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재미없는 걸 뭐 하러 듣냐.”
규형은 왠지 삐뚤게 말하고 싶어졌다.
“그래? 난 재밌는데. 무척 능력 있는 선생님이셔.”
인우의 말에 규형은 부아가 치밀었다. 이 반장은 여전히 저 백발의 호호 할아범 같은 영어선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진 못했지만 왠지 반장이 저 선생만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규형은 인우의 책을 집어 들어 거칠게 내 던져 버린다. 규형이 던진 인우의 책은 창틀을 맞고 몇 장이 찢어진 뒤 창밖으로 튀어져 나가 교정에 내팽겨쳐졌다. 순간 정적이 흐르는 교실. 인우는 무척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규형을 바라본다. 늘 무표정한 인우에게서 저런 표정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규형은 만족했다. 그 어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만 꼴깍 꼴깍 들려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수업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교탁 앞에서 얼어있던 선생님은 급히 퇴실했다. 반 아이들은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에서 자체 삭제하고 교실 밖으로 우왕자왕 뛰쳐나갔다.
인우는 규형과 마주친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인우는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규형에게 화가 났다. 자기 성질 나쁜 것을 광고하는 건가. 그거야 익히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단 말이다. 왠지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었는데 이제는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우는 마치 ‘넌 그런 놈이었구나’라는 눈을 하고 규형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돌아와 책을 주우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인우를 급하게 현기가 따라 나간다. 또한 철민 역시 규형을 한번 쏘아보다가 현기를 따라 나갔다.
“그러길래 자리는 왜 바꿔가지고. 내가 반장이랑 바꿀게. 도대체 저 잘난 척 하는 반장놈이 너한테 뭐라고 한거야? 규형아?”
계명이 다가와서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반장 놈을 손봐주러 뛰쳐나갈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 규형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좀 전에 자신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던 인우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녀석의 실망과 분노가 섞인 눈동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바라보았더라도 규형이 반쯤 죽여 놓았을 것이다. 감히. 감히 자신을 그렇게 쓰레기 바라보듯 보다니. 규형은 왠지 손가락이 무척 쓰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 반장의 책을 던져버릴때 종이에 벤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피가 나는 손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났다. 마치 자신을 질책하는 반장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전이 힐끗 돌아보더니 주머니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서 쓱 규형의 앞에 놓아준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정신 녀석이 담배와 라이터를 그 옆에 다소곳이 놔준다. 나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라는 뜻이었다. 이 두 녀석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자신이 잘못한 일 같았다. 만약 규형이 옳았다면 벌써 두 녀석이 깽판을 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규형은 녀석들이 내민 밴드와 담배를 챙겨들고 계명이 소리 질러 부르는 것도 외면하고는 교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뭐야 도대체가!! 그 XX는!! 왜 가만히 있는 네 책을 던져버린거냐고!”
철민은 평소에 쓰지 않는 욕설까지 내뱉으며 자신의 분노를 어필했다. 현기와 함께 인우를 찾으러 나온 철민은 인우가 교정에 엎드려 찢겨진 책의 잔해를 모으는 것을 보고 현기증이 날만큼 화가 났다. 현기는 울듯한 표정으로 달려가 인우를 도왔지만 철민은 가만히 당하고 있는 인우에게도 화가 났다. 방금 전 상황은 분명 인우의 호의가 무시당한 것이었고 차규형이 제멋대로 인우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현기는 인우의 책을 주워서 나머지 책장을 다 모은 인우에게 건냈다. 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인우야..”
“난 괜찮아. 별일 아니야.”
인우는 현기와 철민에게 어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뭐가!! 아니..”
“이,인우야...!”
“어서 들어가자. 다음 시간 시작하겠다.”
인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걱정하는 친구들을 달래서 교실로 들어갔다. 철민은 뭔가 불만인 표정이었고 현기 역시 걱정하는 얼굴을 지우지 못했지만 인우는 개의치 않았다.
“자리를 바꾸는 게 낫지 않냐?”
그들이 교실에 다다랐을 때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있던 진유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도 차규형이 보인 행태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다른 놈들에게도 멋대로 바꾸지 말라고 했는데 반장이 제일 먼저 어기면 어떻게 되냐?”
