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0)

조인우.. 자기건 남자의상으로 들고 나왔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복작복작 정신없던 학교 운동장에 평화가 돌아왔다. 루머대로 가장행렬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은 반 녀석들이 드문드문 떨어져서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 보이고 빨강 모자의 체육부장 패거리들은 기자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분명 하루 종일 고생한 녀석들 뒷풀이가 끝장나게 준비되어 있을게 뻔했다. 학생회는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니까. 인우는 교실 창가에서 하늘에 번져 있는 빨간 노을을 보며 감상에 잠겨 있었다. 

완벽한 여장도 아니고 치마만 달랑 입은 녀석들이 망토를 매고 울퉁불퉁한 종아리를 자랑하며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그 무뚝뚝하던 인우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법 임기응변에 뛰어나 제 역할을 잘 해주었다. 즉석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퍼포먼스도 해주었는데 그리핀도르 기숙사를 뜻하는 주황색 줄무늬 넥타이를 한 패거리와 앙숙 슬리데린 기숙사를 뜻하는 녹색 줄무늬 넥타이 부대가 중간부터 멱살을 잡고 싸워대는 모습을 보며 모두 폭소했다. 중건과 병욱이 잔뜩 기분을 내면서 대열을 빠져나가 선생님이고 선배님이고 할 것 없이 눈앞에서 지팡이를 휙휙 휘두르며 알아듣지 못할 ‘윙 가르디움 레비오사’ 따위의 주문을 외우는 통에 웃음은 멈추지 않았고, 의외로 스커트가 나풀나풀 잘 어울리는 현기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폴짝폴짝 뛰어 들어가자 선배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제법 구경거리였다.  

퇴장을 뜻하는 해리포터의 메인테마음악이 운동장에 흘러나왔을 때 인우는 그제서야 말쑥하게 영화 속 호그와트의 교복을 차려입은 차규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이 조금 작은 듯 슬림하게 달라붙는 것이 또 어른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묘해보였다. 한참을 홀린 듯 인우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악당아니랄까봐 슬리데린 옷을 강탈해 입고는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쌍둥이들과 걸어오는 녀석 보며 인우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지금 당장 저 녀석에게 달려가서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 

그때의 기분을 상상만 해도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인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만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규형에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 친구로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오래전에 자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신체적 접촉이 하고 싶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자신이 굉장히 야한..변태가 된 것 같아서 울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드르륵...”

그때 교실뒷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인우는 그 녀석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익숙한 체취가 느껴져서 차마 뒤를 돌아 볼 수 없었다.      

“밥 먹었냐.”

규형이 다정하게 물으며 인우의 뒤에서 양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심장이 심하게 뛰어 올라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숨결이 귓가에 닿아서 자꾸만 몸이 뜨거워진다. 내가 미쳐버린걸까... 인우는 고개를 떨구고 만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인우를 돌려 마주보게 세우곤 규형은 물었다. 인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믿지 않았다. 녀석의 턱을 잡아 고개를 바로 세우곤 눈을 맞춘다. 깊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은 여전했다. 인우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방심하고 있는 녀석의 팔을 거칠게 잡아 당겨 바로 부딪치듯 입을 맞춘다. 비록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정도의 접촉이었지만 워낙 거세게 잡아 당겼던 지라 규형의 균형이 흐트러져 인우쪽으로 몸이 쏠려왔다. 인우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던져지듯 주저앉았고 규형역시 딸려 넘어졌다. 잠시 입술이 닿은 몇초간이 마치 몇시간처럼 느껴진 인우였다. 규형이 자신을 밀어내고 화를 내며 뛰쳐나가기를 사형선고 받는 죄수처럼 눈을 꽉 감고 기다리고 있는데 왠지 이상하게 넘어진 이후에도 계속 서로의 입술은 가까이 밀착되어 있었다. 이상했다. 인우는 살짝 한쪽 눈을 떠본다. 바로 코앞에 규형의 얼굴이 있었다. 녀석은 황당한 듯 눈을 깜빡깜빡 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인우는 화들짝 놀래 다시 눈을 꽉 감아버린다. 

