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규형이 조인우라는 녀석을 만나고 나서 사정은 달라졌다. 쌍둥이들이 가장 먼저 의심을 시작했다. 그리고 병욱은 지난번 우정고 사건 때 그 의심을 확인 받았다. 쌍둥이들은 계명을 의도적으로 따돌린 것이다. 그것은 병욱에게 황계명이 자신들과 한 약속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암시를 주는 것과 같았다.
쌍둥이들은 늘 현명했고 눈치가 빨랐다. 녀석들은 규형을 믿었고 규형도 녀석들을 믿었다. 그래서 자주 쌍둥이들은 규형에게 해가 될 일을 사전에 제거하고 묻어두었다. 병욱도 쌍둥이들의 판단력을 믿었다.
“황계명...”
병욱이 바로 몇년전 그때처럼 계명을 부르자 바로 녀석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뀐다.
“너...또...!”
병욱은 계명의 어깨를 꽉 잡고 흔들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르단 말이다! 계명아. 반장은.. 반장은 그때의 그 여자애처럼 네 눈앞에서 쉽게 사라져줄 녀석이 아니라고. 왜 그걸 모르는 거냐! 규형에게는 반장이 필요하단 말이다.
“쌍둥이들이.....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계명아..”
병욱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계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어.. 반장놈만... 반장 놈만 사라져주면 돼... 그러면 언젠가는...원래대로.. 될거야...”
뭐에 홀린듯한 그 말은 병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세월이 지나도 이 녀석은 어린애와 같았다. 비뚤어진 애정 때문에 친구 관계까지 망쳐가는 녀석이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병욱 역시 이전에는 어렸기에 왜 계명이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착하고 따뜻한 녀석이 왜 저렇게 미친듯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병욱은 더더욱 차갑게 날이 선 목소리로 계명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떠나서 어디엔가 숨어 있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미친 차규형에게 죽고 싶지는 않겠지?”
계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규형이? 왜? 왜 규형이 미치는데? 반장 때문에?”
“규형이가 반장을 아끼는거 너도 알잖아!”
“하,하지만 그것 때문에 날 때리진 않을거야.. 맞잖아.. 병욱아. 그렇지? 화..화는 좀 내겠지만... 반장 때문에 규형이가 나에게... 그런...”
병욱은 한숨을 내쉰다.
“황계명.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알고 있는 차규형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봐라. 자신의 것을 침범 받았을 때 녀석이 어떤 행동을 할 녀석인지. 그리고 그건 너라고 예외가 아니야. 아니. 오히려 믿었던 친구이기 때문에 더욱 돌아버릴지도 모르지.”
계명의 얼굴은 점점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병욱의 말을 듣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규형에 대해 자기 멋대로 지어낸 환상이 사라진 것이었다. 규형은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린 사람에 있어서 가차 없는 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제까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화가 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나는 규형에게 했단 말인가. 계명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어서 가라.”
“병욱아....”
시합이 끝나고 구름떼처럼 학생복을 입은 인파가 체육관을 빠져나간다. 일단 계명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규형에게 해줘야 하기 때문에 병욱은 전화를 걸었지만 규형의 번호는 계속 부재중 수신 상태였다.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급박한 상황이 생긴걸까. 병욱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계명이 말한 패거리들은 시내 한 모텔에 아지트를 가지고 있고 인우는 분명 그곳으로 끌려갔을 거라고, 혹시나 해서 규형과, 쌍둥이들..세명의 핸드폰에 동시에 음성을 남긴다. 그러고 앉아서 마냥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데 문득 스포츠백을 어깨에 짊어진 한 녀석이 체육관 뒤쪽에서 싱글벙글 거리며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합을 멋지게 승리로 장식한 중건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아껴마지 않는 오진유, 이름은 잘 모르겠다만 말없고 조용한 어떤 녀석. 이렇게 세명이 뭐라뭐라 떠들더니 곧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병욱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온다.
“여어! 병욱아. 여기서 뭐하냐.”
중건이 와다다 달려와 병욱의 어깨에 휙 팔을 감고 매달린다. 으레 그렇듯 녀석이 하는 인사다. 자신이 시합하는 것을 봤냐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묻는데 병욱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잠시 잊고 멍하니 중건의 웃는 얼굴에 넋을 놓았다.
