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0)

인우가 교실에 돌아온 시각은 이미 해가 저물고 노을이 지고 있을 때였다. 

“반장!!!!!!!!!”

아직 아무도 하교하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간 친구들도 없었다. 인우는 아무 일 없었다고 친구들을 안심시켰다. 먼저 도착한 차규형에게는 아무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한 듯 했다. 규형은 책상에 걸터앉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인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사정없이 때려버려서 화가 난 걸까. 그를 보며 조금은 미안해서 인우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만다. 그거에 차규형은 또 딱딱한 표정을 푼다. 어지간히도 단순한 놈이다.

“조인우. 나좀 봐.”

중건이가 왠일로 풀네임을 부른다. 인우는 아무말 없이 중건이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중건이는 인우가 나오자마자 바로 멱살을 잡아들었다. 그 괴력에 인우는 놀라서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물론 겉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해보였지만.

“왜 이래.”

인우의 차분한 음성에도 중건이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험악한 목소리로 조용히 인우의 귓가에 뇌까렸다.

“개새끼. 너 날 비겁한 놈으로 만들었겠다.”

이런 것 일줄 알았다. 인우는 한숨을 쉬었다.

“감히 시합을 미끼로 삼아서. 내가 등이나 돌리는 한심한 놈으로 만들었다고. 너.”

인우는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중건을 보며 자신의 멱살을 쥔 녀석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보송한 감촉에 중건은 흠짓 놀랐다.

“바보자식. 니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날 얼마나 머리 아프게 했을지 몰라서 그러냐? 넌 가주는게 나한테 도움 되는 거였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더욱 거센 힘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중건의 진지한 표정. 인우는 3년만에 처음 보는 것같아 조금은 감격한다. 아직 자신이 중건이 이놈에게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왠지 놀려주고 싶었다.

“쪽!”

“헉!”

중건은 자신의 볼에 인우의 입술이 쪽하는 소리와 함께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동적으로 인우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을 풀었다. 인우는 멍하니 넋을 잃은 중건의 앞에서 구겨진 교복을 펴서 바로 입는다. 

“...조...인.... 너 지금....?”

“정신드냐? 무지막지하게 단순한 놈. 아무튼 이번에 도와준 거 절대 안 잊으마. 네 덕분에 쉽게 일을 마무리 지었어.”

인우는 결정타로 중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교실로 들어가 버린다. 홀로 남은 중건은 속으로 내뱉지 못할 절규를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냐!!!!!!!!!! 저놈이 갑자기 왜 저래!!! 사내놈한테 뽀뽀를 받다니!!! 아직 여자애들한테도 허락한 적이 없는데에!!!!.....근데... 무슨 놈의 사내자식 입술이 이리도 부드럽냐... 왠지..좋.....으아아아악!!!!!!!!!!!!! 하는 소리 없는 절규. 여기 성정체성에 급격한 혼란을 겪고 있는 또 다른 남학생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하교하였다. 인우는 참 피곤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어두운 교실에 들어와 책가방을 챙겼다. 대청소를 마친 교실은 평소와는 달리 깨끗했다. 마음이 흡족했다. 

“왜 집에 안가고 그러고 있냐.”

인우는 자신의 옆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곰탱이 녀석을 힐긋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미련한 놈. 뒤집어 쓸걸 뒤집어 써야지. 너같이 범생이 놈이 날 팼다고 하면 누가 믿냐.”

규형의 가시 돋친 말에 인우는 어깨를 으쓱한다.

“전과가 있어서 그런지 믿어줬잖아. 게다가 청소를 안하는 문제아를 반장이 열받아 밟았다..라는 시나리오는 학생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먹힌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듯 인우는 가슴을 곧게 폈다. 

“하나도 고맙지 않다.”

“고마우라고 한 거 아니다.”

동시에 ‘흥’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

“어디 갈거야..?”