이제는 욕을 내뱉으며 가버릴 건가...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는데 그때 인우는 자신의 입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열고 들어오는 녀석의 뜨거운 혀가 느껴져서 기절할 만큼 놀랐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녀석을 밀어내려는데 이놈 꿈쩍도 안한다. 손으로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봤는데도 오히려 규형은 고개를 조금 비틀어 더욱 깊이 입을 맞추어 왔다. 녀석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와 치열을 핥고 자신의 혀를 끌어당겨 휘어 감는데 인우는 그 적나라한 감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뭔가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굉장한 기분이었다. 점차 녀석을 밀어대던 손에 힘이 빠지고 양 팔이 그대로 녀석의 어깨위에 걸쳐졌다.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숨을 가쁘게 내쉬고 다시 맞닿고 정신없이 헤집을 듯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미친 듯이 입술을 빨고 혀를 감아대고 타액이 턱을 따라서 흘러내려도 게의치 않는 격렬한 키스였다. 키스가 영화에서처럼 멋지고 예쁜 것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생겼을 때 인우는 자신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규형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규형의 큰 손이 인우의 두 손을 맞잡았다. 목 안쪽 연한 살을 힘껏 빨아들이는 녀석 때문에 인우는 숨을 가쁘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인우는 규형의 손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자유로워진 손을 뻗어 녀석의 품안에 손을 밀어 넣어 교복 자켓을 뒤집어 벗겨 내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서로의 바지 버클을 끌러내어 바짝 흥분해 서있는 분신을 잡는다. 동시에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온다. 입을 맞춘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서로를 자극한다. 질퍽이는 소리가 고요한 교실 안에 부딪치듯 들려와서 밀려들어오는 흥분을 부추긴다. 조금 더... 조금 더... 애타는 손길이 이어진다.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신음이 새어나온다.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절정에 올라 흥분을 쏟아낸다. 천천히..가라앉는 호흡을 정돈하며 서로의 몸에 기대서 흐트러진다. 교실 바닥에 몸을 겹치고 앉아서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사랑스러워진다. 

“이 해리포터 교복은.....세탁해서 돌려줘야 하겠군....”

왠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것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규형의 낮은 목소리가 한마디 했고 인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기분에다가 이상하게 나른해서 인우는 힘이 없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일으켜 세우는 규형에게 이끌려 인우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벌써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래도 괜찮은 건가.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에 불안한 기분, 그리고 왠지 애달프도록 무엇인가 부족한 이 묘한 느낌....쓸쓸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늘한 손이 와서 인우의 손목을 잡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는 인우다. 사나운 눈매지만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다정하게 웃어주는 규형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녁 사줄게...”

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치페이다’라고 말하며 성큼성큼 교실을 빠져나간다. ‘난 돈버니까 내가 사주마’라는 녀석을 건방지다며 한번 노려봐주고는 웃으며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걷는다. 

“인우.....”

그리고 열려진 교실 뒷문 반대쪽에서 꽤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한 연철민이 벗어 들고 있던 안경이 깨지는 것도 모른 채 손아귀에서 뚝뚝 피를 떨구며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흐른다. 어느덧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오고 햇볕은 점점 뜨거워진다. 6월말쯤 보는 각 학교 기말고사에 대비하여 보통 학원가에서는 한달전부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학급의 반 이상이 벌써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들어갔고, 학원을 굳이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라도 이때쯤 쏟아져 나오는 과목별 수행평가 마감일로 인해 싫어도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야 했다. 인우는 미리 할 수 있는 수행평가는 다 해두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롭게 천천히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대부분 규형의 수행평가를 돕는데 시간을 보냈다. 단 한번도 학교에 과제물을 제출한 적이 없다고 하는 이 껍데기만 학생인 차규형을 붙들어 놓고 앉아 차근차근 감독을 하는 인우의 마음은 정말로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혼자서 공부라는 곤욕을 치르는 것이 억울했던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 규형은 쌍둥이들마저 강제로 스터디의 물결에 끌어들이는 통에 현재 인우의 반경 3미터 안에 있는 모든 녀석들이 팔자에도 없이 머리를 싸매고 바람직한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변화에 다른 반 녀석들은 물론이거니와 각 과목 선생님들까지도 구경한답시고 쉬는 시간마다 인우의 반을 들락거렸다.