인우가 말했다. 진유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인우가 들고 있던 책을 쓱 뺏었다.
“걸레가 됐네. 3층에서 떨어졌으니 당연하지. 나 테이프 있으니까 붙여주마. 또 눈치 없이 차규형이 놈에게 책 보여준다고 깝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쓱 돌아서 자리로 돌아가버리는 진유의 말은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인우는 녀석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차규형은 마지막 시간까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인우였다. 수업을 통째로 째다니. 자신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가 수업을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이놈은. 이럴 거면 학교는 왜 다니는거야. 나가서 그 좋아하는 싸움질이나 실컷 할 것이지. 괜히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인우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벌써부터 녀석이 보고 싶어지는 것만 같아 고개를 휙휙 젓고는 부지런히 책가방을 쌌다. 오늘은 학생회 소집이 있는 날이다. 회의를 마치고 바로 도서관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두르는 인우였다.
“야. 반장.”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인우의 귀를 때렸다. 결코 호의적인 음색이 아니라 인우는 한껏 귀찮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부른 대상을 바라보았다.
“황계명. 무슨 일이야?”
차규형의 옆에 찰떡같이 붙어 다니는 이쁘 장한 녀석이었다. 인우가 용건을 묻자 녀석은 찌를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 XX. 무슨 배짱으로 규형일 건드린거야?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
저 이쁘게 생긴 얼굴에서 걸죽한 욕이 나와 인우는 잠시 정신이 휘청했다. 규형과 함께 다닐정도면 보통 성질머리는 아닐터였다. 인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용건이 뭐냐.”
반대로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것은 계명이었다. 이놈 강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차규형을 건드리지 못했을 테니까. 계명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자리 바꿔.”
“안돼.”
“뭐야?!”
계명은 날렵하게 몸을 날려서 인우의 얼굴을 쳤다. 가벼운 몸이지만 그동안 무수한 싸움에서 쌓아온 경험이 있었다. 자신보다 머리하나는 큰 인우를 주먹에 체중까지 실어 무방비한 상태로 쓰러뜨려버렸다. 비겁하다해도 상관없다. 어자피 싸움은 선빵이다.
인우가 교실바닥에 드러누운 순간 교실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싸움구경으로 다른 반까지 우르르 인우의 교실로 몰렸다.
인우와 계명은 몇 번 엎치락 뒷치락 뒹굴었다. 쉽게 제압당해주지 않는 인우에게 막무가내로 주먹을 내지르는 계명을 어쩔 수 없이 몇 번 허용한 인우의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명치끝도 세게 맞았는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우는 운동신경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계명의 공격을 피했다.
“이놈들!! 뭐하는 거냐!! 얼른 교실로 안돌아가?!!”“으악! 선도위원회다!”
“튀어 튀어!!”
그때 학교의 치안을 담당하는 집행부인 선도위원회의 2학년 선배들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싸움이 일어난 지 한참 만에 귀찮다는 듯이 나타난 그들은 인파를 헤치며 천천히 인우네 교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황계명. 너 또 선도부에 걸리면 안되잖아.”
아이들 틈에서 구경 중이었는지 병욱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쌍둥이들에게 눈짓했다. 규형말고는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 쌍둥이들일지라도 지금 상황의 심각성은 잘 알았다. 황계명은 요령이 없어서 선도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놈이고 한번 더 걸리면 위험했다. 아직도 싸움의 여운을 가라 앉히지 못해 씩씩대는 계명을 쌍둥이들이 보쌈하듯 들고 튀어버렸다.
“어이 반장. 주먹 셀 것 같은데 여기 한 대 때려봐.”
병욱이 싱글거리며 자신의 볼을 갖다 댄다. 인우는 계속 공격당해서 열이 받았던 찰라였기에 거침없이 병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큭...”
휘청하고 뒤로 밀려난 병욱이 입에서 핏덩이를 내뱉었다.
“제법인데 반장.”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는 얼굴에 인우는 녀석에게 말렸다는 생각에 퍼뜩 들었다.
“어이. 거기 싸움꾼 두명. 따라와라.”
어느샌가 홍해바다처럼 쫙 갈라선 아이들 사이에서 2학년 선도부원으로 보이는 선배가 손을 까딱였다.