“이봐. 왜 혼자 있어? 차규형이랑 쌍둥이들은? 혹시 인우는 못봤어?”
잔뜩 불만이 있는 얼굴로 오진유가 다가와서 병욱에게 어색하게 묻는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병욱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까 화장실 간다고 가더니 사라져 버렸네. 차규형이랑 간거냐?”
나 지금 기분 굉장히 나쁨. 이라고 얼굴에 써있는 진유는 조금 용기를 내서 안병욱과 박중건의 사이를 떼어 놓는다. 물론 근육바보 박중건 때문에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진유가 두 놈이 붙어있는 모습이 왠지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으음... 잘 모르겠어.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거다 그건.”
결국 병욱은 시치미 뚝 작전을 구사한다. 말하기도 좀 껄끄럽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해서 솔직히 귀찮아 졌다. 그런 병욱의 대답에 중건이 그의 등을 팡팡 때리며 껄껄 웃는다.
“크하하하! 너 니네 패거리들에게 버려졌구나! 그렇지? 이런. 불쌍한 것. 좋아! 오늘은 승리한 기념으로 이 몸이 한턱 쏜다!”
중건은 기세좋게 외쳤고 ‘정말 니가 쏘는 거지?’라며 진유가 거듭 확인하며 방금 전까지 인우의 행방을 묻던 것을 저 멀리 기억 너머로 날려버리고 만다. 병욱은 자신의 팔을 잡아 끌며 한턱 쏜다고 말하는 중건이 괜히 이뻐보여서 에라이 모르겠다-하며 이 녀석들틈에 끼자..라는 마음을 먹어버린다.
“벼...병욱이는... 뭐....뭐 좋아하는데....?”
그때 아주 아주 용기를 낸듯 그때까지 한마디 하지 않던 녀석이 병욱에게 쓱 다가와 말을 건다. 현기였다. 그래. 이현기. 병욱은 그제서야 이 녀석의 이름을 기억해 낸다. 병욱에게 말을 건 것은 정말 큰 마음을 먹은 것이라는 듯 상기된 얼굴을 해가지고 ‘뭐 먹을래?’라고 묻는 현기를 살짝 내려다보며 우리의 바람둥이 안병욱은...‘에에? 요녀석도 괜찮네.’하는 몹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넌? 현기지? 우리 한번도 말 안해본것 같다. 그렇지?”
“..아...아.. 으응... 처..처음이네.”
열심히 뭔가 말하려고 하는 현기를 내려다보며 병욱의 머릿속에는 가끔 반장이 말해주는 녀석들의 정보가 조금씩 활성화 되고 있었다. 현기는 정말 성실하고 착하지만 공부를 무섭게 하는 녀석이라 늘 1등을 놓치지 않는다..라고 언젠가 말해준 것이 있었다. 맞아. 그 녀석이었어. 병욱은 천부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넉살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현기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현기와 병욱이 마음이 맞은 듯 성큼 성큼 걸어가버리자 뒤에 남은 중건은 마치 외톨이가 된양 쓸쓸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라며 중건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안병욱이 현기랑 정답게 이야기 하는 모습이 왠지 좀 마음에 안좋네... 이상한 일이야..라며 중건은 자신도 깨닫지 못한 혼란과 질투의 소용돌이 속을 헤메이고 있더랬다. 그런 중건의 뒷통수를 빡! 치며 진유는 녀석의 등을 밀며 앞으로 쑥쑥쑥 뛰어 나간다. ‘오늘 진짜 니가 쏘는거다 뚱땡아!’라고 진유가 외치자 진유에게 등을 밀리며 타의에 의해 뜀박질을 하고 있는 중건이 ‘야! 오진! 나 오늘 좀 멋지지 않았냐?’라며 기분전환용 질문이랍시고 잘난척을 해서 괜히 진유에게 크게 한방 얻어맞는다.
“그런데 철민이도 어느 순간부터 안보이네.... 이상하다.”
진유는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중건을 질질 끌며 중얼거린다.
“으헉!!”
“퍽!!!”
규형은 철민의 멱살을 쥐고 거세게 벽으로 밀어 붙인다.
“이 인간 말종 같은 새끼. 돈을 써서 .....인우를 다치게 해?”
