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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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노래] 막내의 의무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꽃내음을 흠뻑 머금고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꽃가루가 부산스레 사방팔방 휘날리고 햇살은 따스하게 한쪽 볼에 입 맞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봄기운을 느껴본다. 계절의 여왕이 귓가에 산뜻한 인사를 속삭이고, 향긋한 공기는 다정하게 전신을 휘감는다. 무게중심을 뒤로 쏠리게 두었더니 푹신한 풀밭으로 마치 보송보송한 새 이불이 쫙 펼쳐지듯 온몸이 내쳐진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새파란 풀들이 잔뜩 깔려있는 이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고 드러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마음속 찌꺼기를 모두 날려버릴 것만 같은 상쾌함으로 드높았다. 평화로웠다. 진정으로 이만큼이나 여유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느긋했다. 이 시간이 영원토록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장! 인원체크해라!” 이 평화로운 들판에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려 퍼진다. 조인우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인우야! 3반 XXX들이 지네가 먼저 버스 탄다고 우리 반을 앞질러갔어!” “버스타면 휴게소까지 얼마나 걸려? 반장?” “우리 화장실 좀 다녀오면 안 될까? 조인우.” “인우야인우야인우야! 이리 와봐 반장!” “인우야! 여기 좀 봐봐!”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푸르고 파랗고 샛노랬으며 핑크빛이었던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확 날아가듯 사라졌다. 인우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하니 자신을 부르는 무리들을 바라본다. 학생복을 입은 일군의 무리가 너도나도 바락바락 악을 쓰며 인우를 호명하고 있었다. 봄바람의 여운이 아직도 살결에 머물러 있는데... 꽃향기가 아직도 내 주변에 흐르고 있는데... 인우는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고 어깨가 축 쳐진 채 뚜벅뚜벅 걷기 시작한다. 아아.. 나는.. 또 반장인건가........ 막내의 의무 by 달빛노래 누군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신기한 일이다. 인우는 퉁퉁 부어 오른 눈을 손으로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몸무게가 편중되자 침대 한쪽 귀퉁이는 푹 가라 앉아버렸다. 체중이 늘었나 생각해본다. 몸이 무겁다. 새 학년 새 학기라고 잠을 설친 것이 원인이었다. 답지 않게 어젯밤은 긴장으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소풍가기 전날 잠 못드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인우는 잠시 앉아서 반성을 한다. 조인우는 예민한 성격이 아니다. 돌을 맞아도 무슨 일 있냐 하는 사람이 조인우다. 작은형 하는 말이 애기 때부터 사십대 아저씨 같다고 할 만큼 점잖았다고 했다. 더운 여름 계속 바닥에 누워있어서 등에 땀띠가 잔뜩 나도, 다른 아가들처럼 아프다고 보채기는커녕 뒤척뒤척 자세를 바꿔가며 땀띠의 자체해결을 보는 아주 무심한 아이였다고 했다. 그런 자신이 어젯밤 잠을 설쳤고 잘 꾸지 않던 꿈까지 꾸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인우는 정확하게 꿈의 처음과 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뭐랄까... 나름대로 악몽이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릴 만큼 과도한 액션이 필요한 꿈이었냐하면, 인우 나름대로는 그러했다. 상당히 무서운 꿈이었다. 인우는 일으켜지지 않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온다. 아직은 새벽이었다. 어두운 주방이 눈에 들어온다. 큰형이 밥을 해놓고 다시 들어간 모양인지 밥솥에 불이 반짝반짝 들어와 있었다. 방향을 돌려 욕실로 향한다. 불을 켜고 들어가 욕실 벽에 붙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뭐냐..” 무심코 말을 내뱉은 인우였다. 이거이거 꼴 좀 봐라.. 아무리 아침엔 약하다지만 얼굴도 붓고 눈도 붓고 머리는 새집인데다가 푸릇푸릇 수염도 자라있었다.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입에 문 인우는 역시 벽에 붙박혀 있는 수납장에서 전기면도기를 꺼낸다. 플러그를 꽃고 열심히 칫솔질을 하는 인우다. 면도기는 작은형이 고등학교에 간 기념이라며 큰마음 먹고 사준 것이었다. 이렇게 작은 형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인우가 꼭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해결해준다. 