“자자. 기합 받으러 가보자고. 반장.”
윙크까지 날리며 룰루랄라 끌려가는 병욱을 보며 인우는 한숨을 쉬고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아.. 엉덩이 아파. 젠장. 나중에 황계명이 놈한테 톡톡히 대가를 받아낼테다.”
이곳은 학교 지하의 반성실. 선도부실까지 끌려간 인우와 병욱은 초범(?)이라는 정상을 참작해 엎드려서 엉덩이를 몇 대맞고 다신 학교 내에서 싸우지 말라는 훈계를 선도위원회 자칭 넘버 투라는 차원경 선배에게 1시간이상 들은 뒤 옆방에 마련된 반성실에서 반성문 10장이라는 지루한 엄벌에 처해지고 말았다.
인우는 깨끗한 글씨체로 A4용지에 예의바르고 겸손하며 반성하는 자세로 자신의 일생 첫 반성문을 써내려갔다. 아무튼 차규형을 만난 뒤로는 이상한 경험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졸업하는 날까지 한번도 올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도부실도 내려와보고. 난생처음 반성문이라는 것도 써보고. 인우는 앉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매라는 것도 처음 맞아본다. 간만이라면서 사랑과 애정을 가득담은 지도를 해주겠다는 차원경 선배가 풀스윙으로 신나게 엉덩이를 때렸는데 왠지 그가 밉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이라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치욕감이 들지도 않았다. 선생님들께 맞았다면 왠지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들이고 이곳은 원래 이런 일을 하는 곳이었으니까 괜찮았다. 친절하게 반성실로 안내해주고 A4용지 10장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사라지던 선도부의 선배를 보고는 학생회 말고도 선도위원회도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인우였다.
“..야.. 반장아. 넌 무슨 놈의 반성문을 그렇게 정중하게 쓰냐.”
자신의 반성문을 훔쳐보는 병욱을 힐긋 본 인우는 녀석이 벌써 10장을 다 채웠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충 휘갈겨서 쓴 것도 아니고 빽빽하게 앞뒤 채워서 10장이라니. 인우는 병욱이 다시 보였다. 무표정이긴 했지만 충분히 놀라운 마음으로 멍하니 병욱을 바라보던 인우였다.
“왜..? 내가 너무 잘생겨서 마음이라도 뺏긴 거야?”
다시금 그 ‘싱글싱글’미소를 지으며 병욱이 말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병욱은 순간 머리를 감싸 쥐고 이 땅에서 꺼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아아!! 반장한테 이런 쪽팔리는 말을 하다니! 나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거야!! 아까도 그렇고! 왜 갑자기 시커먼 사내놈들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하냔 말이다!!!! 난 정상이라고. 그래. 난 정상이야. 내가 마감에 너무 지쳐서 그만 잠깐 정신 착란이 일어난 거야! 그뿐이야!
병욱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급격한 혼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인우는 병욱의 ‘작업’이 된 한마디에 반듯 하게 생긴 녀석의 외모를 다시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주렁주렁 번쩍이는 피어싱을 마구 박아댄 녀석의 외모는 자세히 보니 제법 준수하고 잘생겼다. 뭔가 성숙한 느낌도 들고. 또래 녀석들 같지 않은 것은 차규형과 비슷하군. 아아. 나 여기까지 와서 그 녀석 생각을 하는 건가. 으악.
인우는 자신도 모르게 병욱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려 버린다. 동시에 격정을 가라앉힌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병욱이었다.
“규형이놈 때문이지? 계명이랑 싸운 건.”
“응.”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병욱. 인우는 병욱이가 소문대로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니가 이해해라. 상처도 많은 놈들이다. 세상에서 쳐내지기만 한 놈들의 마음을 넌 모를거야. 뭐든 삐뚤어 보이는 건 당연하다.”
병욱의 자조어린 중얼거림에 인우는 감성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상처가 많다고 언제까지나 어리광을 부리고 살수는 없는 거다.”
“....!”
