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우는 바지런한 진유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했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잠꾸러기 반 친구들을 두들겨 깨워 책상배열을 시험대형으로 바꾸었다. 한 줄씩 5분단을 만들고 번호 순으로 왼쪽분단부터 차례대로 앉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인우는 자신의 뒷자리가 차규형의 자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름 순대로 출석번호가 매겨지기 때문이었다. 41번 조인우 다음은 42번 차규형이었다. 게다가.
“그래서 말이야. 어제 알바에서 짤렸지 뭐야. 얼굴보고 뽑았는데 상처내고 다닌다고 말이야.”
인우가 때린 것도 아니고 뒹굴다가 지가 사물함에 부딪혀서 난 이마의 작은 흉터에 보란듯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난 황계명. 그나마 부기가 가라앉아서 울긋불긋한 멍이 덜 심해보이는 인우의 엉망인 얼굴에 대고 아르바이트에서 짤렸다며 차규형에게 툴툴대는 녀석이었다. 그녀석의 출석번호는 43번. 규형의 바로 뒷자리였다. 인우는 오늘이야 말로 정말 자리가 바꾸고 싶어졌다. 이런 멤버가 뒤에 죽치고 있으면 정신이 혼란스러울 것이 뻔하고 시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야. 얼굴 괜찮냐. 반장.”
“내 이름이 ‘반장’이야?”
“큭. 얼굴은 괜찮습니까? 조인우씨?”
“능글맞기는.”
인우는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자신의 책상위에 풀썩 걸터앉는 병욱의 아랫배를 쿡 찔렀다. 기겁을 하는 그를 보며 조금은 유쾌한 기분이 된 인우였다. 어젯밤 진유가 인우의 얼굴에 얼음찜질을 해주었기 때문에 오늘은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이 정도면 집에 들어가도 되겠어. 며칠만 형 눈에 띄지 않게 형 퇴근 전에 자고 새벽같이 등교하면 되겠지. 용우형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못먹게 되는건 안타깝지만.
“여어. 짝꿍아. 그 다음편을 빨리 내놔. 48회! 어젯밤에 잠 안와서 죽는 줄 알았다!”
어느샌가 달려온 중건이 병욱의 목을 팔로 감고 헤드록 자세를 취한다. 인우에게 찔리고 중건에게 휘감긴 병욱은 한참 켁켁 대다가 자신의 PDA를 중건에게 넘긴다. 환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려는 중건을 잡은 인우.
“그거 병욱이가 쓴다는 글이야?”
“응?으,응...”
중건은 대답을 더듬었다.
“어떤건지 나도 좀 보자. 병욱아. 나도 봐도 되냐?”
어쩐지 인우가 굉장히 적극적이다. 중건은 왠지 인우에게 이것을 보여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중건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우는 무척 순수하면서 깨끗한(?)아이였다. 평소에도 그 어떤 성적발언(?)을 한 적이 없는 녀석. 저 철가면 안에 혼자 자위 같은걸 하는 얼굴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 성직자들보다도 더 금욕적으로 보이는 인우에게 이걸 보여준다면.... 중건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그래그래. 봐. 큭큭. 보고서 감상을 꼭 들려줘야 한다. 조인우.”
“염려마.”
키득거리며 허락을 하곤 병욱이 가버리자 중건은 더더욱 난감해졌다.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어린 양(아마 인우를 가리키는 말 같다)을 어찌하면 좋겠냔 말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중건은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야. 박중건. 내놔봐. 한번 보게.”
“야...조..조인...... 이..이건...”
“뭐.”
“이..이거는 말이지...”
인우가 점점 수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중건은 그만 병욱의 PDA를 안고선 튀어버렸다.
“미안!!!!!!!조인!!!난 너한테 아직 이 더러운 세상을 보여줄 수는 없어!!!!!!!!!!!!”
반 아이들이 모두 미친놈 보듯이 뛰쳐나간 병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우는 특히 더했다. 더러운 세상을 보여줄 수 없다고? 뭐 인간성 상실에 대한 글인가? 아무튼 중건이 놈은 오버가 심해서 탈이야. 내가 무슨 곱게 자란 공주님도 아니고 보여주고 말고 할게 뭐야. 병욱이가 교실 구석에서 폭소를 터트리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세상...?”