그렇게 커다랗고 투박한 사내가 마치 엄마처럼 아주 잡다한, 그러면서도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련의 것들을 꼼꼼하게 챙겨준다. 덕분에 어머니의 빈자리를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인우였다. 작은 형이 사랑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나저나 요리를 하더니 여성호르몬이 생겨버린 걸까. 그런걸 뭐라고 하더라.. 호모? 우엑. 설마 작은형이....라며 작은형 경우가 들었으면 ‘임마! 그게 아냐!’라고 고함지를 만큼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치카치카 인우는 양치질을 한다. “얼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냐.” “어휘력 하고는...” 깔끔하게 면도를 마치고 이리저리 부어올라 곰돌이처럼 되어버린 얼굴을 찬물에 대강 적시고 욕실을 나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형 조경우가 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다짜고짜 오늘 아침 해가 어디에서 떴는지 확인해보잔다. 분명 아무도 깨워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오는 인우를 본 소감일 것이다. 안하던 짓을 하면 일찍 죽는다..라는 말까지 하기 전에 가벼운 비아냥을 쏘아 보내고 인우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잘 다려놓은 새 교복을 차근차근 챙겨 입는다. 빳빳하게 풀먹인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다. 조금은 고집 있어 보이는 턱선을 가지고 있는 인우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무척이나 표정이 없었다. 양 어깨에 그새 올라와 앉아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인우는 거실로 나온다. “막내. 일어났냐.”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상을 차리고 있는 큰형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인우다. 큰형은 새벽같이 일어나 고등학생인 동생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아침밥을 해야 하는 버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동생들에게 미소를 아끼지 않는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인우라 할지라도 아침에 특히 빛을 발하는 큰형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무척이나 섭섭하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고등학교 첫날인데 기분은 어때?” 큰형의 미소 섞인 물음에 인우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다 짧게 한마디 읖조린다. “잠을 좀 설쳤어요.” 굳이 큰형에게 말할 만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족들마저 자신을 로봇이라고 보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인우였다. 역시나 큰형인 용우는 껄껄 웃으며 인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귀엽게 긴장 같은 것을 하는 거냐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인우는 어젯밤부터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가서도 반장 따위를 하면 어쩌지..하는 고민을 하면서. 중학시절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하던 인우였다. 성적이 좋다는 것 이외에 영 볼만한 게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인우였다. 그런 자신이 반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지나치게 성실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사실 반장같이 귀찮은 것을 누가 냉큼 하겠다고 말하겠는가. 인우는 자신이 성실한 것 빼고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동안 반장으로서 혹사(?)당해 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고로 고등학교에 가서는 절대로 성실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며 전의를 불태우는 인우였다. 자신은 고등학교에서 반장같이 시간을 많이 뺏기는 일 말고도 할 일이 있는 몸이었다. 방학동안 안다니던 학원까지 다녀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인우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원치 않는 자신을 가졌고 차마 낙태시키지 못한 채 천만 다행으로 이 세상에 나온 인우의 장래를 무척 걱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다. 