병욱은 순간 놀랍다는듯한 표정으로 인우를 바라보았다. 인우가 자신들을 편견에 사로잡힌 눈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제비뽑기를 할 때 알아보았다. 마지막에 자신들이 제비를 뽑아야 했던 이유는 자신들이 제일 뒷자리에 진을 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장은 자신들을 피하지 않았고 반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얻어터졌는데도 선도부실에서 계명이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병욱은 잠시 자신이 또 위험한 길로 빠져들뻔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 하곤 미소를 지으며 인우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번엔 신세 졌다. 아무리 이런 우리들이라도 학교는 나와야 되지 않겠냐.”
“황계명에게 전해. 자리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녀석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바꾸지 못한다고.”
병욱은 그 고지식함에 찬사를 보낸다. 고개를 끄덕이곤 밝게 웃었다.
“반성문 다 썼으면 나가자. 이 지하실에 더 있다간 몸에 곰팡이 피겠어.”
“근데 넌 무슨 반성문을 그렇게 빨리 쓰냐? 많이 써봤어?”
“까짓 반성문쯤이야. 난 프로 작가라고!”“작가? 정말? 네가 쓴 글 읽어볼 수 있을까?”
“어렵지 않지. 다만.. 네가 좀 충격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아. 난 장르가리지 않고 글이라면 다 읽는다. 왠만해서 충격 받을 성격도 아니고.”
“그래? 좋았어! 유도 소년 다음엔 반장인가?! 점점 순진한 놈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기분이구나- 으히히- 왠지 즐거운데?”
둘은 키득대며 반성실을 빠져나간다.
“인우야!!!!”
“인우야아아아!!!”
“야아! 조인!!!!!!!!”
얼굴이 멍으로 얼룩덜룩해져 있는 인우가 교실로 들어서자 친우라는 놈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인우는 귀찮다는 듯 그들을 떼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로 돌아와 책가방을 마져 쌌다. 학생회 회의를 못 갔다. 선도부 선배들이 전달해주었으면 다행이지만 참 골치 아파졌다.
“황계명이랑 싸웠다며? 으악. 얼굴 봐. 안 아프냐? 양호실 가자!”
“이,인우야... 야..약발라야..해..”
“으득..이 놈의 차규형 패거리들. 이렇게 되면 전면전이다!!”
흥분한 친구들을 달래며 인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박중건. 넌 유도부 훈련 안가냐? 여태 여기서 뭐해. 그리고 이현기. 고맙게도 선도부에서 약까지 발라줬다. 난 괜찮아. 연철민. 이건 황계명과 내 문제야. 괜히 다 끝난일 확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난 공부하러간다.”
각자에게 딱딱 할말만 하고 인우는 가방을 메며 교실을 휙 나가버린다. 뒤에 남은 세명이 넋 나간 표정이 된 건 당연지사. 그런데 간줄 알았던 인우가 문을 드르륵 열더니 얼굴만 빼꼼 내밀곤 한마디를 한다.
“기다려줘서 고맙다.”
이래저래 참 착한 놈이다.
“야. 이번 학업 성취도 평가 예상문제. 우리 학원에서 준거다.”
“땡큐. 진유야.”
야간자율학습 중. 인우는 진유가 다가와 프린트 물을 건네고 옆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진유는 인우의 집안 사정을 조금 알고 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산다는 것도, 큰형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인우가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본인의 의욕이 대단하기 때문에 진유는 가끔 학원에서 받은 프린트 물을 복사해서 인우에게 주곤 했다. 보통 자존심이 상할 텐데 인우 이 소같은 놈은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땡잡았다고 좋아한다. 가끔 보면 어딘가 좀 모자란 놈 같기도 하다. 하지만 워낙 평소에 카리스마 있게 반을 이끌어 나가고,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는데다가 성실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아주 모범적인 녀석이기 때문에 시니컬한 진유는 인우가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완벽한 녀석이 가끔 보이는 허점 덕분에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이 좋았다. 아마 그런 면 때문에 이제껏 이 녀석과 사귀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 봐라.”
진유는 인우의 멍투성이 얼굴을 보며 인상을 지푸렸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 나을 때까지 니네 집에서 좀 재워주라.”
인우의 말에 진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는 홀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멀리서 버스3번 갈아타고 어찌어찌하며 다녔지만 고등학교가 되자 새벽등교에 한밤중하교를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인우가 형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재워주겠다고 했다.
“인우야. 그런데 너 안병욱이 좀 알아?”
“병욱이?”