그때 자신의 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규형의 목소리. 인우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는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세를 바꾸어 뒤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규형의 얼굴이 보인다. 그도 중건이의 퍼포먼스를 보고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중건이가 급우들에게 준 충격도 가라 앉아 주변의 분위기가 얼추 평소대로 시끌시끌해지자 인우는 조용한 목소리로 규형에게 책을 건넸다. 그 것을 본 규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야.”
인우는 어제 규형에게 받은 책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았던지 규형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인우는 이제 아주 조금은 이 녀석을 다루는 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책 앞표지를 펼쳤다. 의아한 얼굴의 규형을 보며 인우는 자신이 정성껏 한 글자 한 글자 써넣은 이름을 보여준다. 조 인 우. 이 세 글자가 책 앞표지 안쪽에 써있었다. 규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단순한 녀석. 인우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어제 규형이 찢어버린 책, 그래서 꼼꼼한 성격의 진유가 테이프로 수리해준 인우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서 다시 규형의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의 규형. 인우는 이 녀석의 표정은 굉장히 알기 쉽다는 생각을 했다.
“엉망이 된 책을 진유가 정성껏 고쳐주었다. 친구의 성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맥락으로 네가 선물해준 이 책을 쓰지 않을 수도 없다. 고로 나는 난감한 사태에 봉착한 거지.”
인우의 말을 가만히 듣던 차규형은 팔짱을 끼더니 못마땅한 듯 인우를 바라본다.
“내가.... 너랑 친구냐?”
그 말에 인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진다. 저 녀석의 일만 관련이 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럼 아니야?”
인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차규형은 일단 꼬리를 내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해두자.”
“그래.”
그래도 차규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나냐 진유..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냐.”
어린애 같은 이분법이구나 차규형. 인우는 문득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는 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세퍼트같아 보이는 차규형이었다. 귀여운 소리를 하는 주제에 누굴 잡아 죽일 것만 같은 표정은 대체 무슨 의미 인거람.
인우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내가 쓰던 이 책은 네가 찢어버린 거니까 네가 써야 한다. 난 네가 사준 이 책을 쓰고. 그러면 진유도 헛수고를 한 게 아닌 것이 되고 나도 너의 사과를 받아들인 게 되겠지.”
그 말에 규형은 이해가 될듯 안될듯한 묘한 얼굴이었다.
“알겠냐?”
쐐기를 박는 인우의 물음. 그제서야 규형은 반의 다른 녀석들이 유독 이 반장에게 약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왠지 거부를 할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소중히 대해줘라.”
인우는 자신의 정든 영어책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쓰다듬더니 규형에게 쓱 밀어준다. 그리고 규형에게 받은 새 책을 정말 소중한듯 가방 속에 조심히 넣는다. 이런.. 귀엽다. 어쩐지. 뭐가 이래. 사내놈인데! 규형은 인우에게 받은 영어책을 책상 속에 넣으며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여기에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청소년이 있다....
“으갸갸갸갸갸갸!!! 지겨웠어... 하루 종일 시험만 보고 있자니..”
“네 근육들이 할 일이 없는 나머지 심심했나보구나. 뚱땡이.”
“이봐. 오진. 나도 문제를 풀긴 풀었다고.”