인우는 기껏 낳아온 자식이 부모님께 부끄러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누구에게라도 번듯하게 자랑 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남들만큼 버는 직장을 잡아서 늙은 부모님을 공양하며 그렇게 살고 싶었다. 갸륵한 마음에 열심히 공부를 시작한 인우는 점점 자라면서 큰형과 작은형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은 어리지만 충분히 느끼고 자각하고 있었다. 아직 너무 어린 자신 때문에 큰형이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작은형이 어떤 것을 포기해야했는지. 감정표현에 서투른 인우는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어린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이 답답한 심정을 세상으로 내돌리거나 힘든 형들에게 걱정 따위 끼치면 안된다고 결심한다.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공부란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었다. 큰형이 회사를 다니고 작은형이 아르바이트를 다니는 것처럼 자신은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큰형은 기뻐하고 작은형은 칭찬을 해준다. 부모님은 대견해하시고 주위의 시선은 자신에게 호의적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흡족하고 행복하게 되는 길을 가는 것을 어째서 인우가 망설이겠는가. “경우 저놈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지각해서 집으로 전화오고 그랬는데...큭큭.” 큰형은 대견하다는 듯 인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때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경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내 욕한 거야?!” “와서 밥이나 먹어라.” 용우형은 뜨끔한 얼굴로 경우형의 밥을 퍼준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자리에 와서 털썩 앉는 경우다. “오늘 학교가면 나 들어가는 거 못 보겠네.” “아.. 형. 언제 출발해? 전화할게.” “됐어 임마. 얼마 안 있다가 또 올텐데 뭘.” 경우는 그 큰손으로 막내의 머리통을 폭 쥐고는 쓱쓱 움직이며 껄껄 웃는다. 울퉁불퉁 근육위로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내다운 팔과 자신의 빈약한 팔을 번갈아 보는 인우다. 사실 인우는 작은 형을 무척 좋아한다. 자꾸만 까칠하게 대하게 되긴 하지만 내심 작은형의 넓은 품을 좋아하고 단단한 어깨를 좋아한다. 외모만이라면 능히 자신의 모델이 되고도 남는 경우형. 키도 크고 근육도 있어서 남자답게 보이는 작은 형은 군에 들어가더니 더욱 거대해 보였다. 부럽다. 자신도 꼭 저런 몸을 가지겠다고 결심하는 인우다. 그때 역시나 경우의 물 떨어지는 머리가 신경쓰였던지 용우가 핀잔을 준다. “너 군인이 그렇게 머리 길러도 되는 거냐?” “말년 병장인데 뭘. 버텨보는 거지. 으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경우. 인우는 그런 형을 아스라이 바라본다. 자신이 꿈꾸던 진짜남자(?)가 된 형.... 아...멋지다. 물론 몇 달 후면 전역이지만 그는 지금도 엄연히 군인이었다. 3박4일의 휴가를 마치고 오늘 부대로 들어갈 예정이다. 오늘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첫날이라 배웅은 못나가지만 지난 이틀 동안 형하고는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경우형은 제법 잘 노는 편이었기 때문에 방학 중에도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붙들고 있는 인우를 보더니 경악하며 휴가 기간 내내 인우를 짊어지고 싸돌아다니기 바빴다. 인우는 또 인우 나름대로 간만에 나온 작은형의 부탁이라 안 들어 줄 수도 없어서 끌려 다녔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아직 미성년인데도 당당하게 술집에 데리고 들어가질 않나(이상하게 남자밖에 없는 술집이었지만) 춤도 추러 가고, 볼링도 치러 갔다. PC방에 가서 게임도 하고(물론 경우는 내내 인우에게 물만 먹었다.) 그런 작은형이 다시 부대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했다. “앗. 인우 발견!” “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복도가 떠나가도록 자신을 부르는 요란한 소리. 곧이어 인우는 등 뒤로 덥쳐 오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휘청 거리는 몸을 바로잡는다. "오오- 분명 앞으로 폭 꼬꾸라질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버티는 걸? 방학동안 운동 좀 했나보지? 조인?“ “깔깔깔! 인우야! 대단해 대단해! 이 뚱땡이 중건이를 단번에 업어버리다니!” “뭐야?! 뚱땡이!? 죽을래. 오진?!” 앞뒤에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친우들. 