“세계의 종말이 오려는 건가.”

마감으로 한층 삭아 보이는 병욱이 인우의 등에 기대서 늘어져버린다. 피곤에 쩔어버린 녀석의 몸에서 줄줄이 피워댔을 독한 담배냄새가 풍겨온다.

“정말 네 글 안보여줄거냐?”

인우의 말에 옆에서 수학 학습지를 풀고 있던 규형이 묘한 눈을 해가지고 인우를 바라본다.

“이봐. 내 생각은 변함없다고. 박중건이 ‘이제 다 컸구나 조인!’하면 보여주겠다는 거지. 큭큭..”

병욱은 중건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규형이 시큰둥하게 말한다.

“반장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이놈도 할 때는 하...읍!!!”

순간 규형의 입을 막아버리는 인우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했으나, 인우의 과격한 행동을 처음 목격한 친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인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랭한 목소리지만 꽤나 다급하게 규형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인우의 음색에 부끄러움이 담긴 것을 느꼈던 규형은 어젯밤 무척이나 색정적이고 요염하게까지 보였던 반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육감적인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규형의 머릿속이 투시라고 되는 것처럼 모조리 읽힌 인우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참담함으로 질린 얼굴을 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현기의 뒷자리, 즉 중건의 옆자리로 가버리고 말았다. 중건의 짝인 병욱은 갈 곳을 잃어 인우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병욱의 앞자리였던 현기가 왠지 얼굴이 상기되어있는 인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인우는 어젯밤 규형의 만행을 떠올리고는 손에 샤프펜슬을 힘껏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어제도 역시나 규형이 일을 나가기 전까지 함께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던 터였다. 둘은 자체 학습으로 하루에 20분 정도 영어로만 대화하기로 했는데 그러다보니 알고 있는 단어의 빈약함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외운 단어 50개를 완벽하게 쓰고 발음할 수 있는지 규형이 일을 나가기 전 늘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어제는 연속된 학습이 지겨웠는지 차규형 이놈이 자꾸만 걸리적거리게 시리 달라붙는 것이었다. 지난번 키스하고 서로 만져준 뒤로 틈만 나면 더 진한 행위를 하려는 것만 생각하는 짐승 같은 차규형이었다. 입맞춰주는 것 정도는 인우도 충분히 해줄 수 있었지만 선을 넘는 것은 싫었다. 정말 스스로가 용납이 안됐다. 이 껍데기만 십대인 차규형은 분명 경험이 있겠지만 인우는 단 한번도 섹스를 해본 적도, 그걸 할 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다. 

“첫 경험은 결혼 첫날밤에!”라고 생각하는 꽉 막힌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규형이 녀석이 그다지 싫지 않으니...(사실 인우도 차규형을 만지고 싶어 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고 있다. 작은형이 갖고 있는 비장의 콜렉션들 중에 게이 포르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조건을 이리 대고 저리 대어 보아도 규형과 신체적인 결합을 하는 것은 싫지 않은 인우였다. 하지만 규형의 어택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어른이 되어서 서로에게 책임질 수 있게 되면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우 자신만의 생각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규형은 달랐다. 녀석은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고 우겼다. 그때마다 “우리 지금 사귀는 거냐?”라는, 남자의 욕망이 단숨에 가라앉는 말을 해가며 녀석을 달래고 달랬다. 채찍만으로는 짐승을 다룰 수 없으니 당근 주는 셈치고 가끔 먼저 키스도 해주고 만져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는 채찍도 당근도 안통해서 한참 엎치락 뒷치락 힘싸움을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일하는 곳은 아무래도 밤의 세계였고 규형은 보스의 아들이었지만 아직 10대였다. 그나마 차규형씩이나 되니까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병욱이 말해주었다. 그런 녀석이 조금은 딱해서 인우는 “끝까지 하는 건 싫다”라고 말했고 끝까지만 가지 않을 뿐이지 이것저것 마음내키는 대로 해버리는 규형 때문에 자신이 단단히 실수 했다고 생각하는 인우였다.