규형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책이 가득 든 무거운 인우의 가방을 자신이 들었다. 인우는 어이가 없어서 손을 휘저어 그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저놈이 내 가방을 가지고 어딜 가려는 거지...라며 인우는 자기가 행선지를 물어 놓고는 먼저 휙 가버리는 제멋대로인 차규형을 따라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 도서관 갈거다.”

“...오늘 하루는 빠져.”

“싫어.”

“....”

규형은 저 반장놈을 확 패서 기절시켜 데려갈까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반장 녀석. 그 곱상하던 얼굴이 한달 사이에 많이 망가졌다. 다 어찌어찌 원인을 따져보면 자신 때문이었다. 미안하고 불쌍한 나머지 녀석의 가방을 인질로 삼고 아무 말없이 걸었다. 반장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같이 있고 싶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반장은 이제까지 자신을 보던 그 어떤 사람들과도 다른 눈으로 자신을 봐준다.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차규형을 봐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규형은 좋았다. 오늘도 쌍둥이들이나 병욱이, 계명이를 구해준 것도 고마웠다. 무시무시한 선도부 선배를 앞에 두고 찬찬히 사정을 설명하고 혼자 모두의 잘못을 뒤집어 쓴 채 잘못을 빌던 반장의 모습을 규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표현은 못하지만 규형은 이런 감정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 집.”

커다란 맨션 앞에서 인우는 멍하니 규형을 바라본다. 이놈이 지금 자기 집으로 날 끌고 왔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나는 지금 도서관에 가야 한다니까. 니 놈 때문에 오늘 까먹은 시간만 해도 문제집 10장은 풀었을 거다. 퍼부어주고 싶은 것을 참는다.

“들어와.”

가방이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인우는 녀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그럭저럭 깨끗했다. ‘내 집’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혼자 사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원룸에 침대 하나 티비 하나 쇼파 하나. 컵도 하나 의자도 하나였다. 누군가 살고 있는 집 같지 않게 무척 살풍경한 녀석의 집은 거의 사람냄새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 걸까. 얘도 진유처럼 하숙을 하는 건가...라고 생각한 인우는 냉큼 냉장고를 열어본다. 진유는 혼자서도 이것저것 잘 만들어 먹기 때문에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잔뜩 차있었지만 이놈의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맥주, 물, 맥주, 물. 

“너....술 따위를 먹는 거냐...”

인우는 인상을 썼다. 그것을 보고 차규형은 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모두 버렸다. 인우는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넌 웃는 게 정말...”

차규형이 뭐라 말하려 한다. 아까도 웃는게 뭐 어쩌고 하더니. 

“띵동!!!!”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밖에 누가 왔다. 규형은 인상을 구기고 사람 몇 잡을 얼굴을 하고 나갔다. 인우는 녀석에게 납치당했던 자신의 사랑스러운 책들이 든 책가방을 얼른 가져다 메었다. 그리고 잠시 잘 정돈된 침대위에 앉아서 녀석을 기다렸다.

“집에 누가 있는..........아!! 반장!!!!!”

경쾌하게 집안으로 들어오던 사람은 규형의 침대위에 앉아 있는 인우를 보며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예쁜 얼굴로 험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익숙한 황계명이었다.

“뭐 가지러 온 건지 몰라도 얼른 챙겨서 가. 지금 바쁘다.”

규형의 무뚝뚝한 말에 계명은 방방 뛰며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다고?!! 저 망할 반장이랑 뭐가 바빠?!! 응? 차규형! 말해봐! 왜 저놈이 여기 있는건데!!!”

이상할 정도로 계명은 흥분하여 말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규형을 몰아 붙였다. 정상적인 것 같지 않은 모습에 규형은 뭐라고 대꾸하기보다는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지나치게 광분하여 왜 인우가 규형의 집에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당위성을 따지고 있는 계명의 모습과 그를 씁쓸하게 바라보는 규형을 보면서 인우는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도 계명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 왜..라는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싫을 수도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있다. 인우는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찌하였든 자신이 규형의 근처에 있게 된다면 자연히 계명과 규형은 늘 저렇게 다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말 찝찝한 기분이다. 자신 때문에 친했던 친구 사이가 저리 사나워진다니. 인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규형. 나 간다.”