인우는 이 민폐만 끼치고, 시끄럽기만 한 녀석들이라도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나 3글자짜리 이름을 굳이 앞에 두 글자만 부르는 박중건. 그리고 쬐끄매도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다정다감한 오진유. 중학교 때 학생회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낸 녀석들이다. 반은 달랐지만 워낙 학교에 행사가 많았던 지라 각자 각반의 반장 이름표를 달고 지겹게도 붙어 다녔다. 인우가 다녔던 명성중학교와 오늘 입학하게 되는 명성 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으로, 대부분의 학생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에스컬레이터식 진학을 하게 된다. 외부 진학생은 드물고 3년 내내 얼굴을 보고 지낸 동기들이 한꺼번에 고등학교로 진학하니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다는 느낌보다는 건물만 바꿔 수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복도를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녀석들의 얼굴이 대체로 낯이 익다. 특히 학생회 녀석들은 마치 형제처럼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며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고 같은 고등학교로 오게 되어 내심 기쁜 인우였다. 녀석들은 조금 특이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우의 몇 안되는 친우들이었다. 박중건은 유도부의 총망 받는 신예면서도 노는 데라면 빠지지 않는 쾌활한 녀석이었다. 이곳저곳 발도 넓어서 진정 ‘인기인’이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는 나이스 가이. 하지만 그 매력이 여학생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조금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왜 여자애들은 날 싫어하는거야아아아아!!’ 라며 절규하는 중건을 몇 번 달래준 적도 있는 인우였다. 인우역시도 왜 저렇게 명랑 쾌활한 녀석이 여자에게 인기가 없을까 한동안 심각하게 고찰해보기도 했었다. 눈매도 선하게 생겼고 기본적으로 만인에게 친절한 성격에다가 늘 긍정적인 녀석인데. 그리고 인우가 그토록 동경하는 근육질의 사내이지 않던가. 벌써 180이 넘는 키에 유도로 균형 잡힌 단단한 근육들... 자신이 여자라면 단번에 좋아했을 거라고 인우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을 줄이야. 만인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은 정작 실속이 없기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마르고 얼굴이 조그만 미소년 타입을 좋아하는 여고생들에게 같은 남자들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중건이의 건실한 체격 역시 그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응응? 중건아. 솔직하게 말해봐. 너 90키로 넘지? 그치? 어쩌면 100키로 넘는 거 아냐? 그럼 네 아이큐 보다 많이 나가는 거잖아. 그렇지? 응?” “으악!!! 오진 너 이 새끼!!” 저 천진난만한 미소로 중건이를 열 받게 하고 있는 녀석은 오진유. 무거워 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 어두운 성격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유쾌한 녀석이었다. 인우는 처음 학생회에서 진유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 모인 반장들 가운데 제일 대화를 쉽게 나누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분명 트러블이 일어나면 조금은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어떻게 보면 재수 없는 녀석일런지 몰라도 진유가 현명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떤 면에선 야단스럽고 붕붕 떠다니는 중건이와는 아주 잘 맞는 단짝이다. “어라. 조인. 너 가방은?” 등교길이라 책가방을 매고 있는 두 사람과는 달리 달랑 책 한권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는 인우를 발견한 중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오는 길이라며 책가방은 교실에 벌써 가져다 두었다고 대꾸하는 인우였다. ‘학기 첫날부터 분발하는데? 그래봤자 나한테는 이길 수 없겠지만.’이라며 코웃음을 치는 중건에게 ‘그런 말은 네 체중이나 아이큐보다 낮게 조절하고 나서 해!’라고 진유가 말했다. 표정이 없는 인우라도 이정도 되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체중과 아이큐의 상관관계에 대해 한동안 격렬한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조용해진 것은 앞으로 1년 동안 그들이 함께 지내야 할 새 교실 앞에 다다라서였다. 