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그들은 일반적인 문파처럼 서로 대전 상대를 고르거나 차례로 나누지도 않았다. 사형제 관계 사이의 철저한 예절도 딱히 없었고, 배분도 따로 없는지 수평적이었다. 게다가 모두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니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볼 방법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얼빠진 사현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사이 난전이 시작됐다. 웃통을 벗은 운궁의 제자들은 저마다 맨주먹을 틀어쥐고 서로를 향해 즐거운 주먹과 욕설을 날리며 눈밭 위를 뒹굴었다. 사현은 이 기함할 광경에 입을 쩍 벌린 채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게 중원의 최전선에 걸맞는 기개인가?
정말 실례인 말이지만 그냥…… 그냥 시정잡배 같은데?
여기 그냥 반 각 간격으로 아수라장이 되는데?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승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주먹을 한 대씩 꽂고 멀쩡히 서 있는 놈이 일등이었다. 널브러진 문도들 사이에서 홀로 선 한 남자가 환호성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었다. 찬 바닥에 드러누운 이들이 저마다 혀를 차고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응원하듯 입 맞추어 불렀다. 승자는 바로 사현에게 그나마 정중한 말을 건네주었던 차인강파였다.
차인강파가 코피를 훔치고 흐흐 웃으며 사현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피가 끓는 그의 몸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사현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부상을 입으신 것 같으니 비무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 했다.
그때, 운궁의 정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하게 떼싸움을 하고 편하게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적개심 어린 눈으로 벌떡 일어나 그쪽을 노려보았다. 일찍이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사현은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이 상황의 돌파구가 되어 주길 바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연 순간, 이곳의 언어를 익히지 않은 사현도 모를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 꼬락서니 좀 봐라. 도사는 못 되어도 말코 소리는 들어야 곤륜의 이름에 먹칠은 안 할 텐데, 거지에 난봉꾼도 너희들보다는 기품이 있겠다. 』
그들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멸과 멸시가 서려 있었다.
오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현은 그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한 틈을 타 슬금슬금 물러나며 머리를 굴렸다. 갑작스레 정문을 열고 들어와 시비조의 말을 던진 사람들은 운궁의 무복과 같은 모양새에 색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아까 생각한 다섯 지파 중 하나인 듯했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보아 검문이라는 추론까진 쉬웠다.
그렇다면 검문과 운궁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커다란 문파가 속으론 쪼개져서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긴 한데…….
모용세가나 하북팽가는 오지에 위치한 데다 가문의 규모가 크지 않아 단결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제갈세가는 제갈설린의 숙부인 제갈영환이 배신자로 판명이 나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여러 상단과 문파, 도박장과 투기장이 모인 하오문도 틈만 나면 편을 가르며 싸워 댔고 화산파도 마교의 끄나풀을 도려낸 뒤엔 장로끼리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검문과 운궁의 갈등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뼛속까지 무인인 친구들과 함께 ‘무림’을 헤치고 다닌 경험이 많은 사현은 어렴풋한 의문을 느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은 민간인보단 확연히 짐승 같은 면모가 있었다. 개중에는 강한 자를 만나면 우열을 가려보고 싶어 하는 호승심이나, 강한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무모함도 있었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존본능이었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과 금력이 어찌 됐든 무인은 결국 무공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이었다. 무림인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에겐 공포를 떠나 경외심을 가졌다. 자신보다 강한 이를 추앙하고 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그 곁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바로 무인이었다.
현 무림에서 큰 힘을 지니고 있는 문파들의 시초 또한 같았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개문 조사가 자신의 무리를 만들고 추앙받으며 제자를 들인다, 제자들은 일대 종사의 이름을 등에 업고 덩달아 존중받으며 입지를 다진다, 질 좋은 무공과 풍부한 지원으로 자라난 제자들은 응당 한 사람의 몫을 하는 무인이 되어 소속된 문파의 이름을 다시 드높인다…….
