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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55화 (255/257)

255화.

초윤은 며칠 동안 나라연천금강의 집중 치료를 받았다. 나라연은 기존의 일로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사현에게 권법을 알려 주었고, 아침과 저녁마다 초윤을 찾아와 진맥했다. 발작은 원인도 때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탓에 손 쓸 방도가 없었지만, 모자랐던 피를 채워 줄 약을 조제해 먹이고 체온을 높였다. 침대 밖을 그다지 벗어나지 않고 가져다주는 대로 약과 밥을 꼬박꼬박 먹은 뒤 푹 잔 초윤은 얼마 뒤 혈색이 도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쩐지 면경을 가져다 보여 준 천오가 자신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아 멋쩍기만 했다.

현기증 없이 걸을 정도가 되자 사현이의 수련을 봐주고 싶었지만 천오가 극구 말리는 탓에 계단 밑으로도 내려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들어간 막대한 정성을 아는 초윤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창문을 통해서만 사현이를 보았다. 도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자세를 익히는 사현이를 보자 괜히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들기엔 목검도 위험하다 여긴 탓에 꽤 오래 권법과 장법, 각법과 심법만 알려 줬었지. 왁자지껄하게 어울려 놀다가도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기마 자세를 취한 채 주먹을 뻗던 아이들은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귀여웠다. 다 큰 사현이가 생각 없이 내지른 주먹질로 운궁의 마당 바닥을 박살 내고 쩔쩔매는 모습은 별로 귀엽지 않았지만…….

손과 발목의 상처가 느리게나마 전부 아물자, 천오가 여정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운궁의 문도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선 잡아 온 들짐승과 약재로 보존식을 만들었고, 초윤에게 배운 실력으로 간단한 금창약과 요상단을 빚었다. 스승이 입을 옷가지와 신발을 준비했으며 모포와 패물을 마련했다. 운궁에서 지원해 주는 대로 받기만 할 순 없다며 낮마다 반 시진씩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올 때마다 귀신같이 손에 식물형 영약을 들고 와선 괜히 약선의 제자가 아니라고 증명했다.

온종일 방 안에만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갈 법도 했지만, 정말로 느리게 흘러가는 격동의 하루를 겪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초윤에겐 한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평화로운 시기는 정말 한순간에 지나가는구나. 약간 아쉬운 감상이 스쳤을 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운궁의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사영이 급하게 떠났을 때와는 달리 운궁의 모든 문도들이 나와 줄 맞추어 선 채 배행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천오는 꼼꼼히 준비한 짐을 둘러멘 채 초윤의 뒤에 느슨히 섰다.

별로 한 짓도 없이 신세만 지고 가는 입장에선 굉장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취급이었다. 그중에서도 또다시 대표로 나와 초윤과 마주 선 나라연천금강이 턱을 짚은 채 심각하게 초윤의 차림을 뜯어보다 말했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청해성에 흔한 복식을 입혔다만…… 번첨전모(飜檐氈帽)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다 가려 주지 못할 것 같군. 초원은 바람이 강해서 면사를 드리워도 소용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할 셈이오?”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하지. 초윤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장을 흘긋 보았다. 모직으로 짠 두꺼운 감견에 속대를 조이고, 테두리에 검은 천을 덧댄 장포까지 돌돌 두른 뒤 백포말과 혜를 신은 행색은 확실히 중원과 차이가 있었다. 운궁 위층에서 기거하며 길쌈을 하는 문도들이 공들여 지어 준 옷가지였다.

문제의 머리카락은 바깥으로 나오기 전에 천오가 하나로 땋아 내려 준 상태였다. 애꿎은 머리끝만 만지작거리는데,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마을에 머물 때만 스승님과 함께 두건을 쓸 요량입니다. 사저가 신강의 남부를 지나며 썼던 사방두건과 화방건(花方巾), 몽면사(夢面紗)를 두고 갔습니다.”

“아, 그래. 감숙성의 민족 중엔 개두(蓋頭)로 머리카락을 가리는 이들이 있으니 문제 될 건 없겠소. 허면 무슨 색으로 쓰려고?”

“사방두건은 백색, 화방건은 흑색입니다.”

“……음, 그래. 녹색보단 낫겠지.”

왜 하필 녹색보단 낫다는 거지? 나라연천금강이 찜찜하게 중얼거리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현지인이 괜찮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보단 나라연의 옆에서 초윤을 바라보는 사현이와 먼저 인사를 해야 했다.

성격상 울먹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현이는 웃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눈물보다 마음에 걸렸다. 어엿한 어른이 된 사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히 살펴 가세요, 스승님. 저도 귀빈을 모시고 따라갈게요. 누나도 저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초윤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혼자 남아서 무섭진 않고?”

“네? 아…….”

불쑥 날아온 질문에, 사현이가 멋쩍게 뒷목을 매만졌다. 누나나 동생이나 은근히 비슷한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사현이의 실종이 격변의 계기가 된 적이 있다 보니, 그 일로 넷 모두에게 지워지지 않을 긴 시간이 굴레처럼 남아 버렸으니 초윤의 마음은 영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슬며시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굳어 있던 사현이는 곧 다시 피식 웃으며 팔을 내렸다.

“솔직히 무섭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데……. 천오가 혼자 중원을 돌아다닐 동안 저는 사실 내내 서하나 단 형과 함께 다녔거든요. 둘이 바쁘면 제갈 소저하고도 다니고, 장위 형과도 다니고……. 생각해 보니까 이제껏 어떻게든 혼자서는 안 돌아다녔네요.”