우연찮게도 셋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한반이 되었고 그 행운을 기뻐했다. 같은 반이 되지 않았더라도 친한 친구로 남았겠지만 말이었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라? 조인우. 박중건? 오진유까지?” “으엑! 연철아냐! 너도 우리반 이냐?!” “우와아아아! 철민아! 이게 왠일이야.”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한사람이 있었다. 말쑥하게 한 치의 빈틈없이 교칙대로 차려입는 새 교복에 싸늘해 보이는 인상을 한 녀석. 연철민이었다. 인우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고 중건이가 요란스레 녀석과 손을 마주친다. 철민 역시 작년에 함께 학생회 활동을 한 녀석이었다. 인우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반에 요주의 인물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아니. 마음이 놓인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편안해졌다. 어젯밤 그토록 긴장했던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나 인재가 많으니 자신이 반장이 될 가능성이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학생회는 보통 각반의 실장들이 모여서 구성한다. 명성중학교나 고등학교 모두 그 형태는 비슷하였다. 각반 실장이 된 사람들은 중건처럼 특별한 사정(집안 대대로 유도가인데다가 본인이 중등 유도 선수권에서 입상한 경우)이 아니라면 동아리 활동 대신 학생회나 선도위원회에 속하게 된다. 이를 집행부라고 부른다. 물론 동아리 활동만큼이나 재미있기 때문에 집행부가 되는 것을 우러러보는 아이들이 있을지언정 거부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거부할 수도 없다.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일부로 그 자리를 차고 나온다면 주위의 시샘과 괜한 헛소문으로 학교생활하기가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부만으로도 머리가 터지는 인우가 학생회를 탈퇴할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학생회에 속하니 저절로 인맥도 넓어지고 친구도 많이 생겼으니 불평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었다. 아무튼 학생회를 구성하는 인물들은 모두 쟁쟁한 인력들이고 그런 녀석들이 지금 인우 눈에 보이는 것만도 4명이다. 어느 누가 반장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아아. 올해는 괜찮다. 괜찮다. 인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인우야... 무...무슨 고민이... 이,있는거야..?” “...아... 현기야..” 인우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다가와 걱정스레 묻는 녀석을 보며 인사를 했다. 조금 말을 더듬고 우물쭈물 말하는 녀석. 이현기라고 한다. 인우를 보며 발갛게 물들인 얼굴에 미소를 담는 현기는 조금은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긴 하지만 무척 착한 친구다. 작년에 함께 학생회 활동을 하며 친해졌다. 현기는 확실히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이지만 반장이 되기 부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녀석이 답답해서 다른 아이들도 많이 수근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나서 그런 말들은 싹 사라졌다. 현기는 늘 석차 1등을 놓치지 않는다. 정말 부러운 녀석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반장이었기 때문에 늘 척척 알아서 일을 해내니 학생회 선배들도 흡족해 했다. 언제나 1등인데 자만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소리 없이 남들이 하지 않는 궂은일을 하는 녀석은 분명히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주변인의 신임을 받기 마련이다. 인우는 더더욱 마음이 놓인다. 이제 반장이 되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 5명째... 인우는 무표정하지만 붙임성 있게 현기와 인사를 나눈다. “앗. 이현.. 이놈. 어느새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있는 거야!” “얼레. 현기도 우리 반? 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올해 죽이겠는데?” “그러게. 작년 학생회가 6명이라. 음모의 냄새가 난다.” 중건, 진유, 철민이 나름대로 현기에게 인사를 건넨다. 인우가 생각하기도 이건 정말 이상했다. 반편성이 성적대로 되는 거라면 우리들은 지금 한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석차라서 각반으로 제대로 찢어졌을텐데 이건 정말 이상한 우연이었다. 고등학교는 설마 무작위로 반 편성을 하는 걸까? 그러면 반 평균이 무척이나 들쑥날쑥할텐데. 설마 학교에서 그런 짓을 일부로 할 리가 없잖아....