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0)

순간 수화기 너머가 정적에 휩싸인다. 

“무슨 이상한 약을 먹은 것 같다는데. 병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인우의 물음에 잠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쌍둥이 중 누군지 모를 한명이 더듬거리며 말한다.

“...병원은 안가도 되고... 일단... 약기운만 빼면 된다.. 제길. 원래 규형인 그런 거 절대 안먹는데... 어떤 정신나간 X가.. 아. 미안.”

반장에게는 늘 정중한 쌍둥이들이다.

“아무튼 규형을 잘 부탁해.”

라며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는 쌍둥이 중 누군지 모를 한명. 인우는 어이가 없었다. 이봐. 약기운을 어떻게 빼는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

  

“차규형.”

“...응..”

아직 정신이 있는 듯했다. 인우는 자신의 몸을 필사적으로(?) 덮치고 있는 규형에게 물었다.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가서 내가 물이라도 떠올까?”

인우의 말에 갑자기 규형이 입을 맞춘다. 키스야 늘 하던거지만 너무 다급하게 입맞춤을 해오는 녀석이 낯설어서 인우는 고개를 마구 젓는다.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니까!”

규형이 괴로운듯 숨을 가쁘게 쉬었다.

“...널 안으면 돼.”

인우의 얼굴이 순간 바싹 얼었다.

“저..정말 괜찮냐...”

“안하면 아프다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

규형과 인우는 현재 알몸 상태였다. 인우는 규형을 벗겨놓고 보니 확실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규형의 물건 사이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우다...(자부할것 까지야 없지만) 저런 상태는 처음이다. 저러다가 터지는 거 아냐....라는 어이없는 생각에 인우마저 겁에 질린다. 물건을 저렇게 만들어버리는 약이 있다니..도저히 어디다 쓰는 용도인지 알 수 없다. 여튼 인우는 얼른 규형을 구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황급히 옷을 벗어 차규형이 꿈에도 그리던 자세를 취한다. 이 상황이 되어서 오히려 뒤로 물러나는 것은 규형이었다.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괜찮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든지 할 수 있던 기회가 있었지만 반장은 싫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잘 알고 있다. 약 때문에 괴로워 인우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불안한 것이다. 이 반장놈이 나중에 어떤 보복을 할지 모른다. 

“얼른 안하면 나 집에 간다.”

인우의 말에 규형은 곧바로 인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친다. 인우는 알몸으로 규형의 침대에 엎드려 있던 상태였다. 규형은 열이 나서 정신이 없었고 인우를 다정하게 만져줄 수도 오랜 시간을 들일 수도 없었다. 곧바로 인우의 애널 위에 로션을 바르고 바로 삽입에 들어갔다.

“....흐읏....”

“...하아...”

규형의 페니스가 인우의 몸안으로 힘겹게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넣었으니 무척이나 아플텐데 신음한번 없는 반장이었다. 인우는 지금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반장은 무척이나 강한 녀석이다. 규형은 인우의 몸 안에 깊이 자신을 묻고 조금 숨을 돌렸다.

“.....아프냐..”

귓가에 속삭이자 인우가 답해온다.

“조금.”

규형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그리고 겹쳐진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앞으로...앞으로..밀려오는 흥분에 맞추어 밀어 붙인다. 허리가 흔들리면서 심장도 뇌도 모든 것이 흔들린다. 쾅쾅거리며 망치로 심장을 부수듯 격정은 온몸을 잠식해 간다. 규형의 팔이 인우의 허리를 고쳐 잡았고 인우는 찌를 듯한 아픔의 끝에 느껴지는 묘한 쾌감에 저절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규형이 신음했다. 그게 좋아서 계속 움직여본다. 차규형 죽으려고 한다. 인우는 웃었다. 녀석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팔을 뒤로 뻗어 규형의 손을 잡아 당겼다.

“...자세 좀..”

그 말에 규형은 인우를 바로 눕혀주었다. 얼굴이 보여서 좋았다. 인우는 규형이 자신의 몸 안에 정신없이 밀어 닥칠 때 짓는 섹시한 표정이 좋았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인우는 자신도 모르게 연결된 부분에 힘을 주었다. 헉하며 규형이 인우에게 쏟아졌다. 왠지 귀여워서 인우는 녀석을 안았다. 잠시 헉헉대더니 곧 다시 부활한다. 약기운이란 거 정말 대단하다. 그날 규형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인우의 안에 사정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미안하다.”