가장 쇼킹한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었다. “펠라다.”라고 규형이 가르쳐준 그것은 정말 몹쓸 악마의 행위였다. 규형이 처음 인우의 바지를 내리고 인우의 페니스를 자신의 입에 넣었을 때를 인우는 잊지 못한다. 미친..미친..을 연발하며 발버둥쳤지만 녀석의 놀라운 테크닉에 금새 흐물흐물 해지고 말았다. 도대체가 어디서 이런걸 배운거냐면서 인우는 버럭버럭 성을 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인우 스스로 허리까지 흔들며 밀어 붙였으니 그것이 몹쓸행위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인우가 사정하고 뻗어있는 걸 본 규형이 싱글싱글 웃으며 자기도 해달라고 했을 때 인우는 밀려오는 불길함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랬다. 차규형은 그 후로 무슨 거리만 생기면 그 펠라라는 놈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말솜씨로 인우를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과연 조폭의 무대뽀정신이 잘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어젯밤에도 일을 나가기 전 차규형은 ‘약속했던대로(약속이 아니다. 협박이다) 영어단어 50개를 막힘없이 썼으니 해달라’고 했고 인우는 녀석의 비싸 보이는 짙은 감색 정장의 지퍼만 지이익 내리고는 입꼬리를 들어 웃는 얄미운 면상을 감수하며 녀석의 다리사이로 기어 들어가 얼굴을 묻어야만했다. 그에 반해 인우는 아깝게 1개의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4개의 단어가 적혀 있는 자신의 답안지를 들고는 실실 쪼개는 차규형의 앞에서 약속했던대로(?) 스스로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언제 약속한거냐고 따지고 화를 냈던 것이 얼마 전 일이었다. 규형은 조폭답게 지장까지 찍혀있는 각서를 내밀었고 인우는 당시 자신이 규형의 놀라운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의 몸을 산채로 저당 잡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젠장...”

안하던 욕을 내뱉는 인우. 옆에서 현기가 벌벌 떤다. 기세 좋게 쿨쿨 잠들어 있는 중건의 등짝을 쏘아보다가 인우는 그 넓직한 등에 살짝 이마를 대고 기대버린다. 이상하게도 중건이 녀석에게는 아무 경계심 없이 다가갈 수가 있다. 왠지 마음도 편하고...인우는 뒷통수에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마음속으로 웃는다. 차규형이 질투의 오라를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인우의 작은 복수였다.   

   

“-3이다.”

“아니. -2야.”

인우와 규형은 서로 노려보았다. 인우는 아무리 자신이 제일 약한 2차함수일지라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3개월 밖에 안된 차규형에게 지리라는 생각은 아예 논외였다. 규형은 무심한 얼굴로 -2를 주장한다. 왠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틀리면 조금 있다가 체육 도구실에서 펠라 해줘.”

뻔뻔스러운 자식. 사기꾼. 나쁜 새끼. 빌어먹을 놈. 인우는 요 근래 가장 분노한 모습이었다.

학습지를 들고 벌떡 일어서서 현기와 녀석의 짝인 철민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음? 인우. 무슨 일이야.”

“...표...표정이 무서워..”

갑자기 두 사람의 책상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은 인우의 비장한 눈빛.

“친구들, 나의 체면이 달려있다.”

무슨 말인가...현기와 철민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거 답. 뭐냐.”

규형과 실랑이가 일어났던 문제를 가리키는 인우. 그 문제로 좀 전까지 머리를 맞대고 있던 두 사람답게 동시에 답이 나온다.

“-2”

“-2”

인우는 쓰러졌다.

“이, 인우야!!!”“조인우!!!”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둔 시점에서 명성고등학교 유도부가 전국 대회에 출장하게 되었다. 공중파 TV로도 중계를 해주는 터라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서 1학년 전체가 수업을 현장학습으로 대체하고 경기를 응원하러 왔다. 1학년 3반 학생들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수업을 빼먹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같은 반의 박중건이 1학년으로서는 유일하게 전국대회의 주전 멤버로 출장하기 때문이었다. 굳이 경기장 앞에서 반장이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다 해도 열혈 1학년 3반은 빠질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귀찮게 시리 정말. 왜 이런 곳을 쫓아다녀야 되는 거야.”