라며 인우는 고민했다. 그리고 속속 등교하여 교실로 들어서는 눈에 익은 녀석들과 인사를 하고 ‘어째서 너네들이 온통 우리반인거냐!’,‘평균점수를 비정상적으로 높일 놈들은 꺼져줘라!’ 하는 진심 섞인 악담을 좀 들어주며 그렇게 고등학교에서의 첫날은 시작되었다. 인우들이 가지고 있던 의문점은 입학식을 마치고 1교시 끝나는 종이 쳤을 때 교실로 들어온 패거리들로 인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새 학기 첫날임에도 지각에다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교실 맨 뒤 자리에 앉아 있는 애들을 쫓아내고 각자 편안한 자세로 엎어지고 늘어진 그 녀석들은 유약해 보이는 담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교실에서 퇴장할 때까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끌시끌했던 교실에 단숨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 입에 본드를 바른 듯 정숙했다. 몇몇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점으로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인우는 조금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교실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게다가 그 시끄럽던 놈들을 전부 입 닥치게 만든 저 무리의 우두머리인듯한 저 크고 무섭게 생긴 위압 있는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차규형이야.” 낮은 목소리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철민이 말했다. 녀석은 녀석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에다 인우조차 느낄 수 있는 적대감을 한껏 담아 인우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 애썼다. “인우 너야 워낙 세상 돌아가는 거에 관심이 없어서 소문 같은 것은 못 들었겠지만... 저 녀석은. 거물이야. 애초부터 아무도 건들일 수 없었어.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돌면 누구도 말릴 수 없대.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어. 그 작년에 그만두셨던 과학 선생님.... 저 녀석 담임이었는데 첫날 전치 2년에 사직서를 쓰셨대. 그 난다긴다하는 선도부장 최재혁선배도 저 녀석만은 투명인간 취급이야. 건드리기 싫다는 거지.” 사실 지금 인우는 철민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소문이란 것이 원래 건너건너 듣는 것이라 과장된 부분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엄청난 백그라운드가 있는 녀석이라도 교사를 폭행하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닐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소문만큼이나 실제 보기에도 무서운 녀석임에는 틀림없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저 차규형이라는 아이는 굉장히 신기한 존재였다. 마치 공기 중에 가득 차있는 어떤 기운이 저 녀석 있는 곳만 횡하니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공허한 빈 공간안에서 저 녀석은 칼로 찌를 듯한 날카로운 기세를 거리낌 없이 마구 내뿜고 있었다. 무척 위험한 느낌이었다.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싹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인우는 순간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다시한번 놀랐다. “아아- 우리를 이렇게 한반에 몰아넣은 속셈이 다 있었어. 그 빌어먹을 꼰대들 같으니. 저 무시무시한 놈들을 자기네들이 손대기 싫으니까 우리에게 미루는 거야. 망할. 이제 1년간 고생길이 훤하다.” 이례적인 꽃샘추위 때문에 실내에서 방송을 통해 진행된 입학식이 지겨웠는지 안경을 벗어두고 엎드려 자는 진유의 등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중건이 한탄하듯 말했다. 차규형 패거리에 대해 두려움까지 느껴지던 철민의 말과는 달리 중건에게 그 악명의 ‘차규형’은 그저 골칫거리에 불가한 모양이었다. “아...” 순간 인우는 짧게 감탄성을 터트렸다. 방금 전 아직 녹지 못한 눈 쌓인 창밖을 바라보던 차규형이라는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 자리 잡은 동그란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맑았다. 온몸으로 접근금지의 포스를 풀풀 풍기고 있는 차규형의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호기심으로 젖어있었다. 맨들맨들한 그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왼손은 큰형, 오른손은 작은형 손을 잡고 놀러갔던 동물원에서 만난 펭귄의 그것과 같아서 순간 반가웠다. 왜 하필 펭귄인가. 