“…….”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순 없으니까요. 괜찮을 거예요, 스승님. 이번에는 무사히…… 뵈러 갈게요.”

사현이 헤헤 웃으며 제 양손을 깍지 껴 잡았다. 몸만 큰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찍이 어른스러워진 아이들이 초윤의 앞에서만 자신에게 남아 있던 어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함께 한 몇 주는 역시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해후는 아무리 길어도 모자랐다. 못내 아픈 가슴에 울컥 치미는 통증을 삼키며 입을 다무는데, 옆에 있던 나라연천금강이 태연하게 불쑥 끼어들었다.

“이봐, 당신. 옆에 있는 나는 보이지 않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애를 맡기면서 무슨 쓸데없는 가슴앓이야. 심력에 좋지 않을 걱정일랑 말고 뒤에 있는 놈이나 챙겨 가시오.”

“……아.”

……그러고 보니 나라연천금강 또한 초윤과 마찬가지로 현경의 실력자였다. 어쩌면 힘을 전부 갖춘 자신보다도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게 하다니, 역시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사람 같았다. 초윤은 잠시 멍해졌다가, 나라연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으나, 염치없이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제자를…… 부디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스승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한 사현과는 다르게, 나라연천금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초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선 슬쩍 몸을 숙여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당신 말이오. 애들을 참 잘 키웠어. 첫째와 둘째 모두 나 같은 늙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젊은이로 자랐더군. 어딜 가도 귀염받을걸.”

“연천! 뭐라는 거예요!”

“까탈스럽기는.”

뒤에서 들려온 남편의 볼멘소리에 혀를 쯧 찬 나라연이 고개를 저었다. 초윤은 한숨처럼 살짝 웃으며 장포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궁주님, 손을 잠시 주십시오.”

“으응?”

가락지와 팔찌로 둘둘 감아 장식한 손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불쑥 내밀어졌다. 짙은 색 손바닥은 오래되어 거친 굳은살로 덮여 있었고, 그리 크지 않았으니 천지를 개벽할 힘을 품고 있었다.

조금 더 좋은 걸 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아쉬움을 삼킨 초윤은 얼마 전에 빌린 물건을 차르륵 올려 주었다. 둥글게 깎고 진법을 새겨 넣은 보옥을 하나하나 꿰어 엮은 목걸이였다.

“……아직 몸이 온전치 않아 제대로 된 기물은 아닙니다. 궁주님처럼 뛰어난 무인이 이것을 쓸 일은 그다지 없으시겠지만…….”

“그 자잘한 패물을 가져가서 이리 만든 거요? 어떻게 쓰는 거지? 운궁은 이렇게 비싼 물건을 살 돈까진 없어서 몰라.”

초윤은 원석 목걸이의 용도와 사용 방법을 간결히 설명했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초윤의 이야기를 들은 나라연천금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화통하게 웃었다. 급하게 만들어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다음번에 만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물건을 드려야지. 초윤이 마음을 놓았을 때, 나라연이 문득 다가온 초윤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나라연천금강의 손은 초윤과 비교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손가락의 관절에는 약간의 주름이 있었고, 손등에는 핏줄과 힘줄이 조금씩 불거져 있었다. 그리고 눈 쌓인 산봉우리에 사는 사람답지 않게 체온이 굉장히 따듯했다. 견고한 힘과 밀접한 온기를 느낀 초윤은 어딘가 아득한 기분을 느끼고 나라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천천히 타들어 가는 향 내음과 부드럽고 세밀한 재 냄새가 새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초점이 좁혀진 시야에 실낱같은 흰 연기가 지나가는 듯했고, 잠시나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수면 위에 올라온 것처럼 고요한 정적의 찰나, 나라연천금강의 고동색 눈동자 속에서 두 송이 연꽃이 봉오리를 터트렸다. 희고 붉은 꽃잎을 넓게 벌리며 은은한 향기를 흘렸다.

나라연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고 있자 명료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안다’는 건…… 사람을 참 많이 바꾸지. 오늘 하루를 살아온 나는 어제의 나와 결코 같을 수 없지만, 내일의 기억을 잃어버린 내가 오늘의 나와 같다고도 할 수 없소. 그렇다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체온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팔의 혈관을 타고 흘러 뇌에 닿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이해했으나, 알 수 없었다. 초윤은 적막한 가운데 계시를 받는 사람처럼 나라연천금강의 기묘한 말을 귀에 담았다.

[이 답에 다다른 자는 하나의 권리를 얻게 돼. 나는 내가 보는 광경을 오롯이 해득하고 싶어 눈을 택했지만, 인제 보니 당신은 참 욕심이 많고 무모하며 미련하더군.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미덕이니 당신에겐 자격이 충분하오.]

나라연의 얼굴과 발밑에서 파문을 그리는 수면을 제외하곤 사위가 어두웠다. 허공에 뜬 듯 기이한 부유감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라연천금강은 소리를 내어 조금 웃더니, 맞잡은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당신이 택한 길이니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멈추지 마시오. 의심치도 말 것이며 무너지지도 마시오. 아무리 강한 자도 홀로 서 있을 순 없으며, 내 눈에는 당신을 지탱하는 사슬이 훤히 보이고 있소이다.]

어깨에서 이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잠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라연의 다른 손이 초윤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나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정 혼란스러우면 눈을 주위로 돌려야 하오. 당신을 이루는 것들의 이름은 그곳에 쓰여 있소이다.]

그리고 나라연의 마지막 전언이 끝나자마자, 초윤은 다시 운궁의 정문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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