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0)

쌍둥이들이 병욱을 불렀다. 규형을 거치지 않고 병욱을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서 중건과 장난을 치고 있던 병욱은 급하게 쌍둥이들을 따라 나섰다. 녀석들이 병욱을 데리고 나온 곳은 학교 뒷산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손님이 와 있었다.

“차규형은 어딨냐?!”

“XXX 우리는 차규형한테 볼일이 있다고!”

처음 보는 무리였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하나 같이 덩치가 굉장했다. 병욱은 휘파람을 불었다. 상황이 대충은 짐작 간다. 날카로운 지각능력을 가진 쌍둥이들은 자신들이 주시당하는 것에 민감했다. 주시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쌍둥이들이 저 녀석들의 애들 몇 명을 손봐주었겠지. 그제서야 정체가 들통 난 것을 안 놈들이 본래 목적인 차규형과 한판 붙으려고 겁도 없이 명성고로 쳐들어 온 것을 테다. 병욱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겁쟁이 놈들. XX해서 XX하기 전에 꺼지시지?”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병욱의 도발에 머리에서 김을 내뿜으며 덤벼들려는 무리들 중에 차갑게 생긴 녀석 하나가 냉정한 어투로 물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차규형에게 있어. 녀석을 불러내.”

잠자코 규형을 불러낼 거라면 쌍둥이들이 병욱에게만 말했을 리가 없었다. 쌍둥이들이 황계명은 왜 데리고 나오지 않았는지가 약간 궁금했지만 지금은 허튼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목적이란거 뻔하지 않아?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와서 비겁하게 뒤치기나 할 심산이었겠지. 그런 피라미 놈들 정도는 우리로도 충분해.”

쌍둥이들이 감각의 천재라면 병욱은 도발의 천재였다. 단순한 놈들은 벌써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곤 이를 갈았다. 병욱은 그제서야 저 놈들의 교복이 옆 학교인 우정고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규형이는 사실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관계로 몸이 두 개라면 좋을 정도로 바빴기에 이런 코흘리개들인 다른 학교와 어떤 원한 관계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다닐 규형이 아니었다. 이렇게 우락부락한 놈들이 잔뜩 쳐들어와 덤빌 일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한 말이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저쪽의 저 차가운 면상을 하고 있는 놈은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 같으니 쉽게 도발이 통하지 않을 테고 결론은 하나였다.

“XXXX, XX지 말고 덤벼.”

다 때려눕히고 물어보면 되는 거다. 병욱의 한마디를 끝으로 고함소리와 욕설이 터져 나오며 정신없이 인영이 섞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냐. 뚱땡아.”

“엑!!! 오진! 누가 마음대로 훔쳐보래! 프라이버시 침해다.”

“프라이버시는 무슨..”

진유는 뭔가 열심히 보고 있는 중건의 어깨에 와락 매달렸다. 답지 않게 기겁해서는 프라이버시 어쩌구를 떠들어대는 박중건. 진유의 양미간이 좁혀진다. 역시나 며칠째 중건이 매달리고 있는 저 안병욱의 PDA. 진유는 기분이 나빴다.

“그게 대체 뭐야. 책이라면 질색 팔색을 하던 놈이 뭔 글을 그렇게 재밌게 보는건데?”

진유의 가시돋힌 말에 중건은 땀을 뻘뻘 흘렸다. 예전부터 이 조그만 놈이 하겠다고 덤비면 당할 수 없는 게 중건이었다.

“뭐... 읽다보니 재밌더라고...”