새파랗게 질린 철민의 코앞에 대고 규형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늘 반장이라고 할 뿐 단 한번도 조인우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른 적이 없는 규형이 철민에게 자신의 소유인양 그를 부르며 죽일듯이 윽박지른다.
“인우에게 해를 끼칠줄은 몰랐어!!! 정말이란 말이다! 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나도 인우를 좋아한단 말이야. 인우는 내 친구라고!”
철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것만 같은 느낌에 쌍둥이 중 한명인 정전이 규형의 옆으로 다가와 철민에게 나지막히 묻는다.
“우정고 녀석들을 매수한 거 너 맞지?”
철민은 한동안 대답을 못했지만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규형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철민의 얼굴에 펀치를 먹인다. 핏덩이를 한웅큼 뱉어낸 철민의 안경은 벌써 저 멀리 날아가 있었고 늘 단정하던 얼굴이 엉망이 된다. 직접적인 폭력앞에 처음 선 철민은 나약하기 그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서있을 수도 없을만큼 떨고 있었다. 규형이 멱살을 놓자 철민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정고에.. 그 싸가지 없게 생긴 놈이 다 불었어. 네가 인우를 납치하라고 시킨거잖아!”
규형이 발을 내질러 철민을 차버리려 하는 것을 쌍둥이들이 가까스로 말렸다. 머리를 감싸쥐고 온몸을 웅크리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던 철민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럴 리가 없어! 난.... 난! 다만 차규형을 손봐달라고 했을 뿐이야! 그 이상은 부탁한 적이 없단 말이야!”
그 말에 잠시 규형과 쌍둥이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랬다. 분명 인우를 끌고 가던 것은 우정고의 교복을 입은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을 추적하다가 도착한 공터에 널부러져 있던 놈들은 모두 우정고 녀석들이었다. 우정고의 리더로부터 연철민이 사주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 인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리 우정고 놈들을 족쳐봐도 모르는 놈들이란 말 뿐이었다. 연철민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인우는 어디로 끌려 간 거란 말인가! 인우를 데려간 그 놈들은 누구란 말인가. 규형은 초조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드럼통을 차버린다. 꽤나 두꺼운 강철 드럼통이 단박에 우그러진다. 그 힘에 철민은 자신이 무슨짓을 한건지 그제서야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
“규형.”
정신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다가와 규형에게 들려준다. 순간 차규형의 얼굴이 급격히 구겨진다.
도대체 이놈들은 누구일까. 인우는 아주 본격적으로 자신을 묶고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고 온 무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아까 교복 무리에게 끌려갈 때 까지만 해도 이 사태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당황하기도 무지 당황했고 맞은 곳도 무척 아팠다. 헌데 지금은 왠지 으스스하고 불안한 것이 왠지 엄청난 일에 말려 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방치되어 있던 인우였다. 주위는 무척 소란스러웠고 싸구려 벽지 냄새와 퀘퀘한 습한 공기가 계속 느껴진다. 인우의 두손을 묶은 천은 그다지 강한 재질의 것이 아니었다. 몇 번 손을 무리하게 움직여본 인우는 잘하면 풀리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납치범들은 날 무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인우였다. 안 그렇다면 덩치가 이렇게 큰 고등학생이 이런 연한 천 따위 못 끊어낼까 라는 생각을 했을 터였다. 인우는 들키지 않게 뒤로 묶여진 손을 필사적으로 뒤틀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데 다가온 사람은 뜻밖에도 인우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겨내준다. 잠시 눈이 부셔서 찡그리고 있던 인우는 자신이 있는 곳이 한 모텔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는 왠 어른들이 바글바글 했다. 게다가 무슨 카메라에 요상한 도구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인우는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헌데.
“..호오.. 얌전 하네. 별로 놀랍지 않은가 보지? 귀염둥이.”
인우의 눈가리개를 풀어준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걸어왔다. 인우는 충분히 놀랍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표정없는 인간이란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귀염둥이라는 닭살돋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저 기름독에 빠졌다 나온 듯한 남자는 굉장히 건장했고 무슨 모델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채였다.
“뭡니까.”
인우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상황을 묻는다. 남자는 그런 인우의 반응이 놀랍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인우의 앞에 앉아 시선을 맞춘다. 아무리 봐도 굉장히 잘생긴 남자다.
