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그대들 덕분에 요즘 운궁이 참 시끌벅적해. 바람 잘 날이 없어. 안 그래도 내 모자란 놈들이 항상 사고를 치느라 조용하진 않은 곳인데, 그대들이 온 뒤로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 하루걸러 하루씩 벌어지는 것 같아.”
운궁에 몇 주째 눌러앉아 온갖 사건을 끌어들이고 있는 식객 초윤이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도 나라연천금강은 진심으로 불쾌해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조금 감탄하는 듯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쩔쩔매는 임 남매와 그저 우두커니 다른 생각을 하는 천오, 그리고 다소곳한 설린이 한곳에 있자니 좁지 않게 내어준 초윤의 방이 꽉 차 보였다. 나라연은 그 가운데서 비딱하게 팔짱을 끼고 선 채 탄복하다가 설린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제갈 소저. 소문주를 찾으러 왔다고?”
“앗, 네! 소문주님은 계획이 누출될 위험을 우려하셔서 정확한 경로나 곤륜파에 대한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감숙성보다는 청해성을 통해 신강을 오가시리라 생각했사옵니다. 그리고 곤륜산맥을 넘으면 필연적으로 곤륜파에 기별이 갔을 듯하여 찾아왔사온데, 설마 정말로 이곳에 계실 줄은…….”
“다섯 지파 중에서도 구태여 운궁의 문을 두드린 이유가 있소?”
“어떤 봉우리에 어떠한 지파가 있는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그저 산 밑에서 형상을 올려다보았을 때 담벼락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을 뿐이옵니다.”
이곳이 운궁인지도 몰랐다고 말하며, 제갈설린이 활짝 웃었다. 이 아이가 그 수줍음 많던 아이가 맞나 싶어 듣고 있던 초윤이 더 놀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갈설린은 열일곱 살에 홀로 중원을 방방곡곡 돌아다니다가 하오문까지 찾아갔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정파는 하오문을 제대로 된 문파도 아닌 장사치로 취급했는데도 어떠한 망설임이나 편견 없이 행동했다.
그게……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에 이르러선 혼자 저벅저벅 청해성을 가로질러 곤륜파까지 찾아오는 실행력이 될 줄은 몰랐다만. 초윤은 설린이 방 한구석에 풀어 둔 창대를 바라보며 자신을 놓아두고 달려간 세월을 잠시 생각했다. 창끝이라고 해석한 별호가 아무래도 맞아떨어진 듯했다.
나라연천금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백협맹의 사자면 몰라도 제갈 세가의 방문은 처음이라 성대히 대접해 주고 싶소만, 이는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쌓인 이야기들부터 나누시오. 소문주가 꽤 미움을 산 것 같던데, 아무리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 한들 제 사람한테 말없이 사라져서야 쓰나.”
“그런 게 아닌……!”
“배려에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궁주님!”
설린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나라연은 그 모습을 보곤 고개를 돌려 침대에 앉아 있는 초윤을 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많은 의미가 담긴 고갯짓을 끄덕하더니 방을 걸어 나갔다.
단정한 걸음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계단으로 내려가 사라졌다. 그러자마자 마른세수를 하고 있던 사영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제갈설린! 네가 여길 왜 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약선 대협! 정말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무탈하셨사옵니까? 무병하시옵니까? 야위신 것 같사옵니다. 얼마나 고초를 겪으셨으면……. 소녀는 대협께서 사라지신 뒤로 오랫동안 초우(焦憂)하였사옵니다. 당시 이렇다 할 도움을 드리지 못했단 사실을 죄송스러워해야 마땅하건만, 이리 다시 뵐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이 앞서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제갈설린은 사영을 보며 섭섭함을 왁왁 토해 내던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사영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휙 몸을 돌려 초윤에게 다가왔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포권을 하며 침대에 앉아 있는 초윤보다 눈높이를 낮추자, 가만히 서 있던 천오가 스르륵 식탁으로 가선 빈 의자를 하나 빼 왔다. 그리고 설린이 앉은 자리보다 조금 먼 곳에 일부러 덜그럭 소리를 내어 의자를 두었다.
설린은 천오에게 자그맣게 고맙다고 말하며 의자를 가까이 당겨와 앉았지만, 사영에게는 여전히 시선 한 점 주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당한 사영이 설린의 뒤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씨근거렸다. 초윤은 밝게 웃는 설린의 표정 뒤에 숨은 거대한 분노를 짐작하며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렸다.
“사현, 하던 수련을 마저 하러 가거라. 사영, 궁주님을 따라가서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죄드린 뒤 따로 부르기 전까진 네 일을 하거라.”