중건은 말을 흐리며 얼른 자신의 서랍 속에 병욱의 PDA를 집어넣는다. 싱글싱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진유를 달래보려는 중건. 진유는 이래나 저래나 중건에게 약하기 때문에 금방 마음이 풀린다. 확실히 요새 들어 진유와 사이가 소원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중건이었다. 아아. 베스트 프렌드에게 무관심했다니. 확실히 너무 에로한 날들을 살았구나.. 중건은 속으로 탄식했다. 병욱의 글은 확실히 대단했다. 녀석이 서지 않게 조심하라고 할 만큼 화끈했다. 이것이 처음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스토리까지 제법 탄탄해서 ‘다음엔 누구를 덮치는거냐!! 차씨!!’라는 기분에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으로 매일 밤 에로에로한 장면들의 꿈을 꾸고 다음날 과다한 정액분출로 유도부에서도 성적 부진. 가장 심각한건 에로한 꿈에 자신의 친한 친구 놈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전까지는 주로 진유가 눈물을 잔뜩 머금고는 “하지마! 이 뚱땡아! 무겁단 말야! 아파!”라며 등장했는데 지난번 인우 놈에게 뽀뽀를 한번 받은 뒤로는 간혹 조인우 그 떡대 같은 놈이 거칠게 당하며 신음하는 꿈까지 꾸게 된 중건이었다. 정말 정신 건강상 좋지 않았다.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실제로 학교에 와 녀석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최악이었다. 아아. 이제 끊어야 되는 건가. 중건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사정을 모르는 진유는 이 바보 녀석이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옆자리에 앉아서 찬찬히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만약 중건의 망상 젖은 꿈을 진유가 한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날은 박중건 이 세상 하직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건아. 안병욱... 짝으로.. 괜찮냐..?”

진유의 나지막한 물음에 중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유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어렵게 말했다.

“그 녀석... 차규형하고 친하잖아. 무서운 일 같은 거 하고 다니고 그러는 거 아냐... 괜히 친하게 지냈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진유의 말에 중건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병욱이 그렇게 나쁜 놈 아니던데. 얘기도 잘 통하고.”

에로소설을 마구 써대서 그렇지. 

“그렇지만...”

진유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중건에게 차마 ‘그런 불량한 놈들 하고는 놀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중건이가 병욱이와 친해지고 인우가 규형과 친해지면서 한층 친구 사이가 소원해진 것을 느끼는 진유였다. 중건이 놈이야 워낙 둔한 녀석이라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을 테고, 현기야 속마음을 잘 밝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철민이 저놈은 다를 것이다.

진유는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보고 있는 연철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민은 완고한 면이 있어서 차규형과 같은 녀석들하고는 말도 섞지 않는다. 친하게 지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 저렇게 생각 없이 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철민이 친구로서 가장 믿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인우였다. 현기와도 친하게 지내지만 확실히 인우에게 보이는 철민의 태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인우역시 중건이와 쌍벽을 이루는 둔탱이라 모를지 몰라도 진유는 느끼고 있었다. 철민은 신중한 녀석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있지만 진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인우를 독점하고 싶어 한다.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끼리 있어도 녀석의 시선은 인우에게 가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저토록 강하게 그것을 바라는 철민을 진유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요 근래 차규형은 달라졌다. 날카롭게 죽일 듯 뿜어대던 살기도 사라지고 소문처럼 사람을 다치게 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가끔 공부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것은 인우가 옆에 버티고 있을 때 만이다. 그랬다. 인우가 차규형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규형 또한 인우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조인우가 어떤 녀석이던가. 감정을 쉽게 잘 나타내지 않는 철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이다. 물론 아주 순수한 녀석이라 그 속안이 깨끗한 시냇물처럼 다 들여다보여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다. 자기는 끝까지 숨긴다고 숨기지만 녀석의 순진한 모습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녀석을 좋아한다. 그래도 진유는 언제나 조인우가 답답한 녀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인우가 요새 들어 부쩍 감정을 표출해낸다. 예전에 인우가 교실에서 한번 울었던 적이 있다. 눈물 한 방울 뿐이었지만 대단한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인우는 변화하고 있었다. 진유는 그 변화가 좋았다. 차규형에게 일어나는 변화나 인우에게 일어나는 변화.. 모두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느껴질지는 의문이었다.

“안병욱.......! 정전! 정신!”

“여어어! 우리 이쁜 반장! 도서관 가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인우는 책가방을 챙겨들고 도서관으로 가고 있었다. 해지는 복도를 혼자 걷고 있는데 저 끝에서 익숙한 녀석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 반 애들이구나 해서 가까이 가보니 절뚝절뚝 걸어오는 게 안병욱과 두 쌍둥이들이었다. 인우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세 사람 꼴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흙투성이의 교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기저기 튄 빨간 피에다가 상처들은 무척 심해보였다. 