인우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이 녀석의 집에서 몸을 빼려했다.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인우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아픔까지 느껴져서 황급히 자신을 잡은 규형을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서서 절대 팔을 놓지 않을 듯 버티고 서 있었다.

“황계명. 난 분명히 반장이랑 볼일이 있다고...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인우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규형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 충격은 황계명이 받은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계명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규형을 바라보다가 녀석이 진심으로 열이 받았을 때 어떤 사태가 되는지 익히 아는지라 차마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집밖으로 옮겨야 했다. 물론 인우를 태워죽일려는 듯 불타는 분노의 눈으로 노려본 후 말이었다.

저거... 혹시 남자의 질투인가. 친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생겼다고... 질투를 하는건가. 왠지 남자의 질투는 음험하고 무섭다는 생각을 한 인우였다.

“아프다.. 팔 좀 놔.”

계명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 인우의 팔을 붙들고 서 있는 규형이었다. 녀석의 무지막지한 힘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해줄까 하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규형의 얼굴이 조금은 애처로와보여서 그만 녀석을 다정하게 달래고 만다.

“가지 않을테니까.... 이 것 좀 놔주라.”

인우의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고 규형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손자국이 날정도로 잡고 있던 인우의 팔을 슬그머니 놓는다. 인우는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규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다 되었다. 인우는 손짓을 해서 규형을 불렀다. 차규형은 인우가 침대 위에 앉아서 자신을 부르는 이 상황이 그다지 싫지 않은 모양인지 만면의 미소를 띄우고 인우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왠지 지나치게 그 간격이 좁다고 생각하던 인우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규형의 허벅지가 자신의 허벅지에 바로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인우의 머리위로 큰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차규형 특유의 그 싸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인우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규형은 앉을 때부터 팔을 뻗어 인우의 허리를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인우가 물러서려 하자 규형은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인우를 끌어당겨 자신의 긴 두 다리사이에 완전히 가둔다. 인우는 무척 놀랐다. 펄쩍 뛰어오를만큼 놀랐지만 그런 심경을 표정으로 나타내는 것이 어색한 자신이 새삼스레 서글펐다. 지금 차규형과 자신의 자세는 무척이나 미묘했다. 내뿜는 숨결도 닿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가까이에서 마주보고 있었고 녀석의 굵은 두 팔은 인우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인우가 벗어나려 발버둥 칠 때마다 압력은 심해졌고 규형은 자신의 두 손을 깍지 끼운 채로 절대 놓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인우는 혼란스러웠다. 얘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뭘 하려는 거냐.”

인우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모르겠다.”

차규형이 놈 한다는 말이다. 정말 어이가 없다. 

“밤새 이러고 있을 거냐.”

인우는 경계의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싶다.”

미친거냐. 인우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친거 아냐.”

인우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맞히던 규형의 말이었다. 인우는 녀석이 조금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졌다. 이런 썰렁한 집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니 그동안 혼자서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내게 이러는 거겠지. 인우는 스스로 납득하고 손을 들어 차규형의 양 볼을 꽉 잡았다.

“윽.”

갑작스런 습격에 규형이 눈을 크게 뜬다. 인우는 역시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규형의 볼을 찌이익 잡아당긴다. 왠지 귀엽다. 인우는 스스로의 행동에 만족해 규형의 볼썽사나운 얼굴을 감상한다.

“아프다.”

찡그린 규형에게 인우는 아까 자신도 팔이 그만큼 아팠다며 좀 더 심술을 부렸다. 낮에 학교에서 다른 사람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러뜨리던 차규형과 인우에게 양 볼을 잡혀서 놀림을 당하고 있는 차규형.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인우는 너무도 가까이에 있는 규형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지고 있는 너를. 인우는 마치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은 규형의 눈동자를 지겹지도 않은 듯 한참 들여다보았다. 