……분명 그럴 터인데, ‘현경’인 활불의 제자들이 같은 문파의 사람들에게 면전에서 이토록 박대당한다?
운궁에 발을 들일 때 얼핏 보게 된 나라연천금강의 경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사현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현이 머리를 굴리든 말든 상황은 급박히 돌아갔다.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하던 이들은 이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거나 주먹을 쥐고 있었다. 사현은 어쩔 줄을 모르고 두리번거리다가 차인단파에게 슬쩍 다가가 이 상황이 정말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나름 온 힘을 다해 은밀히 뗀 걸음은 세 발자국을 못 가서 금세 모두의 눈길을 모으게 되었다.
『 왜 왔냐고 물었느냐? 성결한 곤륜산에 외부인이 발을 들인 지 장장 보름이다. 운궁주께선 그 보름 동안 도대체 누가 왔는지도, 어떠한 목적이 있는지도 알리지 않으셨기에 장문인이 우리를 직접 보내셨다! 』
『 그럼 그쪽도 오기 전에 연락을 했어야지! 이러이러한 연유로 잠시 방문하겠다, 쪽지 써서 전서응 발에 묶어 보내는 일이 어렵소? 무작정 문 열고 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거지에 난봉꾼인데 잘도 맞이해 주겠수다! 말마따나 그쪽이 운궁과 막역하여 서슴없이 문지방을 넘을 사이는 아니지 않소! 』
『 그럼, 들어오자마자 본 꼴이 이 난장판인데 험한 말이 나오지 않겠느냐? 손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도사 된 도리로 마땅한 격식을 지킬 생각은 않고 원숭이처럼 날뛰는 꼬락서니가 난봉꾼이 아니면 뭐야! 이쯤 되면 너희들의 손님이라는 작자도 뻔하다! 이보시오, 도대체 누구기에 이 원숭이 소굴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계신 거요? 』
“예, 예?”
『 감히 우리 운궁의 손님을 모욕하다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임 대협은 지금 중원에 위명이 자자한 천…… 천…… 강파 형, 임 대협 별호가 뭐라고 했더라? 천 무슨 도? 』
『 하하! 꼴을 보아하니 너희들과 똑 닮은 건달에 파락호를 데려와 호형호제하는 모양이구나. 장문인께는 아주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 말거라! 』
『 임 대협이 얼마나 고강하신 분인데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려! 검문 네까짓 놈들은 대협의 도풍(刀風)과 주먹에 맥을 못 추고 녹아 버릴 게 뻔하다! 』
“저, 저기…….”
사현의 미약한 이의 제기는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말싸움에 금세 묻혀 버렸다. 언쟁의 주제는 어느새 임사현의 실력으로 넘어갔고, 본 적도 없는 사현의 실력을 무조건적으로 감싸는 운궁과 깎아내리려는 검문의 대치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의견은 ‘직접 보자!’로 합치되었으며, 남의 싸움을 구경할 때만 행동이 재빠른 무인들은 어느새 사현을 둘러싸고 지름 십 장의 좁은 공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현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검문 측에서 한 무인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차인강파 씨!”
“임 대협은 강합니다. 꺾어 버립시다! 나약한 검문, 입만 살았다!”
“아니, 지금 제가 이러고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 같은데, 전 운궁의 무인분들과 비무를 한다고 했지 이런 일은……. 기, 길상다길 씨, 좀 말려 주실 수…….”
“죽여 버려!”
“말려 주실 수 없겠구나…….”
사현은 울 것 같은 얼굴에 입술로만 웃음을 그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노려보며 어깨를 돌려 검을 쥐었다. 심지어 목검도 아닌 진검비무인 듯했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하지만 처세에 능숙한 누나나 체면에 무관심한 동생이라면 몰라도, 사현은 이 상황에 안 하겠다며 물러날 수 없었다. 오히려 모자란 외국어 실력으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드는 것보단 한두 판 빠르게 해치우고 이제 그만 하겠다며 자리를 뜨는 편이 나을 듯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사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적당히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았다. 오래 잡아 만질만질한 도병에 손을 올리고, 부추겨진 적의를 보내는 상대에게 단정히 묵례했다.
