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대월(大越)이 멀어 저어되느냐?”
“아닙니다. 그저…….”
천오가 말끝을 어물쩍 늘이며 눈을 피했다.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막 생각났다는 것처럼,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여 조금 초조해졌다. 이윽고 천오는 죄를 고백하듯 힘겹게 말했다.
“그 이후로 무심서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돌보지 못했다니?”
“불귀산맥에 아예 발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의 약재도, 무심서의 가구와 뼈대도 지금쯤이면 전부 쓸 수 없게 되었을 겁니다. 스승님께서 두고 가신 약함도……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약함 이야기가 나오자 사현이의 낌새도 이상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가는 계획과 초윤의 말을 듣던 사현이가 갑자기 어설프게 입꼬리를 당기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름 태연한 척을 하려고 저러는 듯한데, 사현이는 숨길수록 티가 나는 편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과 약함이 망가진 게 뭐가 그리 문제라는 거지? 8년 동안 중원을 그토록 돌아다녔으면서 주기적으로 불귀산맥에 들어가 집 청소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초윤 또한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세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마니 무심서의 꼬락서니도 이미 예상은 했다.
약함은 하오문의 해무당에 놓아둔 기억이 마지막이긴 한데 그 난리 통에 부서졌나. 오래 쓴 느낌이 좋았기에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다지 섭섭하진 않았다.
천오는 그새 그늘진 정도를 넘어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말하고 있었다.
“돌아오시리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만, 돌아오실 곳을 지키진 못했습니다. 스승님이 계시지 않은 무심서를 직접 보게 된다면 정말, 사실이 될 것 같아서…….”
“괘념치 않는다. 도리어 내가 없는 동안 불귀산맥을 들락날락했다면 더 큰일이지.”
아이들이 평화롭게 자란 곳이라 가끔 잊긴 했지만 무심서는 한없이 위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귀환영웅〉 내에서는 ‘히로인을 살리기 위해 이런 험난한 위험도 감수하는 주인공 어필’을 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던 터라 붙은 설정들이 하나같이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홀리고 미치게 만드는 자연 신법부터 온갖 요물에 신수가 득시글거리는 산. 내로라하는 무림 고수들도 들어갔다가 모조리 실종되고, 살아나온 사람들은 모두 미쳐 있어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금지(禁地).
세상이 한 번 되감겼어도 불귀산맥은 이전에 묘사되었던 그대로였다. 초윤이 각종 진법을 떡칠해 놨을 뿐, 그리고 아이들에게 200년의 정수가 담긴 부적을 쥐여 주었을 뿐 위험천만하긴 매한가지였다.
그저 타고난 배경만으로도 위험한데 천오가 열다섯 살일 땐 기어코 이곳에 들어온 침입자까지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섬서성에 해악을 끼치기 위한 마교의 수작으로 생각했으나, 광명교와 초월량까지 알게 된 뒤로는 영 소름이 끼쳤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불귀산맥까지 기어코 밀고 들어오던 마교의 잔당들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무심서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쓰러진 집은 세우고 망가진 물건은 고치면 그만이다. 마음에 두지 말거라.”
“……예, 스승님.”
“적당한 약함을 구해 올라가야겠구나.”
무심서에 묻어 둔 술동이가 몇 개고, 썩지 않게 빚어 둔 환단이 몇 개인데 전부 가지고 가야지.
초윤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끝맺고 식사를 마쳤다. 사현이는 언제 이상하게 굴었냐는 듯 금세 회복해 그릇을 치웠고, 사형에게 설거지를 맡긴 천오는 그 뒤로도 한참 생각이 많아 보였다.
사영이가 돌아올 때까지 잠잠한 침묵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초윤은 천오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맴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부재중에 켜켜이 쌓였을 아이의 상념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바라며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앞으로는 오래도록 함께 할 테니 잃어버린 것도, 놓쳐 버린 것도 전부 되찾아 차근차근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초윤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초윤에게는 무언가를 계획하기만 하면 귀신같이 전부 어그러지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러니까, 저녁쯤에 반질반질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사영이 자신이 해낸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까진 좋았다. 초윤은 흐뭇한 얼굴로 곤륜파의 가맹과 이를 위해 무림맹이 제공하겠다고 내건 조건, 그 안에 숨어 있는 하오문의 노림수와 검문에 대한 욕, 나라연천금강의 현명함, 이때다 싶어 풀어놓는 상세한 고자질(주로 동생들이 얼마나 사영의 골머리를 썩였는지)을 들어 주다가 낮에 상의했던 계획을 말했다.
중원의 정세에 밝은 사영이는 금세 반색하며 어느 지역은 상태가 이렇고, 어디에는 새로운 길이 생겼다고 알려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해부를 통해 무림맹에 소식을 보내 둔 뒤 몇 주가량 더 곤륜파에 머무르고, 무림맹까지는 아이 셋과 같이 가기로 했다. 낭인인 천오와는 달리 남매는 모두 중원에서 한 자리씩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기에 늦지 않게 복귀할 의무가 있었다. 초윤은 명절 연휴가 끝나 귀성하는 자식들이 아쉬운 부모처럼 영 미련이 남긴 했지만, 그만큼 남은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나흘쯤 지난날의 정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느닷없이 등장했다.