기지개를 켜며 방방 뛰는 중건, 약 올리는 진유. 두 녀석은 답을 맞춰볼 생각조차 안했기 때문에 인우는 녀석들의 몫까지 답지를 가져와 현기, 철민과 함께 답을 맞추어 보았다. 역시나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내용들도 그렇고 문제도 그렇고 어려워졌다. 하지만 못 풀 정도는 아니었다. 인우는 제법 기대만큼 점수가 나와 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방학동안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 현기는 역시나 전 과목 만점이었다. 전교1등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철민은 녀석 답지 않게 수리에서 다수 실수를 했다. 진유는 여전히 수리, 과학탐구는 뛰어났다. 반면에 언어, 외국어 점수가 잘 안 나왔다. 특히 언어가 점수변화폭이 심해서 스스로도 고민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중건이는 역시나 고루 고루 기본적으로 다 잘했다. 운동을 하면서 이만큼 점수가 나온다는 사실이 늘 놀라운 인우였다. 유도부 고문선생님이 왜 중건이를 이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어찌하였든 점수가 만족하게 나왔으니 외박을 하면서까지 공부했다는 핑계를 형에게 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현기와 철민이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인우는 꽤 빠른 시간에 자리에 엎어진 규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통수가 제법 잘생겼다. 이리저리 구겨진 문제지가 책상 밑에 굴러다녔다. 인우는 한숨을 쉬고는 그것을 주워 잘 폈다. 자신이 그것을 가져가던 말던 상관도 안하는 것처럼 보여 인우는 자신의 책 사이에 규형의 시험지를 잘 끼워두었다. 나중에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문제라도 풀어주신다고 하면 규형이놈 자기 시험지가 어디 갔는지 까맣게 모를테니까 내가 짠하고 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인우는 자신이 점점 차규형의 마누라 같이 변하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3,4월은 여러모로 할 일이 많은 달이다. 인우는 얼마 전 교무실에 불려가 대청소와 환경미화를 해야 하니 조를 편성해서 구역과 할 일을 나누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받았다. 이럴 수가. 이 정도는 담임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일 아니던가! 인우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최소한의 행정만 빼고 전부 학생들의 자치로 굴러간다는 명성고등학교의 교칙을 생각해보자면 담임선생님께만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간신히 화를 참은 인우였다.
“인우야. 혹시. 자리를 다시 배정할 생각은 없니?”
담임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인우는 의아했다.
“이제 3주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음. 다른 과목 선생님들께도 항의를 받아서 말이야. 네가...차규형과 짝을 하면 혹여나 수업집중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차규형같이.. 불량하고...위험한...”
순간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인우는 차분하게 말했다.
“선생님들께서 걱정해주시는 것은 알겠지만 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자리는 H.R시간에 상의를 해보고 아이들이 적당하다고 여길 때쯤에 바꾸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오는데 어찌나 입안이 쓰던지. 인우는 도대체가 규형이 어떻길래 모두들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철민이나 진유도 그러고, 이제는 담임선생님까지. 규형은 평범한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밤에 무슨 다른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만큼은 문제한번 일으키지 않고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인우자신은 싸움을 일으켜 반성실에서 반성문 10장을 쓰고 나온 사람이었다.
인우가 보기에 규형은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것도. 게다가 요새는 책을 반쪽 보여줘도 화가 나서 집어 던진다던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된거 아닌가. 가끔 인우 자신을 너무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조금은 착찹한 기분으로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수첩을 꺼내서 우리반이 배정받은 청소구역을 차례대로 적어 넣고 환경미화 할 것들을 그 다음으로 적었다. 명렬표를 옆에 늘어놓고 번호 순으로 짤라서 구역과 일들을 배정했다. 기계적인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서늘한 인기척이 난다. 옅은 담배냄새. 인우는 규형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랑곳 않고 일을 계속했다. 지금은 차규형을 보는 것이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기분 안 좋아..?”
규형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우는 순간 고개를 휙 들어 규형을 바라본다. 그가 웃는다. 인우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인우는 울 것만 같은 얼굴로 규형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물론 스스로는 그런 심정이지만 표정만은 마냥 무덤덤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기분을 이 녀석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보기만 해도 안단 말인가.
인우는 자신이 지금 이토록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은 자신의 집중력에 의심을 받아서도 아니고, 차규형이 부당한 욕을 얻어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규형의 눈을 보았을 때 인우는 순간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자신의 기분을. 그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과 저 차규형이라는 아이는 정말 너무도 다른 사람이다.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함께할 수 없는 어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곁에 있을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친구들도 반대하고 거부한다. 선생님들도 거부한다. 차규형을. 분명... 자신의 형들도 규형을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우는 차규형과 함께하고 싶었다. 이 맑고 청아한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었다.
눈물이 한방울 흘러내렸다. 마주보고 있던 차규형이 흠짓 놀라했다. 인우는 그제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랬다. 친구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반장아 울었어?”
“반장 눈이 토깽이 같이 시뻘개..”
“뭐야. 누가 우리 반장 울렸어.”
“시끄러워. 다들 자리에 좀 앉아봐. 할말 있다.”