“스승님!”
“어서.”
“…….”
심기가 불편한 누나 옆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사현이 후다닥 방을 뛰어나갔다. 사영은 한참 이를 악물고 설린의 뒤통수만 바라보다가 쿵쿵거리며 사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제 천오도 잠시 물러나 있으라 말하려는데, 시선을 조금 돌리자마자 눈치 빠른 아이가 선수를 쳤다.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
“오늘분의 수련은 일찍이 마쳤고, 스승님의 담소를 방해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필요하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용히 시중을 들기만 하겠습니다.”
너 아침부터 내 옆에만 있었잖아. 언제 수련을 마쳤다는 거야…….
초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제갈설린과 천오는 그다지 큰 접점이 없어 보이니 옆에 둬도 될 듯했다. 말없이 설린에게 시선을 돌리자 천오가 깨끗한 도자기 잔에 수유차를 따라 가져와선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제갈설린은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 양손으로 쥐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는데, 그다지 입맛에 맞진 않는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면서도 뱉지 않고 삼켰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초윤이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 장성했구나. 네 별호를 들었다.”
“아, 약선 대협께서 제 절맥증을 낫게 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그 뒤로 숙련이 빠르고 너무 무겁지 않은 무기를 찾다가 당파(钂鈀)를 쓰게 되었어요.”
날이 여러 개 달린 창, 당파는 군이면 몰라도 무림에선 쓰는 이를 찾기 어려운 무기였다. 기본적인 무게도 5근부터 시작해서 가볍다고 볼 순 없었는데, 사현이의 거대한 참마도나 은근히 무거웠던 운예검을 생각하면 적당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갈설린다운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설린은 절맥증이 낫자마자 무공에 매진했는지 시간에 비해 굉장한 성취를 얻은 듯했지만, 본질은 진법가였고 책사였다. 천재적인 두뇌로 누구보다 효율적인 길을 달려왔다고는 하지만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목검을 잡아 온 이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또 병환을 이겨 냈다고는 하나 타고난 체력을 넘어서기엔 아직 모자랐다.
그러니 공격보다는 방어와 견제에 특출한 창, 그것도 당파를 쓰는 것이 맞았다. 그래, 역시 영특하고 기특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어쨌든 몸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창 한 자루 달랑 들고 청해성을 건넜네. 서안에서 여기까지 일직선으로 계산해도 거리가 얼마야. 삼천 리는 훌쩍 넘잖아…….
초윤은 저절로 이마에 올라가려는 손을 질끈 주먹 쥐었다. 사영이가 언제 신강으로 왔는지 정확한 시기를 전해 듣진 못했지만, 막 도착했을 당시 설린의 발언으로 보아 사영이 떠나자마자 그 뒤를 쫓아온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영이가 무슨 말을 했기에 삼천 리나 뛰어온 걸까. 초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오에게 차음막을 쳐 달라고 짧게 부탁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층에서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오가 어렵지 않게 외부로 나가는 음파를 차단하자, 초윤이 먼저 물었다. 속상했을 이야기를 마음 편히 털어놓게 하려면 자고로 안정적이고 보호받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했다.
“내 제자가 너를 상심케 했느냐?”
“…….”
하지만 사영에게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 조성되자, 설린이 보인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초윤을 보며 반갑게 웃고 있던 설린이 그 표정 그대로 죽죽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종국에는 엉엉 울며 소매로 무작정 눈가를 벅벅 비벼서, 놀란 초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린을 다독이려 하자 천오가 먼저 설린의 손에 부드러운 면포를 쥐여 주었다. 누가 손수건을 건네는지 보지도 않고 받은 설린이 눈물을 닦으며 서럽게 말했다.
“신강으로 가게 됐다고, 주,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고 그냥 가 버렸어요. 아니, 죽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너 할 일 하고 찾지도 말라고, 돌아올 수 있게 되면 내가 알아서 연락하겠다고.”
“…….”
“가지 말라고 했는데, 안아 주는 줄 알고 안겼다 일어나 보니까 이틀이나 지나 있었어요. 정말, 정말 미워! 아무도 언니가 어디에 갔는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다들 모르고 있었어요. 아무한테도, 저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가 버렸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가까워졌나 보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연신 벙긋거리던 초윤이 결국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어디에 가는지 말해 주지 않고, 기다리지도 찾지도 말라 말한 뒤 사라졌다고.
어딘가 좋지 않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초윤의 첫째 제자가 아무래도 스승의 나쁜 점을 배워 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