“뭐가.”

“.....졸업하기 전엔 싫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잖냐.”

풀죽은 규형을 꽉 안아주었다. 입도 맞추어 준다. 세상에 어느 누가 풀죽은 차규형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인우는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이 레어한 표정과 제법 싫지 않았던 방금 전 행위에 만족했다. 

“대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라. 날 위해서.”

인우는 규형의 귓가에 속삭였다. 규형은 알았다며 힘껏 자신의 반장을 끌어안았다.

“나도 널 위해서 더 열심히 살도록 하마.”

조인우는 이런 인간이라 거역 할 수가 없다...라고 규형은 생각했다. 그 후에 ‘약? 그거 그냥 손으로 몇 번해서 해결하면 되잖아’라고 너무도 가볍게 말한 안병욱의 만행에 차규형 이하 쌍둥이들까지 모조리 조인우에게 절교 당하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다.    

그렇게 조인우는 2학년이 되었다. 서로에게 책임지기로 결심한 규형과 인우의 관계가 서로의 가족들에게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처음 들통 난 것은 뒤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인우의 작은형이 의심하여 물어온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세탁물에서 콘돔을 발견한 큰형이 기겁을 하게 된 일이었다. 그 일로 인우는 큰형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큰형도 작은 형도 남자 애인을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쇼크를 먹었다. 물론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우가 쇼크를 먹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특히 작은형이 자신에게 그것을 숨겼다는 것이 엄청난 배신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늘 자신에게 자상했던 작은 형이 큰형과 동생 사이에서 아픈 방황을 했어야 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배신감은 다른 믿음으로 대체 되었다. 

그 다음 들킨 것은 쌍둥이들에게였다. 물론 쌍둥이들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는 했지만 인우에게 그것은 한동안 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짐승 같은 차규형이 학교 화학실에서 덥쳐 왔는데 그 전 시간부터 구석에서 자고 있던 정신에게 들켰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규형의 아버지가 알게 되셨다. 규형을 무척이나 사랑하신다는 아버님은 무서운 일을 하시는 분 답지 않게 소탈하셨고 경쾌한 사상을 가진 분이셨다. 정식으로 소개받은 자리에서 ‘니 에미가 너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여자에게 정붙일 수는 없었겠지..’하며 아들이 남자를 애인이라고 데려온 것에 대한 씁쓸함을 표시하셨지만 곧바로 ‘니가 바로 우리 규형이를 인텔리 조폭으로 만들겠다고 나선 놈이구나!’라며 엄청 반가워 하셨다.       

     

“...경우야... 시골에 내려가야겠다.”

용우가 직장을 다닌 지 3년차가 되고, 경우가 대학에 복학한지 두 학기가 채 되지 않았으며, 인우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를 맞이하던 어느 가을. 용우의 직장으로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로부터였다. 형이 전화를 걸어 시골에 가야겠다고 한 말을 듣고 경우는 직감적으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며칠 전부터 내내 상태가 좋지 않으시던 어머니를 지켜보던 병원에서 결국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었다. 

경우는 형이나 동생보다 자신이 가장 시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먼저 시골에 내려가겠다고 형에게 말해두었다. 경우는 침착했다. 형의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떨림은 경우를 더욱 침착하고 냉정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과사무실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도 전화를 남겼다. 휴대폰으로 기차시간을 알아보며 캠퍼스를 빠져나가는데 함께 점심을 먹었는지 닥희와 유신이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경우는 유신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경우선배애애~! 어딜 그렇게 바쁘게 뛰어 가요?”

“그러게. 아까는 전화도 안받더니?”

유신이 조금 토라진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경우는 유신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심호흡을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미안.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아서. 지금 시골로 내려간다. 못 만나고 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

경우의 말에 순간 닥희와 유신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경우는 괜찮다며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만일 상황이 안 좋게 된다면 전화 할테니 휴대폰 켜놓으라고 유신에게 일러둔다. 

“선배. 조심해서 가요. 마음 급하다고 주위도 안보고 가시면 안돼요.”

닥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1학년 때의 그 왈가닥이 아니었다. 경우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이놈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인지 갑갑한 얼굴이다. 녀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경우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큰길까지 걸어 나와 택시를 잡았는데 갑자기 유신이 택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유신아?!”

“하아..하아..”

급하게 뛰었는지 숨을 몰아쉬던 녀석은 택시기사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갑자기 경우의 목을 와락 끌어안는다. 하긴 어딜 가도 유신과 경우는 한 쌍의 잘 어울리는 남녀(?)커플이다.

