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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94)화 (94/115)

94화

사람의 정신은 반복적인 충격을 입게 되면 부서지기 마련이다.

주청경도 차은수가 얼마나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도주한다고 도주했지만, 결국 다시 붙잡혀 혹독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장희강이라면 제 가이드에게도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을 테니, 차은수를 향한 집착이 상당히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고.

이후에는 차은혁과 꽤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 애절하게 그를 찾던 차은수의 꼴은 실로 무지하고 가여웠다. 버림받았다고 생각 중인 게 확실한 현재의 모습이야 더할 나위 없었다.

주청경은 자신의 품에서 허물어진 채 울고 있는 차은수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동요시킬 목적으로 그가 좋아한다는 음식을 준비했더니, 의외롭게도 바로 제 처지를 알아차린 듯했다. 어쩌면 애초부터 차은혁에게 신뢰와 의혹을 함께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래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길들여 갈 생각이었는데.

아쉬우면서도 나쁘지 않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청경은 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따뜻한 피부와 물기가 느껴졌다. 일그러져도 고운 얼굴에는 나락에 떨어진 이 특유의 괴로움이 가득했다.

“은수 씨.”

“……나 때문에.”

차은수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듯 허공에 고정된 눈동자에서는, 좌절감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결과물이 계속해서 샘솟고 추락했다.

“내가 무책임하게 굴어서……. 그래서…….”

차은혁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마 갑작스레 떠나 버렸던 자신에게 분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고. 무언가 굉장히 억지스럽게라도 이해하려는 태도였다.

차라리 스스로를 탓해야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이 자기 파괴적인 방어까지도 예상했을 차은혁을 떠올리며, 주청경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욕심 많은 위선자는 정말 질색이었다.

“그래서요.”

엄지 끝으로 차은수의 푹 젖은 속눈썹을 어루만졌다. 차은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낯설지 않은 공허한 눈빛이었다.

상대의 내면이 산산조각 나기 직전임을 알면서도 양보는 없었다. 안타깝게 여기기에는, 자신이 차은수를 지나치게 욕망했다.

“은수 씨 상황을 달게 받아들일 마음이라도 듭니까?”

“…….”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주청경이 냉한 어조로 물었다.

차은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맨살이 드러나 있던 허벅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고개 드세요.”

그 모습이 마음에 들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주청경은 가슴이 따끔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이내, 힘없이 고개를 든 차은수와 눈을 마주했다.

“잘 들어요.”

신경질적인 듯하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운 손길이 차은수의 목덜미를 쥐었다.

“앞으로의 규칙을 정할 생각입니다. 아주 간단해요.”

“…….”

“절대로, 조금도 거부하지 말 것.”

지독한 집착이 깔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눈이든 접촉이든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

장희강에게 벌을 받았던 일이 떠오른 차은수의 낯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청경은 자못 유쾌한 상상을 떠올렸다는 듯이 제 턱을 문질렀다.

“그편도 내 입장에서는 꽤 괜찮겠네요. 난 우리 은수 씨 예쁘게 꾸민 상태로 있는 편도 좋거든.”

뭔……. 설마 여장 말하는 건가?

차은수는 원피스를 입은 채로 지냈던 당시를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인지 뉘앙스가……. 이번에는 원피스 선에서 끝나지 않을 듯한 뉘앙스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적색 섞인 흑안이 창살을 흘끗했다.

“만약 은수 씨가 기특하게 굴면, 반대로 상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이는 철창 안에서 꺼내 주겠다는 암시와도 같았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차은수는 이곳에서 나갈 테니까.

주청경이 서늘한 눈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

차은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겼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몸 상태와 다르게 기분은 밑바닥을 찍고 있었다.

잠든 동생을 제 손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예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여태껏 겪어 온 어떤 고난도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장희강처럼 아예 자리를 비우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하시죠.’

살의를 억누르고 있던 제게 주청경이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드르륵. 직원이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어 주었다.

차은혁은 신발을 벗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차은혁 협회장님?”

정장을 차려입은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른 체격에 볼이 홀쭉한 남자였다.

“예.”

“반갑습니다. 유석헌 의원님을 보좌하고 있는 김민성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휴가 중이셨다고 들었는데 염치없이 연락드렸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침 복귀하려던 차여서.”

“그러셨군요. 아, 음식은 미리 주문해 두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차은혁은 한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테이블을 흘끗했다.

“……식사는 나중으로 하고, 용건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불편한 심기를 갈무리한 흑안이 김민성을 응시했다.