“모르겠어? 여긴 촬영장. 뭘 촬영하는 거냐면 포르노지. 남자들끼리 하는 포르노.”
싱글싱글 웃으며 인우에게 뭔가 충격을 주고 싶어 하는 듯 남자는 거침없이 말한다.
“그런데 절 왜 이곳에 데려오신 겁니까.”
하지만 조인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아. 넌 팔려온거야. 우리가 네 동급생 녀석 하나에게 돈을 받고 산거지.”
이건 좀 쇼킹한 말이었던 지라 인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인우의 모습에 정말 재미없다는 듯 툴툴댔다. 아니..고등학생 맞는거야? 좀 앙앙대며 울기라도 해야 안는 맛도 나고 화면도 이쁘게 나올거 아냐, 이거 원 목석같은 놈 하나 사와서 손해보는거 아냐..라며 중얼중얼 한탄을 해댄다.
“누가 절 팔았습니까.”
인우는 화가 날수록 감정이 더욱 없는 말투가 되는 터라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남자는 양복을 벗으며 자신이 포르노 주인공임을 알린다. 어쩐지 잘생겼다 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인우의 물음에 답한다.
“거 왜 좀 이쁘장한 놈이었는데. 황계명인가.. 맞나? 그래. 황계명이라는 놈이었지. 그 놈이 어떤 몹쓸 녀석에게 걸려서 테이프를 하나 찍었는데 말이야. 그거랑 널 바꾼거다. 뭐 사실 상품가치야 그쪽이 더 낫지만 교복입은 채인 고등학생의 영상도 짭짤하거든.”
인우는 한숨을 내쉰다. 그래. 황계명이란다. 어쩐지 이해가 된다. 그 녀석은 예전부터 자신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하다니. 인우는 얼른 묶인 손을 풀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앞에서 계속 헤죽대며 말을 걸고 있는 저 잘생긴 아저씨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뭘하면 좋을까. 인우는 일단 조금 웃어주기로 했다.
“...이보십시오. 아저씨. 계명이 찍은 테이프란건 뭡니까.”
“이봐! 난 아저씨가 아니.........어.......”
남자는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자 발끈해서 인우를 바라본다. 하지만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건방진 고딩녀석이 지금은 굉장히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며 있었다. 남자는 잠시 얼이 나갔다.
“저기... 아저씨?”
“...아.... 그..건...”
남자는 비몽사몽간에 대충 황계명이 찍혔다는 테이프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정신은 인우의 미소에 온통 팔려있던 터였다. 인우는 어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남자가 자신의 행동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싶어서 서둘러 묶여있는 팔을 비틀어 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끈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제법 세게 묶었던 지라 팔목의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흘렀다.
“그럼... 계명이가 남자하고.... 잤다는 말입니까?”
“몰랐냐? 같은반이라면서. 그 바닥에서는 꽤 유명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고. 키 180이상에 눈매가 사나운 녀석이라면 아무나 ok였다지.”
남자의 말을 듣고 인우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키가 크고 눈매가 사나운 사람이라. 계명이는 차규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니. 녀석도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하며 인우는 자신을 이곳으로 팔아먹은 인간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인우도 차규형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 전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방황을 하지는 않았다. 인우는 그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차규형 역시 자신을 늘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우의 마음을 인우 자신보다 먼저 알아주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인우는 친구를 좋아한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아도 되었고 너무도 쉽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다 규형이 덕분이었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물론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사내놈에게 반하지도 않았겠지만)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황폐해 졌을까.. 인우는 갑자기 차규형이 무척이나 보고 싶어 졌다.
“준비됐다. 데려와.”
카메라로 침대를 찍고 있던 남자가 손짓을 했다. 인우는 두 손이 여전히 묶인 채로 침대에 눕혀졌고 아까부터 자신에게 끈질기게 말을 걸던 면상 반반하게 생긴 그 남자가 인우의 몸 위를 덮쳐 왔다.
“반항만 하지 않으면 금방 끝난다. 보통은 약을 쓰는데... 넌 말귀도 잘 알아듣는 녀석 같고. 굳이 거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우리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아가야.”