검문에 다녀온 뒤로 사영이는 꼬박꼬박 아침마다 나라연천금강을 찾아갔다. 운궁뿐만이 아닌 곤륜파 전체의 가맹이었지만 나라연과 사영이의 관계가 먼저 돈독해졌고, 곤륜파의 장문인이 운궁주를 깊게 신뢰하는 데다가, 운궁이 다른 지파보다 적극적으로 외부 활동을 해 왔기에 가장 표면에 나서게 된 듯했다.
사영은 오전 몇 시진 동안 어려운 이야기를 나눈 뒤 나라연과 함께 초윤의 방으로 돌아왔다. 나라연이 초윤을 진맥하고 나가면 점심을 먹고, 남매는 운궁의 무사들과 어울려 비무를 하거나 스승과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사현이는 검문과 마찰이 생긴 이후로 한결 얌전해진 운궁 사람들과 수련을 하겠다며 일찍부터 나가 있었고, 사영이는 초윤의 앞에 앉아 있는 천오가 이야기를 다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막내의 만행을 고자질했다. 사현이가 일러바칠 때는 제법 전전긍긍하던 천오도 이제는 입을 꾹 다문 채 꿋꿋하게 스승님의 손톱 손질에만 집중했다.
그때, 이 얘기 저 얘기를 다 얽어 신나게 조잘거리던 사영의 얼굴이 퍼뜩 굳었다. 초윤 또한 이곳에서 느껴질 리 없는 기척을 감지하고 깜짝 놀라 한 손으로 가림천을 걷어 창밖을 보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천오만이 연마석과 교도를 들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사영이 황당한 듯 중얼거리자마자, 성큼성큼 곤륜산을 올라온 사람이 운궁의 정문을 쾅쾅 두드렸다. 앞마당 연무장에서 왁자지껄 구르며 수련하던 무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을 향했다.
두꺼운 나무 문이 다시 한번 쿵쿵 울렸다. 담벼락 너머로 숨이 찬, 그러나 낭랑한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 실례하옵니다! 헉, 후욱, 계시옵니까? 』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들은 사현이 기겁한 얼굴로 스승의 방과 운궁의 무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장수흥법이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운궁의 앞마당 안으로 겨우 발을 들인 사람은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짚고 턱 언저리를 소매로 닦으며 연신 감사하단 말을 했다. 선 얇은 몸에 두터운 겨울옷을 겹겹이 두르고도 추위를 다 막긴 어려웠는지 뺨과 귀가 붉었고, 안감에 토끼털을 덧댄 장화에 밟은 눈이 잔뜩 묻어 있는 행색에서 그동안의 고생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곧 꼿꼿이 세우는 등에는 거친 천으로 둘둘 감은 창 한 자루가 메여 있었으며, 왜소했던 체구는 손가락 두 마디만큼 더 자라 균형이 잡혀 있었다.
기록적으로 성장한 제갈설린이 장수흥법을 향해 절도 있는 포권을 취하며 유창하게 말했다.
『 소녀는 섬서성의 제갈 세가에서 온 제갈설린이라 하옵니다!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드렸사옵니다만, 허락받지 않은 미물은 곤륜산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산 아래까지 와서야 알게 되어 죄송스러울 뿐이옵니다. 다급한 용무가 있어 부득이하게도 직접 찾아뵙게 되었사온데, 공사다망하심은 알고 있지만 부디 궁주님께 청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사옵니까? 』
또랑또랑하게 말한 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현을 발견하고 삿대질하며 소리를 높였다.
“어! 임 소협!”
“……오, 오랜만입니다……. 제갈 소저.”
“소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설린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반질거리는 눈으로 씩씩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반사적으로 스승님을 향하는 사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반쯤은 울먹이고, 반쯤은 화가 난 듯 글썽거리던 제갈설린은 어렵지 않게 사영을 찾아내고선 성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
“아, 아니……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야! 너 돌았어?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어떻게 그렇게 갈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 말만 남기고 갑자기 그렇게 가 버릴 수가 있냐고요!”
주먹을 쥐고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트리던 설린의 시야에 문득 흰 인영이 들어왔다. 사영과 같은 창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단정한 자세와 차분한 얼굴, 오후의 햇빛으로 희게 도드라진 피부와 이쪽을 내려다보는 금빛 눈을 한 채 설린의 기억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야, 약선 대협?!”
대경한 제갈설린이 비명처럼 내지른 소리가 운궁의 창공을 한참 맴돌았다. 초윤은 조용히 손을 올려 얼굴을 문질렀다.
천오뿐만이 아니라 사영에 대한 고자질도 들을 때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