인우는 저 카리스마 폴폴 날리는 차규형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큭...” 순간 교실이 싸늘함으로 얼어붙는다. 인우와 눈을 맞추고 있던 차규형이 웃었다. 인우가 웃자 함께 웃은 것이다. 헌데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아이들이 전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연한 사람은 박중건 뿐. 녀석은 기어코 진유를 깨워서 교단에 나가 어린애들처럼 칠판에 낙서를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여긴 내 땅이야! 넘어 오지마 새꺄’, ‘야, 이 뚱땡아. 자꾸 유치하게 굴면 안 놀아준다.’ 따위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다툼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은 조용히 얼음이 되었다. 이와는 상관없이 인우는 차규형이 조금 더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실의 분위기가 반전됨과 동시에 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사라져버렸다. 마주쳤던 눈도 피해버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럼. 대충 소개는 끝난 것 같고. 일년동안 우리 반을 이끌 실장을 선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천할 사람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드디어 왔다. 툭 치면 넘어갈 것 같은 비실비실한 담임이 여전히 책상위에 다리를 올리고 있는 차규형과 이리저리 엎어져 자고 있는 그 패거리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땀을 뻘뻘 흘린다. 얼른 반장을 뽑아서 다 넘겨버리고 싶다고 얼굴에 써있었다. 인우는 한숨을 쉬었다. “네! 조인우를 추천합니다!” 벌떡 일어서서 박중건이 외쳤다. 인우는 싸늘하게 녀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에 무너질 중건이 아니었다. 혀를 내밀고 히죽대는 녀석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는다. 괜한 짓을 해가지고. “나 공부해야 돼.” “반장하면 공부 못하냐?” “박중건” “몰라. 벌써 추천해버렸으니까.” 말도 안 통한다. 철민은 인우의 편을 들다가 그래도 반장은 인우가 하는 것이 낫다며 곧 입장을 바꾸었다. “그건 왜..?” “왠지... 이,인우 넌. 뭐,뭐랄까.. 거역할 수.. 없다랄까.” 대답은 철민이 아닌 얌전한 현기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인우 주변의 모든 인간이 약속이나 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역할 수 없다니... 부려먹기 쉬운건 아니고?.... 순간 지난밤 악몽이 떠오르며 인우는 절망하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전 연철민을 추천합니다.” 포기할 수 없는 인우는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은 뒤 철민을 추천했다. 연약하신 담임 선생님은 칠판에 또박또박 연철민이라고 적었다. 조인우라고 적은 이름 밑에. 제길! 횡대로 적으란 말야! 종대로 적지 말고! 왠지 저대로 반장, 부반장이 될 것 같잖아! “또 없습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박수를 쳐댔다. 뭐야! 거수도 안하는 거냐!!! 인우의 얼굴을 시퍼렇게 질렸다. “그럼 반장 조인우, 부반장 연철민. 이렇게 된 걸로 선생님은 알겠습니다아.” 으악. 인우의 경악성은 박수와 환호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저 연약한 선생에게 저런 추진력이. 게다가 본인의 의사를 완전 무시한 이 떠넘기기 작전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해치워 버리는 비도덕성. 말끝을 늘이는 담임의 허약해 보이는 얼굴이 왠지 뚝 떨어져 나오는 가면같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인우 뿐이었나 보다. “다수결은... 하지 않는 겁니까.” 소용없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인우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럼 반장은 나와서 소감이라도 한마디.” 씹힌거냐!!! “자자. 반장. 어서 나가서 포부를 밝히고 오게. 그거야 말로 사나이지.” 등을 떠미는 중건. 따라 나오려는 철민. 힘내..라고 조그맣게 응원하는 현기. 인우의 뭐 씹은 표정을 보며 깔깔 웃어대기 바쁜 진유. 인우는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총살당하러 나가는 사람 마냥 우울하게 교탁으로 나간다. 우리 반장아..라며 귀여운 척 하는 담임을 한번 심각하게 노려봐주고 인우는 아이들 앞에 섰다. 뭔가 한건 해냈다는 이 사악함이 가득 담긴 80여개의 눈동자가 인우에게 쏠려있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인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악몽이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주위에 차규형 패거리들이 좀비처럼 일어난다. 