진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중건이랑 그놈이랑 이번에 짝이잖아. 매시간 둘이서 뭔가를 쏙닥댄단 말이지. 물어봐도 얼굴만 시뻘겋게 돼서는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 뚱땡이 놈이 나한테 비밀 따위를 만들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인우는 또 속으로 진유, 중건이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겉으로는 덤덤하게 말한다.
“음. 아까 잠시 이야기 했는데. 병욱이가 글을 좀 쓴다나봐. 아마 그거 봐주고 있던 거겠지.”
“글? 그 피어싱 덩어리가?”
“반성문 쓰는거 보니까 상당한 글 솜씨던데.”
“별꼴이다.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시길래 중건이 같이 근육 덩어리가 그렇게 좋아라 하는거람?”
인우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중건이가 좋아해?”
“응. 이상하단 말야. 책이라면 베고 자는 것 밖에 안하는 박중건이 눈에 불을 켜고 읽고 뭔가 계속 읽고 있더라고. 그나마 공부한다는 수업시간에조차 말이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진유의 짜증 섞인 얼굴을 보며 인우는 정작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건이가 좋아한단 말야? 세익스피어도 모르는 그 녀석이? 병욱이는 도대체 어떤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아까 말할 때는 무슨 굉장히 충격적인 장르인 것처럼 말하던데. 갑자기 굉장히 궁금해지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진유와 학교를 나서며 인우는 큰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용웁니다.”
“형님. 인우예요.”
“그래. 막내.”
인우는 진유가 친구들이랑 인사를 하는 동안 길옆에 서서 큰형 용우와 통화를 했다.
“형님 집에 계십니까?”
“이제 들어가는 길이야. 왜?”
“다음 주 화요일에 있을 학력평가고사 때문에 지금부터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바로 학교로 가려고 합니다.”
“아아. 시험이야? 집에도 못 들어오고. 힘들겠네.”
형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일에서 피곤에 찌들었을 형이었지만 인우에게는 늘 이렇게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형님이다. 인우는 형을 속이는 자신의 양심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이런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 낫다. 선의의 거짓말 아니던가.
“반장.”
형과의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갑자기 머리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제는 익숙한 굵은 음성. 인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차규형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보지마라.”
규형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늘 달고 다니는 패거리들은 어디에 떼어 놓았는지 차규형은 홀로 그렇게 인우의 앞에 서 있었다. 어느새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는지 새까만 정장차림에 하얀 셔츠, 감청색 넥타이를 한 그의 모습은 적어도 5살은 그를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도대체 저러고 어디를 갈 셈이란 말인가. 수업을 전부 빼먹은 주제에.. 교복은 이곳저곳 단추도 잘 안 잠그고 불량하게 입고 다니는 주제에...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있는 힘껏 드러내는 인우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을 봤다는 기쁨에 놈을 용서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인우는 사실 작은 것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다. 완고하기도 해서 한번 틀어지면 원상태로 돌리지 못한다. 인간관계도 그러했다.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타인에게도 근본적인 믿음을 저버리면 그때부터 신뢰를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인우가 차규형에게는 힘없이 마음의 빗장이 마구 풀려버리려 한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이제까지 안 그랬잖아...”
그러면 내 책까지 집어 던진 놈을 귀엽다고 봐주냐. 이 곰 같은 놈아. 인우는 무심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니가 할말이 있으면 해라. 난 한귀로 흘릴테니..’하는 얼굴이었다. 규형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만 갔다.
“.....나... 일 가야 하니까.... 내일 이야기해.”
이야기는커녕 앞으로 너에게 말도 붙이지 않을 예정이였다...라고 슬쩍 말해줘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저 곰녀석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관두었다.
“그리고..이거. 급하게 사온거야.”
규형은 인우에게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무언가를 건네고 인사도 없이 길을 건너가버린다. 어느새 그의 앞에 달려온 검정색 세단에서 남자가 나오더니 규형에게 차문을 열어주고 그 차를 타고 차규형은 바람과도 같이 인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인우였다. 그러다가 녀석이 자신에게 주고 간 것이 뭔지 궁금해졌다. 규형이 건넨 봉투에는 서점 이름이 찍혀있었다. 개봉해서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건 빳빳한 표지의 새 영어 교과서였다.
순간 인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