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1부 완결)
한 송이, 두 송이.
드문드문 떨어지기 시작한 눈이, 이윽고 펑펑 내렸다.
행인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거나 옷을 털며 길을 걸었다. 금세 건물과 땅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병실의 침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과는 대조적인 색채의 눈발이, 퍽 운치 있었다.
“어우, 눈 많이 온다.”
“올해 첫눈 아니에요? 예쁘다.”
바깥의 복도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남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회진 시간이었다.
똑똑,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은수 님.”
“네.”
짧게 대답하자 문이 달칵 열렸다. 그 틈으로 우르르 들어온 의료진이 병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좀 어떠세요? 오늘도 운동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는데.”
담당의가 말 잘 듣는 착한 환자를 대할 때 특유의 흐뭇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물었다. 이은수는 미소를 지었다.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 그를 보며 의료진 대부분은 생각했다. 몇 달 전 옥상에서 떨어지고도 목숨을 건진 사람치고는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기적적으로 중간층의 구조물에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 높은 사망 확률을 뚫고 생존한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직후를 제외하고는 울지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지도 않는 환자의 모습에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태를 체크하는 대화가 오가고, 불편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호출하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의료진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홀로 남은 이은수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
실제로 그에게는 추락 사고의 트라우마가 딱히 남지 않았다.
병실이 고층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밖을 내다보아도 아무렇지 않았고, 병원의 공중 정원에도 곧잘 올라가 산책을 하다 내려오고는 했다.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겨 찾아오는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을 보이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다소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우선, 회복이 더디게만 느껴지는 몸이 사뭇 힘겨웠고…….
그리고 또 하나는, 혼란이었다.
분명 누군가로부터 칼에 찔린 상태로 추락했는데, 깨어난 후에 몸을 살펴보자 그러한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말이나 되는 일인가?
수술을 집도한 의사에게 혹시 가슴 부근에 자상이 없었냐고 물었는데 전혀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번을 되풀이해 질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리 치료를 권하는 말이 덧붙은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당시 병원을 비롯해 그를 취재하고자 찾아온 기자들, 심지어 회사 측에서도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잖아도 기억에 혼선이 일어 당황스러웠던 이은수는, 그들 모두에게 야간 근무 도중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뎠다고 둘러대느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만약 회사 옥상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더라면, 진작 밝혀졌을 일인데.
아니.
가슴에 찔린 상처가 없잖아.
과연 CCTV가 있었더라도 내가 찔리는 장면이 나타났을까.
그러한 의문과 혼란에 휩싸인 채 병원에서 생활해 온 이은수는, 사실 현재 반쯤은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경을 헤맬 때 꾸었던 의미 없는 꿈일지도 모르고.
그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십대로 보이는 소년이 피곤한 기색으로 발을 들였다. 막 현관으로 나오던 어린아이가 소년을 보고 멀리서부터 달려온다.
‘형!’
소년은 끝까지 기다렸다가, 지척에 도달한 아이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었다. 장밋빛으로 물든 채 한껏 올라간 통통한 볼이 퍽 사랑스러웠다. 소년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갈색 눈동자를 소중히 마주 보았다.
‘어디 가려고.’
‘형 올 때 됐으니까.’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도 또박또박 대답하며 배시시 웃었다. 소년은 피로가 가신 얼굴로 동생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다는 듯 까르르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제는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며 집 안으로 향했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다 자란 형제의 모습이었다. 햇살이 들이치는 방에서, 무릎을 꿇은 남자가 동생을 향해 말했다.
‘나는 네 결정을 거부할 수 없어.’
‘…….’
‘그러니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다면 말해.’
복합적인 감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묻는다.
‘정말 내 가이드로 살아가 줄 수 있겠어?’
놀란 표정의 동생이 입술을 달싹거릴 때.
……다시, 장면이 전환되었다.
밤바다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형제 중 동생이었던 쪽과, 짧게 친 헤어스타일을 한 거구의 남자였다.
‘도련님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진중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제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끌어안은 상대를 향해 절절한 감정을 전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마른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뜨거운 숨결을 내뿜는다.
‘도련님과 함께할 수 없다면 저는 살아 숨 쉴 필요가 없습니다.’
‘……경호원님.’
조심스러운 손길이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머지않아, 입술을 겹치는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어으…….”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쿵쿵거리는 두통에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뚝뚝 끊기는 필름 같은 꿈을 꾸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였다. 한참 지내던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재활 치료가 끝난 지금 이 시점까지. 잊을 만하면 계속해서 꾸고 있었다.