"개XX! 그러고 가면 어떡하냐! XX!! XX 걱정 돼서 나보고 어떻게 기다리라고! 차라리 따라가고 말지. 너 혼자 슬퍼하고 있는거 계속 상상 돼서 속 터질 것만 같단 말야! XX!"

물론 이유신이 입을 열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경우는 불안으로 싸늘해져 있는 자신의 심장에 이유신의 따뜻한 심장이 겹쳐져서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어쩔 때는 마냥 애같아 보이는 유신이 이럴 때는 고맙고 의지가 된다. 

“그런 이유로 조퇴 하겠습니다. 선생님.”

“세상에.. 이를 어쩌니. 집으로 일단 가는 거야?”

“아닙니다. 교문 앞으로 큰형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합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학교일은 선생님에게 맡기거라.”

“감사합니다.”

평소보다 더욱 딱딱한 말투와 창백해진 얼굴로 인우는 교무실을 나왔다. 교무실 밖에서 중건과 현기가 잔뜩 굳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은 가방 챙겨왔다.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지 몰라서. 두고 가도 내가 챙겨줄게.”

“아. 고마워. 가져갈게.”

인우는 중건이 건네는 자신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쉬는 시간 교실에서 큰형의 전화를 받고 바로 정신없이 교무실부터 달려온 인우였다. 평소 인우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담임선생님은 일단 인우를 앉혀두고 손을 잡더니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있게 도와주셨다. 인우는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산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 그런 것일까. 간혹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뵈었을 때 건강하신 듯 웃으며 맞이해 주셔서 인우는 잘 몰랐다. 편지도 꼬박꼬박 쓰고 전화도 했다. 성적표가 나오면 이메일로 보내드렸고 막내 아들의 자랑스러운 성적표라며 동네방네 자랑하신다고 어머니는 수줍게 웃으셨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아들인데 부모가 못나서 뒷바라지도 못해주니 늘 미안하다고 하셨다. 인우는 살갑게 막내처럼 재롱도 못 부리는 자신의 모난 성격이 늘 죄송했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려고 한다.

“반장.”

아. 현관을 나서려는데 문 앞에 규형이 서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에게 한마디도 못하고 나왔다. 인우는 결국 눈물이 나서 규형을 보며 뚝뚝 울고 있었다. 규형은 다가와 인우의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았고 나지막히 흐느끼는 반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안 좋으시다고 하더니 위독하신 건가...하며 규형은 탄식한다. 곧 인우의 어깨를 꽉 안고 주문처럼 여러번 반복해서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다. 알겠냐?... 반장..... 인우야. 괜찮아.”

인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규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스케줄부터는 편집장님 이메일로 전송해 두었습니다.”

“알겠어. 그런데 용우 시골집이 청주라고 했지?”

“예. 주소는...”

“아. 갖고 있어. 얼른 가봐. 운전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용우는 한재민 편집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회사에서 출발한다. 미리 연락 해둔 위혜선을 태우러 가기 위해 잠시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들렀다. 

“혜선씨 미안해요. 무리한 부탁해서.”

“괜찮아요. 용우씨 마음 이해해요.”

혜선은 어느새 까만 상복으로 갈아입고 교문 앞에 나와 있었다.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인 용우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신 뒤로부터 자꾸 며느리만 보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덕에 용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는 무덤까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들고 가겠다고 다짐은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임종 전 엄한 여자를 데려와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하나였다. 용우는 핸들을 더욱 꾹 잡는다. 

“강작가님께는 연락 드렸나요?”

혜선이 걱정스레 묻는다. 어머니께 위혜선을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한다고 이미 강주인에게 예전부터 말해두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했고 이런 자신을 용서하라고도 용우는 말했다. 강주인은 명쾌하게 평생 용서 안할 거니까 용서 받을 때까지 옆에 있으라고 했다. 용우는 그러겠다고 말했고 그것은 그의 첫 프로포즈였다. 용우는 주인의 목소리를 들었다간 마음이 약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메시지로 시골 내려간다는 소식만 알렸다. 나머지는 한재민 선배가 잘 말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06시 25분. 해가 뜨기 직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우려했던 일은 없이 아주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다. 빈소는 집에 꾸려졌고 오래 앓아 오셨던 만큼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10년은 더 고생 하신듯한 아버지의 힘없이 쳐진 어깨를 보며 용우는 남몰래 집을 나가 눈물을 흘렸다. 경우와 인우가 태어나기 전, 오로지 용우 혼자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원체 약하신 몸인데 용우를 낳고 더욱 약해지셨던 어머니. 조금 더 좋은 것을 맛보게 해드리고 싶었고 좋은 구경도 많이 해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가버리셔서 이 타는 듯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 

“어머니. 말씀드렸죠? 제가 결혼할 여자예요.”