남자는 사무적인 말투로 인우의 몸위를 타고 올라 구석구석을 만졌다. 주위에 수십명이 이 좁은 모텔방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 흥분이 될 리가 만무하다. 남자는 아주 이골이 났는지 기술적으로 인우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천천히 교복의 앞섶을 열고 있었다. 교복이 아이템이다 보니 완전히 벗기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인우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남자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뒤쪽에서 팔목에 피를 줄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포박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녀석 왠지 익숙하네. 표정봐.. 상기 돼서 숨도 가쁘게 쉬고..”
“그러게. 덩치가 커도 어딘가 모르게 섹시 하잖아..”
“분명히 학교에서 반장한다는 녀석 아니야? 마구 발버둥치고 울고 반항하고 하는 컨셉이라고.”
“저런것도 왠지 괜찮지 않아..?”
괜찮긴.. 이 변태같은 놈들. 포르노는 찍고 싶은 놈들이나 찍으란 말이다. 인우는 남자의 혀가 자신의 가슴을 핥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힘껏 두 손을 감고 있는 천을 끊어낸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결국 포박이 풀렸다는 기쁨에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이 좁은 방에 사람이 무척 많아 도망치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남자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아저씨... 이거.... 정말로 하는 겁니까...”
“...후우.. 당연하지. 귀염둥이. 그래서 돈까지 주고 사온거 아니겠어?”
“그렇군요.”
인우는 무릎을 세워 남자의 중심부를 빡 걷어찼다.
“으악!!!!헉...헉! 으앗...헉.”
남자는 눈앞이 새까매지는 아픔에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서 떼구르 굴러 떨어졌다. 인우는 재빠르게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스탠드를 집어 들어 무기로 삼았다. 그 방안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 인우였지만 이건 어쩔 수없는 정당방위였다. 어린 자신이 생각해도 이 사람들의 행동은 불법이었다. 계명 역시 이용당한 것이다. 그들의 추악한 속물근성과 물질 만능주의가 역겨웠다. 포르노는 집에 가서 아저씨들 부인이랑 얼씨구나 찍으시지요 하며 인우는 스탠드를 정신없이 휘둘렀다. 인우에게 달려들려 했던 남자들이 머리에 스탠드 끝 부분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여기까지 잡혀 오면서 한 차례도 반항이 없었고 무기력해보이는 표정에 겁먹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저 교복 입은 소년은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이었다. 철제 스탠드를 들고 무서운 표정으로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는 녀석들 잡기 위해 방안의 모든 남자들이 팔을 걷어 붙였다.
“저..저새끼.... 잡아...아흑... 남의 장사 밑천을... 헉...”
“잡아서 다 벗겨! 교복으로 손발을 묶던지 하란 말이야! 카메라는 계속 돌린다!”
정신없는 아수라장이었다. 인우는 닥치는 대로 스탠드를 휘두르고 주먹을 내질렀고 발길질을 했다. 언제나 말했듯 문무양면 뛰어난 조인우는 차규형과 만난 뒤로 본의 아니게 싸움에 자주 휘말리게 된 터라 이제는 대충 어디서 어느 타이밍에 주먹이 날아오고 언제 피한 뒤 맞받아쳐야 하는지 적은 경험이나마 쌓여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인우는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여전히 홀로 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괘씸하게도 이 상황이 됐는데 카메라가 윙윙 돌며 자신의 모습을 찍고 있어 제일먼저 카메라맨의 머리부터 날려줄까 했지만 너무도 멀리 있는 나머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옆에 있는 탁장시계를 냅다 던졌더니 조명잡고 있던 아저씨가 맞아서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제기랄! 이 녀석이!!”
점점 힘이 빠지고 있던 인우가 잠시 보인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 뒤에서 인우의 팔을 잡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던 인우의 한쪽 팔이 잡히자마자 곧바로 이어지는 인해전술을 혼자인 인우는 당해낼 수 없었다. 남자들은 인우의 팔과 다리에 몇 명씩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인우는 시야가 사람들로 까맣게 가려지자 여기까지인가..하며 탄식했다.
“어휴.. 무슨 놈의 새끼가 힘이 이렇게...”
“헉헉...꽉 잡으라고. 또 도망가려고 하면 안되니까.”
인우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처음에야 도망가려고 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직후부터 인우에게는 도망가려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미소가 빙그레 저절로 지어진다. 방금 전 방안에서 날뛰는 동안 창문 밖으로 아주 보고 싶었던 얼굴이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규형.....”