“꾸준히 연락을 주실 만큼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여태 다른 S급들은 물론이고 차은혁 역시 이런 자리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변덕스레 응한 것은, 사실상 낌새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정부와 에스퍼 협회의 관계는 실제로 그리 좋지 않았다. 협회장 중 두 명이 누구인지 고려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료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는 협회의 지휘권을 얻고자 하고, 협회는 그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쪽에서 대놓고 협회를 적대하거나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괴물을 처치해 인류의 생존을 돕는 에스퍼들은 국력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이 모인 협회를 수중에 넣겠답시고 세력이 약화하게끔 위신을 실추시키기라도 한다면, 이는 국가의 힘과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정부는 그와 같은 방향을 벗어난 방법으로 두 가지를 택했다. 언론을 이용해 그럴싸한 논리로 협회가 정부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넓히는 것. 또 하나는 협회장들의 약점을 은밀히 캐내고자 노력하는 것.

이에 맞서기 위해 협회의 정보력과 이슈 대응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세간에서는 협회가 다소 예민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차은혁은, 눈앞의 상대가 소속된 기관이 어떤 식으로든 차은수의 존재를 눈치챘을 상황을 경계했다. 만일의 경우란 언제나 존재했으니까. 매사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

김민성은 밥을 먹지도 않고 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전혀 아니었다.

과장을 약간 보태서, 괴물을 당면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마치 사람이 아닌 존재를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일말의 감정도 없는 저 얼굴은…… 단순히 냉정해 보였다면 이보다는 덜 두려웠을 테다.

“우선.”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의원님 자리를 제가 대신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쉘터 증설 건으로 긴급히 가 보셔야 하는 곳이 생기셔서…….”

“쉘터 말입니까.”

“예. 곧 발표 계획이 있습니다. 가족분들께 따로 전해 들은 말씀이 없으신가 보군요.”

용기를 내어 슬쩍 떠보았다. 휴가 기간 내내 가족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 무얼 했느냐는 의미였다. 기감이 뛰어난 S급들의 사저까지는 세밀히 감시할 수 없었기에, 정부는 장희강도 차은혁도 각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사실 정도만 파악하고 있었다.

차은혁은 말없이 김민성을 응시했다. 고작 침묵하는 것일 뿐인데도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김민성은 그가 대꾸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습률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대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민심도 대단히 좋지 않고요.”

“…….”

“저 같은 일반인이 다 그렇습니다. 협회장님처럼 훌륭한 에스퍼분들에게 목숨을 맡기고 사는 처지죠. 그래서 더 불안에 떨고, 에스퍼분들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것 같습니다.”

본론이었다.

“특히……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협회장님들께 등급이 맞는 가이드가 없다는 사실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김민성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장 힘써 주시는 분들이기도 하고요.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하고 계실 텐데, 몸 상태가 어떠실지 많이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이딩을 잘 받은 에스퍼들이라도 괴물을 상대하다가 능력 조절에 실패해 폭주하는 경우가 종종 존재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그 피해는 괴물이 남기는 피해 못지않았다.

하물며 매칭 가이드가 없는 최상위 에스퍼들의 폭주라면, 얼마나 거대한 재앙일지……. 과거의 사례에 근거해 수많은 사람이 그 시기를 가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희 측에서 파장 검사를 받아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김민성은 차은혁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럼 해당 결과를 토대로 여러분의 건재함을 알리고, 불안한 정세를 다독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정부 공언이 신뢰가 가지 않겠습니까.”

“…….”

“물론 결과가 좋게 나오실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내용을…….”

좋은 의도로 협조를 요청하는 척하고 있지만, S급들이 언제든 폭주할 수 있다는 확실한 결과물을 손에 쥐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 속셈을 모르지 않는 차은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그가 공직자로서 의무적인 검사를 받아야 했던 과거가 아니었다. 차은수 덕에 나아진 파장을 들키지 않고자 노력했던 당시의 세계와는 달랐다.

방금 받은 제안 따위는 곧바로 거절할 권력이 지금의 그에게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예?”

“협회 소속 에스퍼들에게 파장 검사를 명령하는 일은, 법적으로 협회장들의 소관입니다. 본인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검사 결과의 열람과 보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민성은 부정했다.

“명령이 아닙니다, 협회장님. 부탁드리는 겁니다.”

“전혀 부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만.”

차은혁이 건조하게 받아쳤다.

“말씀대로 괴물의 습격이 늘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쓸 부분이 에스퍼들의 폭주겠습니까.”

“…….”

“바쁘시다면서…… 쓸데없는 알력 조성은 원치 않는다고, 그렇게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젓가락질 한 번 하지 않은 채로 일어난 차은혁이 등을 돌렸다.

한심한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염두에 두었던 점은 발견할 수 없었기에, 딱히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는 그대로 룸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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