라고 위혜선을 소개했을 때 어머니의 미소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행복하셨을까. 이만하면 아.. 나는 아들 하나는 참 잘 두었구나..라고 생각하셨을까. 용우는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땅 바닥에 이마를 대고 오열한다. 어머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용우는 터트리지 못하는 울음을 속안으로 삼키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쏟아낸다. 소리없이 떨리는 그 어깨위에 순간 햇빛을 못본 하얀 손이 와 닿는다.

“불쌍한 놈... 동생들 앞에서는 슬퍼할 수도 없는 불쌍한 장남 같으니...”

타이르는 말투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용우는 놀라 고개를 든다. 강주인이 자신 앞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었다. 용우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움직였지만 나오는 것은 울음뿐이었다. 부산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소식을 들은 강주인은 밤새 차를 달려 지금 도착한 것이었다. 까만 상복을 입고는 신기루처럼 용우의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있어줄게. 네가 언제나 큰형으로 있을 수 있게 내가 있어주마...”

주인의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내며 용우는 일어섰다. 

“이걸로 된 걸까...”

“....”

한편, 경우와 유신은 복잡하고도 슬픈 심경으로 서 있었다. 유신은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일을 도왔다. 경우의 후배라고 친척들과 어르신들께 소개하자 것참, 장한 처녀(?)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오해의 시작은 임종을 앞두신 경우의 어머님으로부터였다. 방안에서 평소 잠드시는 것처럼 편안히 가시고 싶다고 하신 어머니셨다. 그리고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느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용우가 혜선을 소개시키고 나서 정말 놀라운 시력을 소유하신 어머님께서는 저 멀리 있는 유신까지 알아보신 거다. 경우의 여자친구냐고 묻는 어머니께 경우는 그렇다고 말했다. 용우가 기겁을 했다. 그가 그토록 고민하던 일을 자신의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또 한번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어머니는 유신의 고운 손을 잡고는 경우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유신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은 채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일은 나중에.. 지금은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것만 신경 써.”

유신은 경우의 등을 토닥인다. 경우는 그런 유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고마운 마음에 젖어 있다가 엉망이 되어 있는 유신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칼을 발견했다. 손가락을 빗삼아 잘 다듬어서 다시 묶어주었다. 

“경우선배. 저 왔어요.” 

닥희가 먼 길을 찾아왔다. 까만 원피스를 입고 영정 앞에서 다소곳이 절을 한다. 경우는 고맙다고 닥희의 두 손을 잡았다. 유신이 깡패놈이 질투해요...라며 농담을 건네며 손을 뺀 닥희는 오히려 자신이 경우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힘을 내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곧 유신의 부탁을 받았는지 유신의 옷가지가 담긴 가방을 녀석에게 전해준다. 남의 남자 손을 잡았다고 한참 타박을 당한다. 그것을 지켜보며 화투를 치던 마을 어르신들이 둘째가 바람둥이라며 수근댄다. 경우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난감해 한다.