“야. 계명아. 니가 아무리 애교심이 눈꼽만큼도 없다손 쳐도 교실에서 따분한 수업 듣는 것 보다 이게 낫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투덜거리는 계명의 머리를 톡톡 치며 병욱이 싱글벙글 웃는다. 계명은 병욱의 손을 탁탁 쳐내며 목소리를 높인다. 

“옛날 같으면 이런 거 오지도 않았잖아. 너나 규형이나 이상해졌어. 다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자신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계명을 내려다보며 병욱은 조용조용 말했다.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러지. 왠지 밀도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냐. 남들이 하는 것도 해보고. 난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계명은 병욱의 말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하며 계명의 시선이 멎은 곳은 언제나처럼 무료한 표정의 규형이었다. 쌍둥이들에게 뭔가 말하고 있던 규형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더니 무언가를 놓치지 않고 주시한다. 냉랭하던 표정에도 온기가 맴돈다. 분명 저것이 병욱이 말한 ‘난 제법 괜찮다’라는 느낌일게다. 하지만 계명은 싫었다. 규형이 변화하는 것이 싫었다. 저렇게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더 이상 난로인 자신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 아닌가.

계명은 규형이 바라보고 있는 반장을 노려본다. 시합이 열리는 체육관으로 질서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이들 중에 자신의 반만을 쏙쏙 골라내 종이에 출석체크를 하고 있다. 규형이 어떤 녀석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구는 반장. 그리고 규형의 시선도 언제나 반장에게 가있다. 저 녀석이 정말 싫다. 꼴보기도 싫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계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이제는 계명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저 반장을 규형의 곁에서 끌어내려야 겠다. 어떤 비열한 수를 쓰더라도. 물론 규형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고마워 할것이다. 규형을 약하게 만드는 저 반장을 일찍 쳐내게 해준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아낄 것이다. 확실하고 명확한 사실이다.

“역시 전국대회라 규모가 다르구나.”

“그러게. 카메라도 많고. 중건이 떨리겠다.”

“행여나! 이런 거 한 두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에 그놈이 쫄 리가 없어.”

  

철민과 진유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인우는 혼자 속으로 또 소설을 쓴다. 진유는 역시 중건이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중건이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중건이도 모르고 진유 스스로도 모른다는 사실이 또 재밌는 부분이다. 아마도 몇십년이나 지나면 알게 되려나. 지금은 맨날 유치원 애들처럼 토닥토닥 이기만 하니 원. 

인우가 그렇게 생각에 잠긴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여러번의 시합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박중건이 시합장에 들어섰다.

“화이팅!! 박중건!!!”

“명성고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뚱땡아! 너 지면 학교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마!!!”

주변에서 응원이 쏟아진다. 진지하게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는 중건의 얼굴은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반대로 믿음직스러웠다. 맨날 까불고 장난치던 녀석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에 스포츠맨이란건 저런 거구나..하며 병욱은 팔짱을 끼고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를 관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내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을 때 거기서 느껴지는 매력이란 뒷덜미가 오싹해질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맨날 자신의 글을 보며 새빨개지던 중건이 놈이 저런 한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즐겁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해서 병욱은 마른침을 살짝 삼킨다. 괜찮다... 괜찮은 느낌이다. 정말. 병욱은 간만에 찾아온 봄바람에 자신이 한 녀석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병욱을 바라보고 있던 진유는 조금은 분하면서도 묘한 눈으로 녀석을 보다가 다시 시합장으로 시선을 돌려 중건을 응원했다.

시합은 흥미진진했다. 명성고는 다음시합 출전권을 따냈고 전국 4강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 중이었다. 인우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까 싶어서 자리를 떴다.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걷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가로 막는 몇 명의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네가 조인우냐? 명성고 1학년 3반 반장이라는?”

이라고 인우를 가로 막고 선 녀석들 가운데 굉장히 냉막하고 싸늘하게 생긴 놈 하나가 물었다. 인우는 난데없이 자신이 누군지 물어보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들의 조인우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아이언 마스크의 소유자다.

“뭐야. 네가 조인우냐고 묻잖아!”

“감히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

“차규형이 이뻐 한다고 우리 따위는 상대도 안한다 이거냐?”