“벌써 수업 끝난 거야? 젠장. 이거 결과 처리 자꾸 당해서 수업일수 모자라게 되는 거 아냐..쪽팔리게 유급이라도 하면 골치 아픈데.”

병욱이 투덜댔다. 차규형 패거리들 중에 가장 출석일수에 애착을 보이는 병욱이가 할 만한 말이다. 인우는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평소모습 그대로 일단 가장 심해보이는 병욱을 부축했다.

“야. 반장아. 옷 더러워져.”

이와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병욱은 인우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조인우 소 같은 놈은 꿈쩍도 하지 않고 병욱을 부축한 채 천천히 걸었다.

“교실에서 차규형과 황계명이 기다리고 있더라. 말도 없이 어딜 간거냐고 걱정하던데.”

“하하하! 규형이가? 걱정은 무슨. 어디 가서 괜한 놈들이나 패고 다니지 말라고 설교하더만.”

세 사람이 교실 앞까지 다다랐을 때 인우는 병욱의 부축을 풀었다. 계명이 안에 있는데 들어가서 또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양호실에서 상처에 바를만한 약이라도 좀 얻어다 주마.”

“에에? 바르는 약은 반출 안 되는 거 아냐?”

늘 상처를 달고 사는 병욱인지라 잘 알고 있다. 양호실 규칙이 그러하다. 먹는 약만 반출이 가능하고 바르는 약은 직접 가서 치료를 받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뻔히 알고 있을 인우는 피식 웃으며 양호실 쪽으로 달려간다. 

“난 반장이잖냐.”

그 말에 병욱과 쌍둥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직권남용 하겠다는 뜻?

한참 뒤..

“저놈... 괜찮은데...?”

쌍둥이 중 한명인 정신이 말한다.

“....어쩐지...좀...귀여워.”

이번엔 정전이 말했다. 대체로 사람에 대한 코멘트를 별로 하지 않는 쌍둥이들의 이례적인 평가(?)에 병욱은 깔깔대고 웃다가 배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말야.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어투에 묻어나게 되거든. 그런 걸 반언어적 표현이라고 하지.”

국어시간이었다. 훤칠한 키의 젊은 국어선생님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수업을 하고 있었고 점심시간 후의 5교시 였지만 졸고 있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인우 역시 굉장히 듣기 편한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늘 그랬듯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오진유가 박중건에게 ‘야 이 뚱땡아!’ 한다고 해서 진짜 중건이에게 너 뚱뚱하다라고 욕하는게 아닌 거 우린 잘 알잖아? 그건 바로 진유가 말하는 어투 때문인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당사자인 중건마저도 껄껄 웃어버리고 만다. 인우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아주 작은 말버릇까지 주의 깊게 듣는 국어 선생님의 관찰력에 경의를 표했다. 10개반이나 수업을 맡고 계신 분이 쉽게 들 수 없는 예였다.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그럼 이러한 반언어적 표현에 유의하면서 옆 짝과 함께 21쪽의 대화를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시끌 시끌 너도나도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인우는 물끄러미 자신의 짝인 차규형의 등짝을 내려다본다. 녀석은 오늘 1교시부터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쿨쿨 완벽한 수면상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흔들어서 깨워보려고 했겠지만 오늘만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제 인우는 한밤중에 차규형의 전화를 받고 집 앞으로 뛰어 나갔었다. 녀석은 무척 기분이 나빠 보였다. 밤에 일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술에 반쯤 절어서 비틀거리며 인우를 불러낸 규형은 한참이나 그 어두컴컴한 아파트 현관 앞에서 인우를 끌어안고 있었다. 덩치도 커다래갖고 어린애처럼 달라붙는 녀석을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은 낮에 잔뜩 다친 병욱과 쌍둥이들을 인우도 보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XXXX...죽어도 입을 안열더라니까. 그놈들. 어떤 XX들에게 맞았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말야...”

