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팔뚝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은 사영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라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던 초윤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안심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사영이와 설린이는 곧 화해할 것 같았고, 그렇게 된다면 둘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무림맹이든 빙궁이든 좋은 계획을 짤 게 분명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서로 사과하는지까지 귀를 기울여 들어 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잘되리라 굳게 믿었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내게 와 주겠지. 초윤은 탁자를 짚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들은 정보로 보아선 설린이가 먼저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강시를 비롯한 삿된 것들을 모두 막아 내는 진법을 설린이에게 직접 알려 줄 생각이었다. 당초 가장 먼저 섬서성 무림맹에 들려 설린이를 만나선 강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니, 설린이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도리어 이득이 된 셈이었다.
초윤은 휘적휘적 걸어가선 다시 침상의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빙궁의 방문 일정에 큰 변동이 없다면 운궁도 곧 작별이었다. 중원에서 이곳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니 정마대전 준비를 모두 마칠 때까진 다시 찾아올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침상 위에 깔린 모포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무언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멈칫 굳은 초윤은 삐걱삐걱 고개를 들었다. 초윤이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와 달라짐 없이 같은 위치, 같은 자세로 우두커니 선 천오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 체구를 잠시나마 깜빡했다니, 천오가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기척을 잘 숨겨 준 듯했다.
아니, 그런데…….
왜 계속 거기 서 있는 거야…….
계속 서 있게 해서 삐졌나? 하지만 앉으라고 했는데도 굳이 뒤에 있겠다 한 건 너잖아……. 초윤은 떨떠름하게 천오를 불렀다.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기에 그리 청승맞게 서 있더냐. 이리 오거라.”
“……예, 스승님.”
잠깐의 침묵 끝에 나지막이 대답한 천오가 초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방금까지 사영이가 취했던 자세와 비슷하게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법의 해설을 적으려던 초윤은 얘까지 왜 이러나 싶어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물끄러미 이쪽을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외면할 순 없어, 마찬가지로 두 손을 내밀었다.
천오는 스승이 드러낸 손바닥을 보고, 옷소매 틈새로 비치는 손목과 팔뚝을 시야에 담았다. 그러고는 초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온 손을 잡았다가, 그보다 조금 더 타고 올라가 여윈 손목을 쥐었다. 손끝에 닿는 오돌토돌한 흉터를 매만지고, 맥이 뛰는 곳을 지그시 짓누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손목을 붙잡힌 초윤은 할 말을 잃고 아연하게 천오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없는 구덩이처럼 새까만 눈을 내리깐 천오는 여전히 견고한 무표정이었으나, 구태여 사영이와 같은 자세를 취한 점이나 설린이가 짚었던 맥을 정확히 누르는 모습이 꼭…….
“……이상한 곳에서 시샘하는구나. 이까짓 게 무어라고.”
천오가 그들을 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뭐지? 보호자가 나 말고 다른 형제자매에게 친근하게 굴 때 느끼는 질투심인가? 하지만 얘는 스물일곱 살이고, 천오야말로 지난 몇 주 동안 나와 오롯이 함께 있었는데? 손잡기나 진맥에 샘을 내기엔 무색할 정도로 머리도 빗겨 주고, 온종일 옆에 있었는데?
역시 내가 없던 8년이 정서에 정말 안 좋았던 탓인가? 왜 전에 없던 독점욕을 다 커서 부리지? 아니, 전에 없던 건 맞나? 초윤은 내심 머리를 부여잡았다. 스승의 속을 삽시간에 어지른 천오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잡은 손목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제 뺨으로 갖다 댔다. 얼떨결에 천오의 볼을 감싸게 된 초윤은 당황스러운 심정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시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도 이리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승님의 앞에 이렇게 앉아 손을 잡으려면 훈계받을 일을 저질러야 합니까?”
“아니, 그저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혼나기 위한 잘못은 세상 무엇보다도 미련한 짓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초윤은 손에 닿은 천오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젖살이 빠진 얼굴은 어렸을 때와는 달리 한 움큼씩 잡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가벼운 접촉이 도대체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굳어 있던 천오의 입꼬리에 미미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초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만 놓으라는 뜻으로 천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천오는 나름 만족스러웠는지 순순히 손을 풀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허리를 세우자 쭉 높아지는 눈높이가 어쩐지 즐거워져서, 초윤은 기꺼이 고개를 들어 천오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종이나 죽간을 넉넉히 가져오거라, 천오야. 그리고 운궁주를 찾아가 남는 옥이나 패물이 없는지 물어보렴. 이곳에 머무를 시간이 더욱 당겨진 듯하니, 신세 진 대가로 무어라도 남기고 가야겠다.”
“제갈설린이 보낸 뒤 곧장 뒤따르실 요량이십니까?”
“도착한 설린이 사절단을 조금 더 잡아 둘 수 있겠지만, 내가 그들을 기다리게 둘 수는 없는 법 아니더냐. 가야지.”
“……예, 스승님. 채비하겠습니다.”
깊게 고개 숙여 묵례한 천오가 소리 없이 방을 걸어 나갔다. 금방 돌아올 아이를 앉은 채 배웅한 초윤은 신고 있던 신을 벗고, 침상 위로 다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곧 돌아올 천오를 기다리며 가림천 귀퉁이를 살짝 걷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봄이 올 때까진 머물 줄 알았건만, 운궁은 여전히 두터운 눈으로 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