인우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교단에 섰다. 인우는 자신이 차규형의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차규형이 정말정말 놀라서 당황했을 만큼 인우는 상식 밖의 일을 한 것이었다. 바로 교실을 뛰쳐나가 옥상으로 피신하여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만큼 울고서야 내려 올 수 있었다. 난생처음이었다. 이렇게 울어본 것은 말이었다. 정말 저 녀석을 만나고 나서 인우는 처음 해보는 것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은 기뻤다. 하지만 이렇게 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양이었다. 지끈지끈 아픈 머리도 그랬지만 시끄럽게 자신에게 왜 울었냐고 묻는 웬수들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모레 환경미화 심사가 있는 것 다들 알지? 기집애들처럼 꾸미라는 건 아니니까 더럽지만 않게 대충 하자.”
인우의 전달사항은 늘 간결 명료했다. 칠판에 청소구역을 배정하고 깨끗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이름을 써내려갔다. 번호대로 짤랐지만 분명 안할 놈들이 반이다. 원래 이 나이또래의 남학생들은 청소와 인연이 멀기 마련이다. 인우는 자신의 이름을 따로 빼서 ‘총감독’이라는 란에 적어 넣었지만 사실 총감독이라는게 전체 구역을 담당하는 것이라 어디라도 부족하면 가서 메꿔넣어야 한다. 골치가 아파진다. 아.. 정말 행사가 싫다.
“혼자 너무 애쓸려고 하지말고 우리도 있으니까.”
“그래그래! 이 중건님께서 우리 조인의 어려움에 기꺼이 발벗고 나서주마.”
“으..응.. 우..우리가 도..울게.”
인우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중건이에게는 일침을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박중건. 니가 도와줄거라고는 병욱이의 글을 보여주는 것 뿐이야.”
그 말에 중건이는 또 정신이 나가서 ‘조이이이이인~! 넌 아직도 너무 순수해애애애!!’라며 반 아이들의 시선을 독차지 한 채 도망가고 말았다. 도대체가. 병욱이에게 직접 보여달라고 하던지 해야지. 인우는 미적거리는 반 녀석들의 엉덩이를 차서 청소를 하러 보냈다. 물론 아무도 건들이지 않는 차규형과 그 패거리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인우는 규형이 녀석이 그리 나쁜 놈은 아니라서 정중하게 부탁을 하면 들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물론 인우가 부탁해야만 들어준다는 사실은 모른다) 규형에게 가서 ‘부탁한다’라고 했더니 아무말 없이 자기네들 패거리를 이끌고 사라져 버렸다. 규형을 따라나가는 병욱을 잡아다가 글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차규형 이하 황계민, 두쌍둥이들 까지도 ‘그건 아냐’라는 표정을 지어서 인우를 당황케 했다.
“급훈은 뭐라고 쓰지? 제기랄. 도대체가 교실에 게시판 따위를 왜 만드는 거냐. 채우기 귀찮게.”
“설마 우리가 이 나이에 ‘우리들 솜씨자랑’하면서 괴발개발 그린 그림이라도 전시해 놓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뭐야. 그건 너무 메르헨적이야.”
“반장아! 반장아! 우리 급훈을 뭐라고 써넣지?”
환경미화의 가장 큰 점수를 차지하는 게시판 꾸미기를 맡은 팀이 인우를 불러댄다. 급훈을 적어 넣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칸을 채우겠다는 비정한 각오가 돋보여 인우는 잠시 고민을 한다. 턱을 괴고 생각하던 인우는 짧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청소를 하러 돌아갔다.
“3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 몸매가 바뀐다.”
“헉.”
“헉.”
게시판팀은 입을 쩍벌렸다. 조인우같은 목석이 설마 ‘마누라 몸매’를 위해서 그토록 열공을 하는 것일까. 사춘기 아들의 방안에서 포르노 잡지를 발견한 어머니 심경이 된 아이들이었다.
“반장! 쓰레받이가 모자라! 대걸레도 별로 없고!”
“이걸 가지고 어떻게 청소를 해!”