더더욱 인우를 혼란에 빠뜨리는 말을 하는 무리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인우는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 태연한듯한 모습이 인우앞에 서 있는 패거리들을 더욱 열받게 한 모양이었다.

“뭐야! 지금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XXX! 잡아! 잡아 죽여!! 저XX!"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인우는 머리보다 몸이 반응했다. 이 무리들이 입고 있는 교복이 옆옆학교 우정고 교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신을 잡으러 달려드는 주먹들 사이를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피하고 또 피한다.

하지만 싸움이란 것은 경험이라고 하였던가. 인우가 아무리 문무양면에 뛰어나다 할지라도 이렇게 다수의 살기 앞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적은 없었다. 결국 조금씩 여기저기 무리들의 주먹에 스치더니 처음에 인우에게 말을 걸었던 그 싸늘한 면상놈에게 한방을 허용한다.

“윽!!”

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은 평생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것이었다. 인우는 눈앞에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주르륵 자신의 몸이 땅으로 쳐박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날아오는 발길질을 열심히 몸을 굴려 피한다.

“그만!”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싸늘한 면상녀석이 분노에 휩싸인 무리들을 진정시키고 땅에 주저앉은 인우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 더 이 반장이라는 반반한 녀석을 손봐주고 차규형을 불러내야겠다. 우정고등학교의 소위 ‘일진’이라는 이 녀석들이 거액의 유흥비를 조달받고 명령받은 일이었다. 차규형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려라. 분명 우정고의 힘만으로는 불가한 일이었지만 이 싸늘한 인상을 가진 녀석의 생각은 달랐다. 전해 받은 돈이 워낙 거금이어 포기할 수 없던 것도 있었지만 자신도 우정고에서 손꼽히는 주먹인 만큼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차규형을 누르고 싶은 승부욕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녀석의 주변 놈 하나를 족치는 것. 하지만 이미 알려진 대로 항상 차규형과 지내는 안병욱이나 정신, 정전 쌍둥이 형제는 보통의 인원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반장. 겁도 없이 차규형과 잘 지낸다는 이 이상한 녀석을 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규형은 뭔가 신경이 거슬리는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유도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를 찬찬히 둘러본다. 규형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을 느낀 쌍둥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다. 게다가 쌍둥이들의 지각 능력은 규형보다 뛰어나다. 

“왜 그래?”

병욱 역시 규형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 뭔가 기분이 안 좋아서.”

규형의 느릿한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계명의 어깨가 살짝 흔들린다. 

“뭐야. 설마 이렇게 애새끼들이 많은 곳에서 무슨일이야 있을라고.”

병욱의 말에 규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가 아니라.”

규형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반장.....!”

축 늘어진 몸을 낯선 두 사람에게 부축당해 마치 질질 끌려가듯 경기장 밖으로 나가고 있는 뒷모습. 규형이 반장의 모습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저건 인우였다. 그때 쌍둥이들이 바람처럼 규형에게 달려왔다. 신이 규형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다. XX...평소에 잘 하지 않는 강도 높은 욕설을 짧게 내뱉고는 정신없이 규형이 몸을 날린다. 쌍둥이들 역시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뒤를 따른다. 그것을 보던 병욱은 뭔가 인우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리고 아까부터 눈에 띄게 떨고 있는 계명에게 싸늘한 시선을 돌렸다.

체육관 부지에 듬성듬성 세워져 있는 건물들 사이를 몇 번인지 지나쳐오자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공터가 나왔다. 인우는 제대로 된 한방을 얻어맞아 눈앞이 핑핑 돌고 산소가 부족한 상태로 끌려온 나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공터에 도착하자 인우를 메고 온 녀석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그를 내동댕이친다. 인우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호흡을 하고 신형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스물스물 불안한 기운이 저 의식너머로부터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퍽!!!”

인우는 그 순간 다리를 걷어차였다. 지독한 아픔이었다. 덕분에 호흡이 돌아왔고 정신을 되찾았지만 다리에 머물러 있는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가 용의하지 않았다. 인우는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겨우 몸을 일으킨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의 머릿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차규형에게 볼일이....있는건가....?”

인우의 물음에 이야기 전담으로 설정되어 있는 건지 싸늘한 면상을 한 놈이 말한다.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여러명이서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야비하게 생겼다고 인우는 생각했다.