“삼 초, 먼저!”
길상다길이 짧은 중원어 실력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의 자격으로 삼 초의 선공을 양보받은 듯했다. 사현은 조금 웃고, 폐 속의 공기를 모두 비웠다. 순식간에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며 눈앞의 한 사람에게로 모든 초점이 쏠렸다. 허벅지에 힘을 넣자 억센 근육이 무복 위로 도드라졌다. 발 딛고 있던 얼어붙은 땅이 한 치가량 쑥 꺼지고, 사현의 몸이 묵직하게 앞으로 쏘아졌다.
하강을 멈추고 허공에 머무른 싸락눈의 눈송이가 뺨에 닿았다. 사현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허리와 어깨로 발도(發刀)하며 상대의 전신을 바라보았다. 소복이 쌓인 눈에 반사된 햇볕이 임사현의 두 눈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했다. 한순간 느려진 세상 속에선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질겁하여 수축하는 상대의 동공, 황급히 검을 뽑는 팔,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하는 두 발.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친선 비무는 압도적으로 이겨 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했다. 상대방이 가진 기술을 근사하게 쏟아 낼 수 있도록 적당히 받아 주고, 노력했다는 티는 낼 수 있게 해 줘야 노련하단 소리를 듣는다고 서하가 말했다. 사현은 친우의 말에 입각하여 속도와 위력을 깎고 또 깎았다.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었지만, 들어 올린 검에 막혀 주었고, 주먹과 발도 쓰지 않았다. 검과 도가 맞닿으면 힘으로 눌러 찍는 대신 물러났으며 에워싼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끔은 공격을 걷어 내어 그를 가운데로 몰았다.
경지에 오르기 전엔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견디기 어려워 가끔은 주변의 소리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곤 했다. 이는 오감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지금도 버릇이 되어 ‘시끄러운’ 소음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응원을 빙자한 소란을 떠는 사람까지 많으니 알아차리는 게 늦어 버렸다.
그러니까…….
『 그만…… 그만! 』
이상하다. 신체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왜 이렇게 맥을 못 추지? 어디 아픈가? 그럼 비무에 나서지 말지…….
『 더는 못 버티겠소, 그만하라니까! 』
곤륜파의 검법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막기만 하네. 뒤로 빠져 줘도 먼저 오질 않고……. 이곳의 비무는 내가 아는 것과 형식이 다른가? 시작하기 전에 물어볼 걸 그랬다.
『 무슨…… 힘이! 』
아, 혹시 손님한테 위협적인 행동은 할 수 없어서 일부러 힘을 안 내나? 그래, 그런가 보다. 절정 고수는 되어 보이는데 이게 다일 리 없지. 제갈 소저도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이 사람보단 까다로웠는걸. 배려해 주시는 줄도 모르고 전력으로 달려들어 버렸네. 평소 나를 상대해 주는 누나나 서하, 단 형, 그리고 팽가 친구들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만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 아아악! 』
“에?”
사현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우뚝 멈춰 섰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차단했던 세상의 소리가 우레같이 고막을 울렸다. 검문의 무사는 검을 놓치고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사현의 도를 받다가 찢어진 손아귀에선 생피가 줄줄 흘렀다.
“엄, 엄마야…….”
사현은 뒤늦게 현실을 파악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쓰러졌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경악스러운 얼굴로 사현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운궁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검문을 놀려 먹었고, 마주 본 검문의 무사들은 이제 아연실색을 넘어 불구대천지수를 보는 얼굴이었다.
사현이 훌쩍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운궁의 위층 창문에서 이쪽을 보며 기절초풍하는 사영과 눈이 마주쳤다.
누나……. 나 사고 친 것 같아…….
지금의 심정은 전음 없이도 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