“뭐? 이 새끼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아무튼 잔소리 말고 얼른 벗겨. 한번 후장 뚫리고 나면 얌전해 지겠지.”
남자들이 정신없이 인우의 교복을 벗기고 다리를 벌리는데
“와당탕탕탕!!!!”
모텔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입구 쪽의 남자들이 풀 베어지듯 퍽퍽 쓰러지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등장한 인물들은 거침없이 방안을 가득 메운 사내들을 때려눕혔다. 남자들은 인우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기도를 느낀다. 이것은 살기였다. 정말로 죽일 마음을 하고 덤벼드는 기세였다. 저절로 몸이 움츠려지고 여지없이 날아가 버린다. 어느샌가 쌍둥이 들이 다가와 인우의 온몸을 붙들고 있던 남자들을 날려버린다. 인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옷을 추슬러 입으며 일어선다. 정신이 손을 내밀어 줘서 고맙다는 표시를 하며 잡고 자리에 선다. 규형은 카메라를 발로 밟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찍고 있던 남자를 죽도록 차고 있었다. 인우는 모텔방의 전화기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잔뜩 흥분해 있는 규형을 겨우 말려서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고맙다 구해줘서.”
인우는 규형과 쌍둥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인우가 왜 이곳에 끌려와야 했는지를 병욱의 음성 메시지 덕에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인우의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우는 마치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끔찍한 경험을 한 녀석 같지 않게 조금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아주 단조로운 표정밖에 보여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우에게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저런 상황되니... 니가 가장 보고 싶더라.. 차규형.”
그 순간동안만은 이런 상황이 조금 고마운 규형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지났고 벌써 명성고등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한 달간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인우의 형인 조경우가 전역했다. 감각을 살려야 한다는 요리사 지망생 형님 때문에 인우가 매일매일 호화 도시락을 싸오는 덕에 1학년 3반에는 난데없이 도시락 쟁탈전의 바람이 불었다. 우승자는 대부분 차규형이었지만. 그리고 학교에 잠시 나오지 않던 황계명이 어느 날 옥상에서 죽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가끔 있는 일이라며 선도부가 나름대로 제지에 나섰고 계명은 선도부에게 끌려 내려오다가 2층에서 잔디밭으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떨어진 게 아니라 소동을 일으킨 죄로 선도부에게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맞은 거라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제적 당한게 아니니 그게 어디랴. 또 전국대회에서 엄청난 선전을 보인 중건이가 벌써 유명대학에 스카웃을 받았다는 루머가 돌았고 난데없이 명성고 앞에 ‘박중건love'플랜카드를 든 여학생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중건이는 드디어 내 시대가 온건가! 라며 껄껄 웃어댔고 이상하게도 진유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덩달아 에로 작가인 병욱의 펑크도 잦아 졌다. 물론 곧바로 이어진 방학 때문에 ’박중건love'의 열기는 사그라들었지만 조금 더 이어졌다간 질투에 불타는 친우들 덕분에 아마 중건이가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라는 게 반장 조인우의 분석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상하게 한동안 인우를 피하던 연철민이 전학을 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은 섭섭한 일이었다. 전학 간 학교에 가서도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갖고 있었다.
한편 인우는 여름방학을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형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한 뒤 점심은 황계명의 병원에 가서 먹는다. 계명이 무시를 하든 말든 인우는 녀석에게 꾸준히 들렀고 그 결과 요새는 하루에 한마디 정도는 한다. 그러면서 인우는 계명의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 쓸쓸히 혼자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다. 인우에게 전에 없을 좋지 않은 경험을 하게 만든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규형이 무척 아끼는 친구다. 자신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는다. 오후쯤 교대를 하러오는 병욱과 잠시 시시덕대다가 인우는 그때까지 자고 있을 규형의 맨션으로 간다. 깨웠다며 툴툴대는 규형을 앉혀두고 공부를 시키고 저녁때쯤 기어들어오는 쌍둥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밤 10시쯤 출근하는 녀석들의(이번 방학 때부터 쌍둥이들도 규형과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머릿속에 영단어를 한 70개쯤 억지로 구겨 넣은 인우는 집으로 돌아와 늦게까지 자신의 공부를 하고 새벽 2,3시쯤 차규형과 짧은 통화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인우는 스스로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만 와!”