“그렇지. 안 그렇다면 우리가 반장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 수 있겠냐.”

그렇지만 규형 혼자에게 목적이 있다면 왜 이렇게 많은 인원을 끌고 온거냐..라고 순진하게 묻지는 않았다. 인우는 규형이 싸우는 것을 단 한번 본적이 있었다. 그때의 충격도 충격이겠거니와 강한 자와 겨루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중건이 녀석이 언젠가 지나가듯 한말도 문득 떠오른다. ‘차규형을 눕힐 수 있는 녀석은 어쩌면 전국에서도 몇 명 없을지 몰라.’라고.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내심 규형이 처해진 상황이 얼마나 황폐한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규형이....너희들에게 뭔가......했나?”

인우의 어조 없이 단정한 목소리에 또 주변의 놈들은 핏대를 세우고 덤벼들려고 했지만 그 싸늘한 면상이 가로 막는다.

“아아. 우리는 부탁을 받은 거거든. 뭐 개인적으로도 차규형과 붙어보고 싶었고.”

예상과는 조금 다른 대답에 인우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원래대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인우를 끌고 온 녀석들은 정말 이 반장이라는 놈이 강심장이거나 아니면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느냔 말인가. 이 많은 인원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저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놈은 난생 처음 보았다.

“불쌍하다... 규형이...”

그리고 순간 인우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에 그들 모두가 소리 없이 얼어붙었다. 불쌍하다고? 누가?.... 

하지만 인우는 정말로 규형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 녀석들에게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필시 규형은 이놈들이 누군지도 모를거다. 어쩌면 이 녀석들을 사주한 그 누군가도 규형은 모를 수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떠나간다. 인우는 어느샌가 핏물이 흘러나온 입술을 손등으로 훔친다. 만일 자신이 이꼴이 된게 차규형 때문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면 분명 인우 역시 그 사람과 예전같은 친분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조인우 자체가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고.

“....일단은 차규형을 불러내 줘야겠어. 반장.”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싸늘한 면상 놈이 더욱 더 창백한 표정을 하고는 인우에게 천천히 걸어 왔다.

“어디야 도대체!”

“왼쪽.”

“다음에 보이는 골목에서 오른쪽.”

규형은 쌍둥이들이 불러주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쌍둥이들은 뭔가 소란스러운 비명과 고함, 다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규형을 네비게이션 하고 있었다. 규형은 반장이 약한 녀석이 아니란 것을 안다. 자신이 달려갈 때까지 충분히 버티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정은 짐작이 간다. 반장이 원한을 만들고 다닐 녀석도 아니고 그렇게 짐작 끌려가듯, 푸대자루 끌려가듯 잡혀갈 일을 한 적이 없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사방이 온통 적이고 비호의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곳만 산더미다. 반장을 노리지 않으란 법이 없다. 힘이 없으면 비겁해지기 마련이다. 비겁한 놈들이 뭐든 못하겠는가. 규형은 주먹을 힘껏 그러줜다. 반장은 자신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반장은 자신에게, 자신의 이 건조하고 재미없는 인생에 유일한 습기가 되준 사람이다. 어디가 잘못될거라고 생각하니 눈에서 불길이 일고 심장이 터질것 처럼 뛴다. 

“정신차려.”

정전 녀석이 이성을 놓치려 하는 규형의 어깨를 툭 친다. 쌍둥이들도 규형에게 반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지난번 우정고 녀석들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핍박했던 때부터 어쩌면 이런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장은 분명 규형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쉽게 표적이 되고 노출이 된다면 더 이상 규형의 옆에 있는 것이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서로에게 더 좋을 수도 있고. 몸은 정신없이 뛰고 있으면서도 머리 속은 복잡한 쌍둥이들이었다.

“젠장!! XXX!! 저XX들은 또 뭐야!!!”

“잡아! 잡으란 말이야!!!”

