.

그 움직임마저 눈치챈 장희강이 저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차은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손가락 하나로도 죽임당할 수 있는 약한 가이드가 에스퍼를 지키기 위해서 이성이 없는 에스퍼에게 덤볐다. 끌어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접촉이야말로 차은수의 능력이었다.

이후 폭풍 전야처럼 고요해진 장희강이 차은수를 안아 들고 등을 돌려 사라지던 순간은, 자신이 기필코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어야 했을 타이밍이었다. 무력하게 손이나 뻗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것이 아니라.

못난 과거이자 악몽의 초점은 차은수를 빼앗은 장희강에게 맞추어진 게 아니었다. 빼앗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욕심을 부려 홀로 차은수를 지킬 수 있다고 과신했던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기도 했다.

“…….”

차은수의 실의에 영향이라도 받은 듯 한없이 어두운 기억과 감정을 되새기던 심태성이 흘끗 시선을 옮겼다. 창밖으로 노을빛에 물든 하늘이 보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조용히 차은수의 침실로 걸어갔다.

“도련님.”

작은 노크와 함께 차은수를 불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잠이 든 듯했다.

저녁을 준비하기 전에 그 모습을 한번 확인하기 위해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멈칫하고 말았다.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차은수를 데려온 이래 단 한 번도 없던 경우에 표정이 굳은 심태성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문 너머에서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콰드득! 그는 가차 없이 문고리를 움켜쥐어 부수고 내부로 들어갔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방이 그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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