“싫다.”
“꼴도 보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냐.”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한쪽다리에 깁스를 하곤 입을 한 댓발 내밀고 있는 황계명. 사실 계명은 무척이나 귀엽게 생겼다. 인우는 이제까지 자신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이 세상 어느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는 놈을 이쁘게 보겠는가. 하지만 인우는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저 것이다. 한 달 전만해도 황계명은 인우를 봐도 유령 취급했다. 하지만 요새는 오지 말라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미움 받는 입장도 꽤나 피곤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인우였다.
“내가 왜 꼴보기 싫냐?”
인우의 물음에 그걸 정말 모르냐는 얼굴로 계명이 노려본다. 인우는 정말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명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잘난척 하는거,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거, 규형이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거. 다 재수없다.”
인우는 이해가 불가능 하다는 얼굴을 한다. 계명은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쳐댄다.
“하지만 난 잘난척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차규형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은 맞지만.”
계명은 인우의 입에서 규형의 이름이 나오자 눈에 띄게 표정이 사나워진다.
“넌 공부가 싫어?”
인우의 물음에 계명이 되묻는다.
“넌 공부가 좋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본다. 두 사람 다 ‘역시... 저놈하고는 친하게 지내긴 글렀어’ 하는 얼굴이다.
어느 날 새벽, 난데없이 울린 휴대폰 소리에 잠을 깬 인우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았다.
“내 집으로 와.”
하고는 뚝 끊는 전화였다. 잠시 멍하니 전화기를 들고 있던 인우는 곧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살금살금 형들이 깨지 않도록 집을 나선 인우는 정신없이 규형의 맨션으로 달려갔다. 이 밤중에 걸려온 규형의 전화는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목소리가 문제였다. 단 한마디였지만 뭔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인우는 뛰는 심장을 진정 시키려 애쓰며 규형의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뚝뚝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세월아 내월아 하는듯 해서 차라리 계단으로 올라갈 걸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황급히 규형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인우는 아까 저녁때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집안이 난장판이 된 것에 깜짝 놀랐다. 도둑이라도 든 것인가! 인우는 놀라서 주위를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왔냐....”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갈라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욕실이었다. 정장을 입은 채로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고 있는 규형을 보고 인우는 입을 떡 벌렸다.
“너... 왜 그래...”
인우는 저놈이 술에 취한건가..싶어서 일단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 인우의 얼굴을 알아보고 규형이 대뜸 잡아 당겨 품에 안는다. 인우는 자신의 머리에도 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규형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너... 왜 떨어....”
인우는 정말 놀라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까이에서 안고 있으려니 규형의 몸이 무척이나 뜨거운 것을 깨달았다. 뭐야. 아픈거냐! 하면서 녀석을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그런 인우의 손을 거칠게 잡은 규형, 바로 자신의 다리 사이로 겹쳐 댄다.
“뭐야!”
이 와중에 무슨 짓이냐!라고 펄쩍 뛰려던 인우는 녀석이 지금 엄청나게 흥분 상태라는 사실에 얼이 나갔다.
“차규형.”
“응?”
“뭐냐.”
“.....나... 뭐 이상한 약을 먹은 듯... 싶다.”
이상한 약? 인우는 일단 잔뜩 젖은 규형을 엉망이 된 방 가운데를 대충 치우고 끌어다 앉혔다. 몸에 열이 펄펄 나서 눈동자가 잔뜩 젖어 있었다. 인우는 자신의 얼굴도 약간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앉힌건데 이 커다란 놈이 갑자기 인우를 확 밀어 넘어뜨리더니 위에 올라탄다. 무겁게 짓누르니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인우였다. 등 뒤로 뭔가 책인지 리모콘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이 배겨서 허리를 들어 올렸는데 순간 녀석의 부풀어 오른 다리 사이에 가깝게 몸이 닿아 버렸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차규형의 눈이 더더욱 짙어진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거냐! 인우는 발버둥을 쳤다. 그때 규형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규형의 주머니에서 인우가 꺼내 받아 들었다. 어자피 차규형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반장?”
쌍둥이들의 목소리였다. 신인지 전인지는 알 수 없다.
“규형이 거깄어?”
“아. 이 놈 왜 이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