꿈들의 공통점은, 옅은 갈색 머리를 지닌 남자가 무조건 나온다는 것.
오늘 꿈에 나온 형제 중 동생이었던 쪽 말이다.
가끔 불리는 그의 이름은 나와 같은 은수였다. 성씨만 다른, 차은수.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직후까지, 그가 겪은 일들이 시간대가 뒤죽박죽인 채로 나타났다.
심지어 섹스하는 장면 역시 몇 차례 나왔다. 딱히 욕구 불만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차은수의 상대는 전부 남자였고, 짤막짤막하게만 보았지만…… 하나같이 무척 격정적이었다.
“…….”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실존하지도 않는 인물들의 몽중 정사란……. 내 취향이기는 하나 퍽 기이한 것이었다. 매일 꾸는 것은 아니어도, 나오던 이들이 계속 나오는 꿈이기 때문에 솔직히 섬뜩했다. 무엇보다 꿈을 꾸고 나면 그날 컨디션은 최악이기도 하고.
작년에는 버티다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 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아.”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뱉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붙이고 일어서자, 이제는 머릿속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당장 시급한 두통약을 더듬더듬 찾아 먹었다.
식탁에 앉아 이마를 부여잡고 있던 때였다.
투둑, 투두둑, 무언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거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가 보였다. 하늘이 시커멨다.
방금까지는 눈이 부실 만큼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는데.
일기 예보에서는 오늘은 물론이고 이번 주 내내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고 했다. 뭐……. 원래부터 관측이 항상 맞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잠깐 오다 말 소나기라 여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안 좋아도, 설령 날씨가 쭉 구릴지라도 직장인은 출근을 해야만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씻었다. 세안을 하다가 거울로 본 얼굴은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그리고…….
“……!”
한순간, 내 얼굴 위로 굉장히 수려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로 구슬처럼 반짝이는 연갈색 눈동자.
차은수였다.
황급히 고개를 털었다.
시발,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도 헛걸 보네.
눈을 힘껏 감았다가 떴다. 그 몇 초 동안 설마 그대로일까, 하고 떨리는 심정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돌아온 원래의 내 모습에, 숨이 탁 트였다.
이후에는 찝찝하고 선득한 기분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모든 게 좋지 않았다. 몸 상태도, 정신 상태도. 그리고 날씨도.
집을 나서니 밖은 그새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치기는커녕 아까보다 더욱 미친 듯이 내리는 장대비 탓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겪은 빗줄기 중에 가장 강력했다. 이럴 때 차를 몰았다가는 도보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 뻔하기에, 우산을 쓴 채 인근 역 방향으로 걸었다.
육교 하나를 거쳐 내려와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비가 그쳤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뚝 그친 비에 의아해져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하늘을 보기도 전에 건너편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회색 슈트를 입은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잘생긴 얼굴은 청년이라기에는 연륜이 있고, 중년이라기에는 애매해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를 낯익다고 여긴 나는,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많이 컸구나.’
숨을 들이켰다.
‘그때도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더해.’
맞아.
분명해.
꿈속에 나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심장이 쿵쿵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눈까지 아플 정도의 빌어먹을 두통이 재차 뇌를 조여 왔다.
바로 그 찰나, 버스가 소음을 퍼뜨리며 달려와 우리 사이를 스쳤다.
“…….”
저 남자는 환상이다.
나는 욕실에서 짧게 헛것을 보았던 것처럼,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여겼다.
그저 환시 같은 것에 불과해, 버스가 사라진 직후에 더는 그가 없으리라고.
……이윽고 버스로 인해 가려졌던 건너편이 드러났다.
내가 확신한 대로 건너편의 남자는 감쪽같이 없어진 상태였다.
멎었던 숨을 터뜨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쯤 되니 실로 억울해졌다.
내가 무슨 마약을 한 것도 아니고, 왜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리다 환각 따위나 겪고 있는 것인지. 큰 사고를 겪은 부작용이라기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 않나.
하지만 억울해할 틈도 없이 신호가 바뀌었다.
반사적으로 전신에 들어갔던 긴장이 쭉 풀려, 지친 손놀림으로 우산을 접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뒤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팔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내가 먼저 찾았네.”
듣기만 해도 전율이 이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환청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겨우 다시 만났었는데.”
열기 어린 입술이 뺨을 훑었다.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됐지. 안 그래?”
얼어붙은 내 손에서 우산이 떨어졌다.
그리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