알록달록한 머리색들이 참으로 볼만하다. 똑같이 생긴 무표정한 쌍둥이 두 명이 눈 비비며 일어섰고, 계집애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곱상하게 생긴 얄쌍한 놈이 하품을 하며 눈을 꿈뻑꿈뻑하고 있었고, 눈매가 선해보이지만 여기저기 몸에 구멍을 뚫어 뭔가 금속들을 치렁치렁 매달은 살벌한 녀석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리고 차규형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재밌다는 얼굴이다. 인우는 골치가 아파졌다. 이 반은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제서야 무책임 교사들의 진정한 계략이 뭐였는지 눈치 챈 인우였다. 교실 분위기가 어떻든 공부를 할 녀석은 한다. 학교에서 잡아줘야 되는 녀석들은 조그마한 계기에도 삐뚤어지기 쉬운 잠재적 위험군들. 자극이 없다면 그냥저냥 평균은 할 놈들이 주변에 강한 자극을 받으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런 대다수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알아서 잘하는 놈들을 한반에 몰아넣어 버린것이다. 저 차규형이 내뿜는 위험 오로라를 대신 덮어주기 바라면서.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버린 학교에 찬사를 보낸다. 아니... 고등학교는 최소한의 행정만 빼고 모두 학생회에서 결정한다고 했던가. 아아. 대단한 학생회다. 그러고보니 정신 차리고 교실 곳곳의 아이들을 눈여겨 보던 인우는 유난히 녀석들 레벨이 높다는 것을 깨닫는다. 같은 중학교에서 3년을 함께 보냈으니 웬만큼의 유명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보니 반 아이들 대부분 석차 10%에 가뿐이 골인하는 녀석들뿐이다. 자신이 반장으로 지목당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시간을 빼앗는 놈들은 죽여버리겠어.” 아이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주시한 효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인우가 뚜껑이 열렸다! 나왔다! 하며 꺄르르 좋아하는 철없는 것들. 인우는 씩씩대며 반 아이들에게 엄포를 놓는다. 내 공부에 방해되는 놈들은 곧장 지옥으로 보내줄테다!를 연발하는 인우를 보며 손뼉까지 치며 좋아한다. 오오- 죽여줘- 지옥에 보내줘- 여기저기 코러스로 들려온다. 놀림을 받은 인우가 폭발하기 직전에 다행히 수업 종료를 알리는 차임벨이 울려퍼졌다. “조인- 야아! 조인. 너 나랑 말 안할거냐. 친구야.” “저리 꺼져. 박중건.” “엉엉. 무서워 조인.” 귀찮게 근육덩어리 박중건이 자꾸 달라붙는다.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던 인우는 인상을 쓰며 파리를 쫒듯 중건을 떼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철면피 박중건은 계속 인우의 주변을 맴돌며 살랑살랑 꼬리를 쳐댄다. 인우는 정신이 사나운 나머지 답을 틀려버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착한 현기가 인우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다정하게 인우가 빼먹은 ‘-1’을 식 안에 써 넣어준다. 그제서야 문제가 제대로 풀린 인우는 현기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확실히 현기는 다방면에서 뛰어나지만 특히 수학을 잘한다. 반대로 언어는 철민이 잘하기 때문에 현기와 철민이 앞 옆으로 붙어있는 지금의 자리배정이 인우는 무척이나 흡족한 상태였다.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이 친절한 친구들은 귀찮아하지 않고 도와준다. 고마운 일이다. 반면에 박중건이라는 저 망할 놈은.... “...왜 또 나를 노려보는 거야 조인...” 기어코 조그만 진유를 끌어안고는 엉엉 우는 시늉을 하는 중건. “나.나! 널 도와주려고 체육부장 자원 했잖아! 그 정도로 용서해주면 안되는 것이냐? 조인? 응? 넌 그리 속좁은 사내였어? 그런거야?” 중건은 감히 ‘속좁은 사내’카드를 빼들고 나왔다. 인우는 순간 울컥했지만 속좁은 사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린다. “....좋아. 박중건. 지금 당장 매점으로 달려가 포카리 스웨트 3캔을 사온다. 실시.” “실시!” 인우의 말이 끝나자 씩씩하게 복창하고 중건이 휭하니 교실을 뛰어 나간다. 진유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한다. “에에. 수업시간 2분밖에 안 남았는데?” 인우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중건이한텐 2분도 널널할걸.” “으음. 하긴.” 묘하게 납득하는 진유다. 아마도 중건의 괴력같은 스피드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게다. “너무 중건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진유가 인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인우는 어림없다는 투로 대답한다. “그 말 그대로 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