“반장! 설마 복도 유리창도 닦아야 되는 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란스러움. 인우는 자신이 다시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착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실제 상황이었다. 인우는 일단 학생부로 찾아가 부품관리 선배에게 말해 학교 부품실에서 쓰레받이 몇 개를 공수해 왔다. 그동안 청소가 끝난 다른 반에서 대걸레 및 부족한 청소도구를 빌려온 철민과 진유에게 진정으로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맡은 곳 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 청소해주고 있는 현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건이 놈이 안보여서 인우는 신경이 쓰였다. 사실 그 놈 같으면 진작에 튀었을 것이다. 마지막 청소구역인 교정 화단을 확인하고는 중건이 놈을 잡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인우는 서둘러 발걸음을 교사 밖 화단으로 돌렸다.
“크헉..!!!”
“차..규형.. 이 XXX....."
"덤벼! 덤벼 XX들아!!“
“퍽! 퍽!!”
화단 앞에 다다랐을 때 인우가 제일 처음 본 것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녀석을 가볍게 피해 팔을 잡아 꺾고 잔혹하게 부러뜨리는 규형의 모습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고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는 그의 모습은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우는 멍하니 그 아수라장을 바라보았다. 병욱이 달려드는 녀석들의 배를 발로 차버리고 황계민과 쌍둥이들이 규형의 등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 구경꾼이 금새 몰려들었다. 인우는 분명 빠른 시간 내에 선도부가 뜰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부지런히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린다.
“그만!!!!!!!!”
인우의 외침에 순간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구경하던 모든 사람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차규형의 싸움인데 어느 누가 끼어들겠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우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규형은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되었다. 분명 함께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선생님들이 규형이를 주시하고 있다. 선도부에서도 규형이를 일부로 피하고는 있지만 이런 사태라야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싫었다. 싫었다. 저 녀석이 옆에 없는 것은.
“여어... 반장..”
규형이 피가 튄 얼굴을 해가지고 손을 흔들었다. 인우는 재빨리 뛰어가 많이 다친 것 같은 아이들을 일으켰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녀석을 주변의 구경꾼들에게 한명씩 엎히게 했다.
“얼레. 인우야 뭐해?”
병욱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이 긴장감 없는 놈! 인우는 녀석의 등에도 부상자를 업혔다. 두 쌍둥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양호실에 떨궈두고 그대로 교실로 뛰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어. 알겠지?”
인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알았다는 듯 쌍둥이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병욱이 역시 ‘헤헷. 또 우리 이쁜 반장 신세를 지게 됐잖아. 규형이 놈이 빡돌아서 나도 수습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라며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뛰어가 버렸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때 황계명이 인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계명은 정말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규형은 거침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놈들을 묵사발로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규형이었다. 단단한 껍질로 온몸을 무장한 싸늘한 기세를 내뿜는 전투기계. 상대가 빌어도 고통으로 신음해도 망설임 없이 뼈를 부러뜨리고 살점을 뭉갠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분명 시비를 건 것은 저쪽이 먼저였다. 흔한 일이었다. 차규형을 꺾는다면 그야말로 한순간 슈퍼 루키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절대자는 언제나 도전을 받고 이겨낸다. 그런 것이 규형이었다. 반장 따위가 시킨 화단 청소 따위 안하고 가버리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규형은 정말로 화단을 청소했다. 왠일인지 병욱이나 쌍둥이들도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는 걸 보고 화가 났지만 참았다. 불안한 기분은 점점 실제화되어 가고 있었다. 왠지 규형은 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명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규형이 변한다면 자신은 분명 곁에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반장 때문이다. 반장을 만나고 나서 규형은 왠지 달라졌다. 표정이 생겼다. 가끔 반장의 얼굴을 보며 웃는 규형을 보며 미칠듯한 살심이 치솟았다. 빨리 이 불길한 느낌을 떨치고 싶었다. 그러다가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을 만나자 계명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 규형도 상대방이 폭력을 가해오자 참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난장판. 바로 이 느낌. 원래의 규형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병욱이 자꾸만 규형에게 다가와 ‘곧 있으면 선도부가 달려온다’라고 속삭이는 것을 듣고는 병욱이 놈이 우스웠다. 선도부? 그딴 것을 두려워할 규형이 아니었다. 그런데 달려온 것은 선도부 보다 그 반장 놈이 먼저였다. 반장놈은 감히 규형의 싸움을 중지시켰고 아무도, 규형조차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게다가 규형은 반장이 나타난 직후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갈무리한 상태였다. 반장은 마치 지가 뭐라도 되는 양 규형에게 당한 멍청이들을 처리하고 다급하게 주변에 몰려 있던 구경꾼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계명은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거침없이 인우를 쳤다.