그대로 홧김에 술쳐먹고 온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인 것 같다면서. 인우는 규형이 요새 마음먹고 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인우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밤일은 아버지를 돕는 거라 그만둘 수 없다고 해서 그럼 출근 전까지는 열심히 하라고 잠도 못자는 놈에게 야박하게 말했었다. 뒷골목 조폭같이 차려입고는 영어독해문제집을 풀고 있는 규형의 모습은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규형의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했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주 화를 냈다. 이렇게 몸을 혹사시킬 만큼 술을 먹는 것 또한 한 방편이었다. 인우는 병욱이나 계명, 쌍둥이들이 지금의 규형에게 어떤 불만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모쪼록 규형이 학업에 충실하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만일 그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거라면 그건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차규형이 이놈. 아침부터 한번도 안깬거지?”

인우는 문득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병욱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수업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래... 어제 좀...”

인우의 말에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형이 위에 술을 퍼부을 때 옆에서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병욱이었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알코올 냄새가 나서 병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규형이가.... 마음이 안 좋은가봐.”

인우가 조금은 흔들리는 눈으로 병욱에게 말했다.

“거참. 그런 건 신경도 안쓸 것 같이 굴어 놓고는. 의외로 약한 놈이네.”

병욱은 씨익 웃으며 엎드려 있는 규형의 넓은 등을 팡팡 때렸다.

“사내놈이 한번 하겠다고 칼을 뽑았으면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그까짓거!하면서 해내야지. 허약한 놈 같으니.”

병욱의 말을 듣고 있던 모양인지 어느샌가 인우네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쌍둥이들이 고개를 끄덕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거들랑 니네 아버지 클럽에서 한턱 쏘던가. 히히.”

병욱은 규형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고는 룰루랄라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인우는 병욱이 녀석의 그 잘생긴 얼굴에 울긋불긋하게 물든 멍과 쌍둥이들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규형의 뒷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넌 좋겠구나. 저런 다정한 친구들도 다 있고 말이야....

“얘들아! 오늘 체육시간, 농구한다니까 체육관으로 오란다!”

그때 체육부장인 중건이가 교실에 목만 밀어 넣고 전달사항을 외친다. 인우는 체육복을 갈아입으면서도 규형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장행렬? 무슨 중학생도 아니고...”

“몰라. 1학년들이 매년 하는 전통이래. 아무튼 종목 선수 정하는 거랑 진행은 우리 체육부장들이 맡아서 하니까 반장들은 가장행렬만 준비하라고 한다. 방금 듣고 온 얘기야.”

체육관. 체육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공만 휙 던져주고는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어자피 사내놈들은 운동 못해서 안달이니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쌍둥이들이 한쪽 팔에 붕대감고도 놀라운 솜씨로 이리저리 공을 몰고 다니며 아이들의 환호성을 받는 걸 구경하고 있던 인우는 땀범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중건이에게 새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몇 주 뒤에 있을 체육제때 각반별로 하게 될 가장행렬에 대한 이야기였다. 체육제이니만큼 행사자체는 체육부장들이 주관한다는 좋은 소식과 함께 귀찮은 가장행렬 따위를 준비해야 하는 난감한 소식도 따라온 것이었다. 

“그럼. 학급 회의 할거냐?”

‘학급회의에서 무슨 가장행렬을 할 건지 정할 거냐?’라는 중건의 물음에 인우는 ‘그래야 겠지..’라고 말하면서도 저 소악마들 같은 우리 반 녀석들은 분명 얼토당토않은 기획따위를 내놓으며 머리 아파하는 반장을 곯리는 재미에 좋아라 할게 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부터 인상이 찌푸려진다.

“근데.. 이놈은 하루 왠 종일 왜이래?”

1학년 3반의 구성원 중 차규형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한사람인 중건이 인우의 무릎을 베고 길게 뻗어 자고 있는 규형을 가리키며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몸이 아프대.”

“행여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농구하는 아이들 틈으로 사라지는 중건이었다. 

“반장.... 또 바쁘겠네...”

그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규형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깼냐..라고 물으며 인우는 규형의 퉁퉁 부은 눈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차가워서 기분 좋다고 하는 규형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짓는 인우였다. 몸이 이 모양 이 꼴인데 결과내면 안된다고 따라 나온 녀석이었다. 인우는 그가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기분 좋았다.

“너랑 공부할 시간은 있다.”