“난.... 니가 좋은 것 같...다.. 반장.”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규형은 힘들게 말을 꺼냈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냐며. 그래서 여기까지 끌고 온거냐며. 인우는 여전히 자신을 잡고 놓지 않는 규형을 웃으며 바라본다. 간만에 밝은 웃음을 보인 인우를 보며 규형은 마치 뭐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웃는게 정말...”

드디어 웃는게 어떤지 말해줄 거냐. 인우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웃는 것이 서툴다고 생각했다. 웃어본 기억도 별로 없고. 하지만 규형을 만나면서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물론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이놈이 싫어하기 때문에 되도록 웃으려고 노력했다. 규형이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도 역시 이 문제아 녀석이 좋은 걸까.

“........예쁜 것 같아...”

“.....”

규형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리고 인우는 순간 쇼크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뭐? 예쁘다고?

“.....내가... 기집애냐?”

겨우겨우 꺼낸 인우의 말에 규형은 자기도 쑥쓰러운지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

“너 어디가서 그런 얘기는 절대하지 마라. 뭐냐. 같은 반 친구의 웃는 모습을 예쁘다고 생각한다? 아서라.....”

인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규형의 표정은 또 험악해졌다.

“친구 좋아하네..”

규형의 말에 이번에는 인우의 표정이 굳는다. 두 사람은 잠시 눈싸움을 한다. 

“내가 왜 네 친구냐?”

“그럼 뭐야?”

규형은 잠시 적당한 호칭을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듯 했다.

“........친구는...아닌데... 그렇다고... 애인도 아니고.. 저놈은 남자인데....”

중얼중얼 거리는 걸 보니 지도 되는대로 내뱉은 말 같았다. 인우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 뒤로 적당한 호칭을 생각하느랴 2시간 넘게 그 자세로 있었던 두 사람은 얼른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인우 때문에 서둘러 규형의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넌 왜 따라 나오냐는 인우의 말에 규형은 날이 어두우니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해서 인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딴 거 필요 없다고, 자꾸만 날 여자애 취급하면 친구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분노에 날뛰는 인우를 보며 규형은 친구 따위가 아니라는 원래의 명제로 돌아왔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인우는 뭐에라도 홀린듯한 기분이었다. 2시간 넘게 녀석과 씨름했던 것들이 원상태로 돌아와 버렸던 거다.

“들어가라 반장.”

정말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규형이 인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우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규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너 왜 나를 네 집에 데려 간거냐?”

그 물음에 규형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누구에게도 방해 안 받고 같이 있을 수 있었잖아.”

인우는 조금 놀랐다. 저 차규형이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었는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함께 있고 싶다는 인우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서 더욱 놀랐다. 왠지 기쁘다. 주체할 수 없이 기쁘다. 인우의 얼굴에 저절로 함박 웃음이 걸린다.

“23번 문제는 모두들 많이 어려워하는 유형입니다. 일단..문제를 잘 읽어보도록 하죠.”

수학시간이었다. 담당이 담임선생이라서 특별히 수업집중도가 높다. 오늘은 지난 학력고사 시험문제를 풀이하는 시간이다. 담임선생님은 방긋 방긋 웃으며 분필하나 들기 힘들 것만 같은 그 허약한 팔로 열심히 칠판에 수식을 써내려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반 아이들 역시 함께 방긋 방긋 웃으며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인우는 종전에 차규형이 구겨서 버렸던 시험지를 잘 챙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에 영 참여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녀석을 달래고 또 달래서 시험지를 보게 만들었다. 자신의 것을 챙겨두었다는 반장을 조금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규형은 곧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쌀쌀맞게 말하면서도 인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새 들어 무척 여기저기 만지려고 하는 녀석 때문에 인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뭔가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을 좋아하는 인우는 이런 애매모호한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스킨쉽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왠지 차규형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미칠듯 뛰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상했다. 