교복을 입은 삼십 여명의 학생들이 좁은 마당에 들어선다. 내내 잠을 못 자던 인우가 잠시 눈을 붙이러 간 사이에 들이 닥친 것이다. 곧 잠에서 방금 깬 비참한 모습으로 나온 인우를 보며 감정 표현이 과잉상태인 2학년 3반(차규형 패거리 문제 때문에 1학년 3반은 그대로 2학년 3반으로 진급했다) 녀석들은 뚝뚝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인우가 황급히 아이들을 달랬다. 뭔가 뒤바뀌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서로 통한다. 중건과 현기의 옆에 정말 그리웠던 철민이 서 있어서 인우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철민은 아직도 인우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걱정스러움이 담긴 손길로 인우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4,5명씩 영정에 절을 하고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와 위로의 인사를 나누는 동안 친구들은 자리에 앉아 늦은 식사를 했다. 그동안 밥도 못 먹고 있던 인우도 껴서 매운 육개장과 질긴 편육을 씹으며 슬픔을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한밤중에는 시커먼 정장을 입은 엄청난 덩치를 가진 사람들의 무리가 상갓집에 찾아왔다. 열너뎃명은 되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들이었지만 굉장히 절도가 있어 절대 소란스럽지 않았으며 마치 한 사람이라도 되듯 행동했다. 여섯 대쯤 되는 까만 세단이 주르륵 인우네 집 앞마당에 주차 되었을 때 마침 용우, 강주인, 바쁜데도 찾아와준 한재민 선배,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서로 알고 있다는 경우, 이렇게 넷이서 안 피우던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새까만 차들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내리자 대문에 서있던 네 남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제일 앞서 걸어오는 한 중년인에게 시선이 모아진다. 보통 사람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기백이 남달랐다. 경우는 분명 저 사람을 어딘가에서 봤는데..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문도 잠시 덩치 큰 낯익은 녀석 하나가 용우와 경우에게 다가온다. 그제서야 경우는 중년인이 차규형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섭도록 닮은 부자다. 싸늘한 눈매도,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도, 큰 키도, 떡 벌어진 체격도. 바늘하나 안 들어갈 듯 완벽하게 상복을 차려입은 차규형이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저 왔습니다. 큰형님. 작은형님.”

그 뒤를 줄지어 열댓명의 남자들이 고개를 숙인다. 졸지에 무서운 형님들의 큰형님이 된 용우는 당황했지만 곧 규형의 아버님인 것으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 한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인우의 큰형됩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차규형의 아비됩니다.”

선보는 자리처럼 자로 잰 듯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가고 따르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와줘서 고맙다. 너희들도 어서와라.”

경우는 규형과 종전에 공원 싸움터에서 본 병욱과, 쌍둥이들, 계명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건넨다. 녀석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경우의 뒷덜미를 잡아챈 한재민이 묻는다.

“뭐야? 저 무서운 형님들은?”

“우리 막내 친구들이요.”

재민은 뭔가를 생각하다 기억이 났는지 눈을 크게 뜬다.

“그... 막내의 콘돔... 그 녀석?”

“아아. 재민씨도 아세요? 제일 앞에 키 크고 무섭게 생긴 놈이 그 콘돔 사용자예요.”

경우가 인우를 부르러 들어가다가 무거운 박스를 들고 낑낑대던 유신의 짐을 대신 번쩍 들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남은 강주인과 한재민은 혀를 찬다.

“용우는 정말 상줘야 해. 누가 저런 동생들을 건사하며 살 수 있겠어.”

“그럼 그럼. 누구껀데.”

“......”

인우는 이제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자고 일어났을 때 눈이 붓는 자신의 체질을 원망 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은 싫었다. 그래도 막내가 엄마 죽었다고 운다며 동네 아주머니들이 애처롭게 보는 것이 싫었다. 대한민국 사내로 태어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는 것만은 ‘세번’이라는 면죄부로 인정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웠다. 큰형이나 작은형 모두 담담하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있지만 자신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반장아..”

세수를 해도 부은 눈이 가라앉지 않아 여전히 엉망인 얼굴을 한 인우는 자신을 부르는 계명의 목소리에 순간 환청이 들렸나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황계명이었다. 계명이 까만 정장을 입고는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그 예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맨날 꼴도 보기 싫다고 꺼지라고 말하던 계명이 성큼 성큼 다가와서 인우를 와락 안았다. 인우는 놀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그게 뭐냐. 더 못생겨져가지고.”

하지만 역시나 계명은 계명이었다. 가뜩이나 신경 쓰고 있었는데 저런 상처 주는 말을 하고 휙 가버린다.

“이쁜 반장아...잠은 좀 잤냐.”

“욱아...” 

오늘만은 온몸에 주렁주렁 달았던 번쩍거리는 피어싱을 모조리 뺀 병욱이 안쓰러운 얼굴로 인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얼굴이 지금은 이렇지만 사실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병욱의 뒤를 이어 쌍둥이들까지 인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가버리는 통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뒤에 있는 녀석 때문에 목이 메어서 아예 말 따위는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편안히.. 보내드렸어..?”

학교를 떠나기 직전까지 힘들어하던 인우가 어지간히도 걱정되었는지 규형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인우는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어쩐지 ‘잘 하고 싶었지만 안됐다.’라고 들렸던 규형은 위로의 악수를 건냈다. 온몸이 부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널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라는 명백한 표현에 인우는 조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건네받는 온기라는게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나 인우는 다시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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