인우의 말에 규형은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건방지게 말했다. 키득거리며 웃는 인우의 웃음  소리를 듣더니 또 좋다고 한다. 도대체가 좋다는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해대는 건지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인우가 타박했다. 물론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말하는 규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뭐야.. 저거. 눈꼴셔서 원..”

“.....”

진유는 혀를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체육관 구석의 인우와 규형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베알이 꼬였나보다. 옆에 있는 철민과 현기 역시 별로 마음에 드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인우가 차규형에게 꽉 잡혀 있는 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우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차규형이 무서워서 갈수도 없었다. 인우에게는 배부른 사자처럼 온순하기만 한 차규형이지만 인우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이전과 같은 냉기가 살을 에일 듯 뿜어져 나와서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중건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진유였다. 진유는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 세고 거친 상대들과 끊임없이 대련을 해온 중건이 이미 생체병기나 마찬가지라는 건 미처 몰랐다. 기도부터가 보통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 패스! 패스!!”

“슛! 슛! 안병욱! 나이스!”

진유는 불량 주제에 애들 틈에 자연스레 껴서 농구를 하고 있는 병욱 또한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특별히 사슬로 모두 연결 되어 있는 피어싱을 하고 나온 안병욱은 시퍼렇게 멍든 바둑이 꼴을 해가지고 실실 거리며 코트에서 공을 몰고 다녔다. 그러다 운 좋게 슛을 성공시키고는(진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같은 팀인 중건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걸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자신도 농구를 하러 뛰어가 버렸다. 

“...저...저기... 철민..아?”

철민과 둘만 남은 현기는 조금 불안한 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철민의 시선은 이미 한곳에 꽃혀 있었기 때문에 현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철민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기에 철민은 평소의 냉정하고 이성적인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차가운 눈을 하고는 곧 분출할 듯 화를 짓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현기도 철민이 인우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인우를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철민도 그러하단 걸 안다. 그래서 요새의 상황에 철민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현기는 인우와 이야기를 많이 못해서 서운할 뿐이지 화가 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우가 좋은 친구를 사귄다면 자신도 친구로서 기쁠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철민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을 듯 했다.

“인우야. 도시락은 안 싸도 돼?”

“괜찮아요.”

미안한 듯 용우가 집을 나서는 인우에게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소같은 자신의 막내 동생은 괜찮다는 말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체육대회나 소풍 때 단 한 번도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던 막내였다. 그런 녀석이 고등학교 체육제때 도시락을 싸갈 리가 없었다. 용우는 동생이 직장일로 바쁜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꼭 뭐라도 사먹으라고 용돈을 쥐어줘도 마음은 불편한 큰형 용우였다.

“앗! 조인 발견!”

“인우야아아아!!!

등교길에 인우는 중건과 진유를 만났다. 물론 체육제라 할지라도 아침 자율학습을 빼먹지 않는 인우가 집에서 나온 시간은 여전히 7시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녀석들을 만났다는 것에 인우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중건이 녀석이 체육부장이고, 분명 아침 일찍 가서 준비할 것이 많을 거란 사실을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진유는 중건이 놈이 아침부터 전화해서 깨워 데리고 나왔을 것이고. 혼자 잠못자는 건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여간 심술궂은 녀석이다. 진유도 여전히 중건이 놈에게는 무르기만 하고. 

셋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하며 걷다가 진유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인우에게 물었다.

“인우야! 가장행렬 옷은?”

인우가 빈손이라는 것에 놀란 진유의 말이었다. 인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따가 배달해 준다고 했어.”

“아아. 그래? 난 또...”

“이봐이봐. 오진. 너 설마 조인이 너처럼 덤벙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뭐야? 이 뚱땡이 놈이!”

진유가 날아서 발차기를 하자 중건은 등에 얻어맞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그 꼴을 보며 또 좋다고 웃던 진유는 중건이 밑에서부터 뒷덜미를 잡아채서 뒤로 발라당 넘어간다. 어린애처럼 싸우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인우는 ‘여전히 사이가 너무 좋아’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만족해하며 학교를 향해 걸어가 버린다.