“어.....?”

그때 인우는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분명 백지일거라고 생각했던 규형의 시험지는 잘 보이진 않았지만 답이 체크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걸 여태 못봤지..하는 얼굴로 인우는 물었다.

“..야.. 너 학력고사 때 문제 풀었어?”

인우의 말에 규형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아아...풀긴 풀었는데 OMR인지 뭔지 귀찮아서 체크 안했지.”

이런 멍청이 같은! 인우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황급히 규형의 시험지를 빼앗아 정답을 맞춘 자신의 시험지와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어어.....”

인우는 바보같은 소리를 냈다. 규형은 무슨일인가 인우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자연스레 걸치고는 몸을 기대오며 인우가 채점하던 자신의 시험지를 들여다본다. 인우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닥친 이 빌어먹을 상황에 열이 불같이 치솟았다.

“....차.... 규형...”

수업시간이라 겨우겨우 감정을 눌러 삭히며 인우는 음산하게 규형을 불렀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차규형은 싱글싱글 대꾸한다.

“왜? 다 틀렸냐?”

인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탁!”

“으악!”

차규형의 머리에서 울려퍼지는 경쾌한 타격음에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도, 반의 급우들도 모두 멈추어 서서 두 사람을 주목했다. 갑자기 쏠린 시선에 인우는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께 사죄를 했다. 괜찮다고, 수업에 집중하라고 떨떠듬하게 말하는 담임선생님이었다. 

“망할자식...”

“왜 때리는 거야.”

인우는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OMR카드 귀찮다고 체크를 안해? 못되먹은 자식. 수학 만점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줄 알아? 난 괴물은 이현기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빌어먹을 새끼.”

중얼중얼 욕설을 쏟아붓는 인우를 조금은 두려운 듯 바라보던 규형은 감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수학 잘해봤자 뭔 소용있냐. 대학갈 것도 아닌데.”

그 말에 인우는 힘이 빠졌다. 수학 잘해봤자 뭔 소용이 있냐고?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제껏 매달렸던 동아줄이 뚝 떨어지는 느낌. 옳다고 믿었던 것이 부정당한 황당한 기분이었다. 인우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부 뿐이라고 믿었다. 아프신 부모님, 힘든 형들.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오직 착한 아이가 되는 것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착한아이가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이었고 인우는 이제껏 평생 동안 그 것을 나침반삼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차규형과 자신은 무척이나 다르다. 자라온 환경도, 지금 살아가는 세계도. 녀석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 차이는 벌어진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서도 인우는 자신과 규형의 확연한 입장차이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었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무슨... 안 좋은 말 한거냐...”

규형은 인우의 어두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인우는 얼굴을 들어 녀석을 바라본다. 공통점... 그래. 하나 있었다. 서로가 좋다는 것. 함께 있고 싶다는 것. 그거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규형 역시 쉽게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노력할 수밖에 없다. 녀석의 세계와 나의 세계. 너무도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게 하면 될 것이다. 

이제까지보다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할거다. 이제는 그 어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내 스스로를 위해서 열심히 할거다. 반장 역할도 충실히 해낼 것이다. 더욱 더 규형을 잘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녀석의 친구들과도 좋은 관계가 되도록 애쓸 것이다. 이제껏 이렇게 까지 해서 붙잡아 두고 싶은 상대는 없었다. 그래. 이건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이 친구다. 하지만 나는 절대 대가를 받아낼 것이고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이 녀석은 친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규형...”

“왜...”

“너 내가 좋냐?”

“.......응...”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니 부끄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인우는 조용히 규형에게 말했다.

“내가 좋다면 대학에 가라.”

네 녀석도 내 옆에 있고 싶으면 그만큼 대가를 치루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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