규형과 쌍둥이가 소음이 들려오는 공터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까만 아우디였다. 미끌어지듯 공터 옆 한길가에 와닿은 차속으로 익숙한 교복과 낯익은 뒷통수를 가진 녀석에 억지로 구겨 집어넣어지듯 실렸고 차는 망설임없이 그 장소를 떠났다. 순식간의 일이 었다. 규형과 쌍둥이가 쫓아가야 된다는 생각조차 못할 만큼 빠르게 차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여기저기 병신이 된 우정고 놈들뿐이었다. 규형은 아무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쌍둥이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신음하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곧 그들의 리더인 싸늘한 면상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을 질질 끌고 규형의 앞에 다가왔을 때 녀석의 얼굴에는 좀전까지 만연해 있던 비열한 미소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규형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 놈의 손목을 잡고는 엄청난 아귀힘으로 단박에 뼈까지 뚝 부러뜨렸다.

“으악!!!!!!”

처절한 비명에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우정고 녀석들의 신음소리가 동시에 사라졌다. 공터에는 순식간에 공허한 침묵이 감돌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싸늘한 면상 녀석의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 뿐이었다.

“말해. 어떻게 된 일인지.”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해버린 규형대신 쌍둥이들이 싸늘한 면상에게 물었다.

“모..몰라!.. 우리는.. 우리는 그저 차규형을 손봐주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야!!”

그녀석의 겁에 질린 비명에 규형은 이번엔 녀석의 다리를 밟는다. 여차하면 다리도 부러뜨릴 기세였다.

“돈을 받은 거겠지?”

“마,맞아!! 그것 뿐이야! 그것 뿐이라고.”

쌍둥이들은 차근차근 그들이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한다. 침착한 목소리와 짓눌릴것 같은 압박에 뭐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싸늘한 면상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자신의 다리를 짓밟고 서서 언제든 부러뜨릴 수 있다는 살벌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차규형이었다. 저렇게 무서운 놈인지는 몰랐다. 뼈 정도야 부러지면 다시 붙이면 된다지만 저 놈의 저 미친 것만 같은 얼굴은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면 자신에게 돈을 주고 사주한 녀석의 이름을 대야 했다. 애초에 그것은 절대 금기라고 약속했던 터였지만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 한데 약속 따위 지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누구에게 받은 거냐.”

규형이 누르는 압력의 정도가 점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자신을 죄어 오는 듯해서 싸늘한 면상은 내지르듯 이름 하나를 뱉는다.

“며,명성고....연.... 연철민이라는 놈이다....”

“계명아.”

“...으,응?!”

“뭘 그렇게 놀라냐.”

병욱은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계명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떨고 있는 저 녀석의 저 얼굴을 본 지가 벌써 2년이 지났구나..라고 병욱은 되뇌어본다. 병욱은 기억하고 있다. 계명이 놈이 지난번 저런 얼굴을 했을 때 몇 명이나 다쳐야 했는지를 말이다. 규형은 미처 모르고 있는 듯 했지만 병욱이나 쌍둥이들은 알고 있다. 계명이 녀석이 얼마나 규형에게 집착하고 있는 지를.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덮어두고서라도 그 집착은 계명으로 하여금 궁극의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 규형이 특별히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규형에게 친구로서의 믿음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 병욱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명은 규형에게 집착하면서도 녀석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하기 때문에 더욱 믿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몇년전 계명은 규형에게 목을 매며 따라다니던 여자애 하나를 혼자 독단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본인인 규형조차도 아무 상관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헌데 계명은 단지 그 여자애가 규형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고 해서, 규형이 그 여자애를 안는 걸 봤다고 해서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사람을 썼다. 그것도 정말 나쁜 일이었다. 본인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는 건 녀석이 돈 많은 집에서 자랐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병욱은 그때 처음 계명에게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후에 그 여자애 오빠에게 계명이 린치를 당한 것에 대해 녀석을 동정하지 않았다. 물론 계명이 사실은 온정 있고 착한 녀석이란 건 알고 있다. 다만 규형의 일에만은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병욱도 오래 계명을 봐왔기 때문에 계명이 당한 일에 화가 났다. 쌤통이긴 한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화는 났다. 그래서 쌍둥이들과 함께 가서 그대로 복수를 해주었다. 계명은 그때 그 오빠 놈에게 지독하게 당해서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병욱과 쌍둥이들은 그것을 믿었다. 실수라는 것은 누구나 할수 있다. 그것을 다시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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