명성고등학교의 대운동장은 무척 넓었다. 매년 자매교인 하경여고, 하경여중, 같은 재단인 명성중학교가 합동 축제를 여는 곳이 바로 명성고등학교 대운동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장은 어젯밤 밤새 체육부장들이 그어 놓은 하얀 트랙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운동장의 북쪽 중앙 단상 양쪽으로 뻗어 있는 스탠드에는 영역별로 각반 이름이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본부가 차려질 중앙 단상 아래에는 스코어를 적을 수 있는 미니 흑칠판이 걸려 있고 칠판에는 축구, 농구, 발야구, 장애물 달리기, 200미터, 500미터, 800계주, 2인3각, 하프 마라톤, 응원전, 가장행렬 등 그 날 있을 경기 종목이 끝내주는 명필로 쭉 씌어져 있었다.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고 구름도 한 점 없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로 체육제 일정한번 잘 잡았네 학생회-라며 중얼거리며 인우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갔다. 

명성고는 임원이 많기 때문에 행사마다 반장이 바쁠 일은 없다. 인우는 오늘 가장행렬만 잘 마치면 되는 사명을 띄고 있다. 인우의 예상대로 홈룸(H.R)시간에 나온 아이들의 의견은 중구난방 제각각 이었다. 그것도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들만 불러대는 통에 인우의 골치만 아프게 했다. 게다가 가장행렬을 하는 것은 1학년뿐이라 수험에 지친 선배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라는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에 꼴찌하는 반은 야밤까지 체육제 뒤처리나 하게 될거라는 루머가 도는 바람에 대강할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조인우가 어떤 사람이던가. 공부에 방해되는 것에는 학을 띄는 녀석 아니던가. 그날로 옆학교 학생회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 달 했던 가장행렬 옷을 그대로 빌려왔다. 돈안들고 좋다는 반 아이들의 적극적 찬성을 등에 업고 말이다. 마지막 최후까지 반 녀석들에게 의상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미리 한번 그것을 본 인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만다. 

“야!! 800계주! 얼른 뛰어나가! 진중현! 윤재훈! 야 이XX들 얼른 안 나가?!!”

중건이가 날아다니고 있다. 체육부장이라는 표시인 빨간 캡 모자를 뒤로 뒤집어쓰고 체육제 프로그램이 적힌 종이를 쥔 채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 안됐다...하는 표정으로 진유와 인우, 현기, 철민은 그늘진 스탠드에 나란히 턱 받치고 앉아서 쭈쭈바를 먹고 있었다. 축구 결승전이 방금 끝난 운동장은 모래바람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빨간 모자 쓴 체육부장들이 휘슬을 불어대며 다음 차례인 계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심 먹기 전 마지막 순서인 계주가 끝나면 교실에 배달되어 있는 가장행렬 옷을 입으러 모두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애들의 원성이 벌써부터 귀에 들리는 것 같아서 인우는 무표정한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만든다.

“가장행렬 의상 뭔지 정말 안 가르쳐 줄거야?”

철민의 말에 진유가 맞장구친다.

“가르쳐줘! 가르쳐줘! 안 그러면 나 지금 교실 뛰어 올라가서 보고 온다?”

현기까지 궁금증 잔뜩 담긴 얼굴로 바라보자 인우는 압박에 못이겨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만다.

“우와아아아! 이거...! 이거....!”

“해리포터다...!!!”

“반장아! 반장아! 우리 가장행렬 해리포터야?!”

“이야. 디게 귀엽다. 목도리 봐.”

시끌시끌. 자신의 자리에 하나씩 놓여있는 의상을 뒤집어본 아이들이 떠들어 댔다. 실제 이 가장행렬을 준비한 인우의 친구네 반은 아주 세심하게 망토와 빗자루, 마법지팡이, 목도리, 호그와트 마크가 새겨져 있는 교복에 넥타이, 니트까지 완벽하게 맞췄던 모양이었다. 인우는 자신의 의상을 챙겨들고 슬금슬금 교실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터질 경악성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이거.. 뭐냐....”

“....서...설마.....!!!”

2학년 3반 녀석들중 정확하게 반이 순간적으로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채 고함을 질렀다.

“제길! 이거 반은 여자의상인거냐!!!!!!!!!”

“XXX! 조인우!!!!! 어딨어?!! 반장!!!”

“주..주름 스..스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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