“퍽!!”
“황계명!!”
반격이 올거라고 생각했지만 반장 놈은 허약하게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계명을 붙든 건 규형이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선도부다! 최재혁이 직접 왔어!!”
“튀자! 도망가 얼른!!”
인우는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사람들 틈에서 어렵게 몸을 빼내어 인우에게 뛰어왔다.
“조이이이인!!!! 너 꼴이 왜 그래? 싸움 났어??!!”
인우는 잡히면 죽여버릴거라고 이를 갈고 있던 박중건이 나타나자 녀석이 천사처럼 보였다.겨우겨우 일어난 인우는 저 쬐끄만 황계명 주먹하나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하고는 중건에게 급하게 말했다.
“계명이 데리고 얼른 교실로 뛰어. 쟤 한번 더 걸리면 제적이야. 얼른!”
인우의 말에 중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렇지만 넌! 난 안가! 네가 이 꼴인데..”
“박중건!!”
인우는 말할 시간이 없다는 듯 냉정하게 일갈했다.
“너 지금 이 장소 있는 것만 해도 다음 경기 출장정지야.”
순간 중건은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인우는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중건은 굳은 얼굴을 해서는 안 갈거라고 버둥대는 계명이를 들쳐업고 뛰어가버렸다. 중건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인우는 겨우 일어서서 규형에게 다가간다. 규형은 그렇게 많은 녀석들과 싸웠는데 멀쩡한 얼굴이었다. 이래서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인우가 표정을 굳히고 다가가자 규형은 인우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너... 의외로... 사건처리에 일가견이 있구나.”
규형이놈 말하는 것 좀 봐라. 인우는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지마. 그러지마라.”
인우의 찡그린 표정에 규형이 당황한다.
“넌 웃는게......”
“퍽!!!!!”
규형의 말을 끊고 인우는 녀석의 배에 지체 없이 자신의 주먹을 힘껏 먹인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규형은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신음한번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인우는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몇 번 규형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얼굴을 때렸다면 시각적인 효과가 더 컸겠지만 인우는 차마 규형의 잘생긴 얼굴을 때릴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음이 더 아플 것만 같았다.
“뭐야. 또 너냐? 조인우?”
“.....”
선도부선배들이 구경하던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문제의 장소에 도착했다. 차규형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인우는 녀석을 발로 밟고 있었다. 선도부의 부 위원장 2학년 차원경은 규형에게 슥슥 다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큰 녀석을 휙 들어 짊어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다가온 한 선배를 보고는 인우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 새하얀 얼굴. 호리호리한 체격. 잊을 수 없는 저 눈매. 선도부 캡틴인 최재혁 선배다.
“따라와라.”
조용히 한마디 내뱉고 돌아서는 그를 인우는 마치 실에 걸려 이끌리듯 따라 갔다.
“어이고. 이놈 봐라.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서.”
두 번째 와보는 살벌한 선도부실. 인우는 자신도 이제 범죄의 세상(?)에 익숙해지는 건가 했다. 먼저 도착한 차원경 선배는 규형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인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최재혁 선배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명성고에서는 차규형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존재인 최재혁 선배는 교칙을 어긴 녀석에게는 가차없기로 유명하다.
“이번 달... 들어서 두 번째라며?”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판다.
“학생회인 주제에... 두 번이나 반성실을 들락이는 녀석이라...”
쇼파에 기대 앉아 최재혁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썼던 반성문은 또 어찌나 걸작이던지! 재혁이 너도 봤지 그거?”
차원경은 킬킬 대며 서류철에서 인우의 반성문을 찾기 시작한다. 왠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인우는 자신이 세워두었던 계획이 어쩌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 대단하다는 차규형을 밟는 반장이라...”
인우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했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규형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 여기서 규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안도했다. 저녀석이 멀쩡하면 큰일 나기 때문이었다.
“자.. 이야기라도 들어 볼까.”
선도위원회의 호랑이 위원장님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우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