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장령은 어두운 방에서 번쩍 눈을 떴다. 눈동자만 옆으로 돌리고 귀를 기울이자 깊게 잠든 부인이 쌔근거리고 있었다. 모로 누워선 베개 밑으로 팔을 넣고 머리를 높게 벤 얼굴, 자는 동안 유난히 더 따끈해지는 체온이 장령의 신경질적인 경직을 차츰차츰 풀었다. 반의 반 각이 지난 뒤에야 장령은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이완시켰다. 자다가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깨어나는 이 버릇을 좀 고쳐야 하는데,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어도 습관적 공포가 몸에 뱄는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깨어나면 늘 귀신같이 일어나던 아내가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는다는 사실은 퍽 기쁘게 다가왔다. 맨손으로 산도 옮기는 사람이 내 곁에선 모든 긴장을 풀고 느슨해진다는 소리 아닌가. 어슴푸레한 새벽, 해조차 밝지 않은 시간에 혼자 말랑한 생각을 하며 아내의 얼굴선을 눈으로 그리던 장령은 어느 순간 뚝 무표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수십 년간 죽을힘을 다해 익힌 고강한 잠행술을 내공 없이 극한으로 펼쳐서 침상을 빠져나왔다. 현경의 고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빠져나오려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금군으로 겹겹이 막힌 황궁을 돌파할 때도 이만큼 긴장한 적은 없었다.
이윽고 발끝이 바닥에 닿고, 함께 덮었던 금침을 벗어났다. 장령의 아내는 심장의 고동과 침 삼키는 소리만으로도 벌떡 일어나선 두개골따위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끝까지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장령은 나라연천금강의 가슴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주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끄응 소리를 내는 아내를 도닥여 주며 다시 재우는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라연천이 다시 깊게 잠든 모습을 확인한 장령은 몸을 수그린 그대로 멈춰 선 채 속으로 30을 셌다가, 공기 한 톨도 흔들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여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낮에 미리 기름칠을 해 둔 창문을 아주 조금 연 뒤 한 줄기 바람처럼 쏙 방을 빠져나와 처마 위에 안착했다. 10초를 기다려 보았으나 아내의 불호령은 들리지 않았다. 장령은 조금 마음을 놓고 은밀하게 건물 밑으로 몸을 던졌다. 가벼운 착지엔 발소리도 하나 없었다.
곤륜산의 다섯 봉우리 중 제일 높은 운궁은 만년설이 쌓여 일 년 내내 얼어 죽을 듯이 추웠다. 게다가 동이 트려면 한 시진이 남았으니 햇빛 또한 없었다. 아내 옆에서 옷을 뒤적거릴 여유까진 없어 얇은 침의 차림으로 나온 장령은 무의식적으로 솜털이 곤두선 제 뺨을 매만졌다. 콧잔등을 가로지른 긴 흉터가 손끝에 걸렸다. 복면도 깜빡했으니 누구도 마주치면 안 되겠다. 장령은 거북한 듯 목뒤를 쓸며 쌓인 눈 위로 흔적 없는 걸음을 옮겼다.
연천과 늘어지게 자도 모자랄 판국에 이게 무슨 짓거리냐. 자조적으로 생각한 장령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신은 아직 아내의 독단적인 판단에 화가 나고 속이 상한 상태였다. 나라연천이 더욱 곤란한 상황에 처하질 않길 바라서, 머저리 같은 운궁의 문도들끼리 모위현에 가면 일을 더 키우기만 할 것 같아서 부탁을 들어주긴 했다만 여전히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에 더해 기껏 다녀왔더니 정마대전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작자가 비실거리는 몰골로 여전히 눌러앉아 있는 꼴도, 이를 제지할 생각도 없는지 가만히 놔두는 부인도 모조리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장령은 시위를 하기로 했다. 오는 동안 산 장신구는 갖고 있어 봤자 할 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건네주었지만 그 뒤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고, 남편 된 몸으로 부인을 혼자 재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은 침상에 들긴 했지만 함께 깨어나고 싶진 않았다. 이불을 덮어 주고 나오기도 했지만 내가 이만큼 골이 났단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을 뿐이지 아내가 고뿔에 걸렸으면 하는 게 아니니 이것도 어쩔 수 없고, 또 해가 뜨고 날 부르면 곧장 찾아가고 말 테지만 이 또한 남편 된 도리로서 부인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니 어쩔 수 없고…….
구구절절 자기합리화를 하며 운궁 주변을 빙빙 돌던 장령은 결국 한숨을 폭 내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친 손바닥으로 흉터가 엮인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착잡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익힌 무공이 있고 견딘 훈련이 있으니 이깟 추위 따위 분명 아무것도 아닐 텐데 자꾸만 뱃속에 찬바람이 드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나는 연천이 곤륜파에 의탁하는 것도 반대했다고…….’
나라연천금강은 오지에 혼자 던져두어도 잘만 살아남을 억센 인간이었다. 대음계와 대망어계를 어겼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파문을 당하고 내공이 봉해진 채 황무지에 내몰렸을 때도, 나라연천은 하루 만에 뚝딱뚝딱 천막을 지은 뒤 오랜만에 고기 맛 좀 보겠다며 사냥을 나갔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남은 건 이 초라한 남자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매일 밤 비도를 들고 나가려던 자신을 붙잡아 말렸으며, 타지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던 장령을 구한 일을 영영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고귀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궁핍한 시간은 장령에게 큰 가시가 되어 아직도 박혀 있었다. 둘만의 혼례를 올릴 때 가락지 하나 건네주지 못한 자신을 혐오하며 주렁주렁 장신구를 사 오는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고, 보릿가루를 넣어 끓인 멀건 죽으로 허기를 채우던 아내의 모습이 한으로 남아 매일 사냥을 나갔다. 권사(拳士)인 나라연천금강에게 가락지와 목걸이는 거슬릴 뿐이며, 잡은 고기는 이제 거의 다 곤륜파 문도들의 입에 들어간단 사실을 알아도 쉽사리 그만둘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참 흉터가 생기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행복하고 안전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황무지에서만큼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었다. 나라연천금강이 위험한 사람들과 연관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를 목숨 바쳐 지킬 필요도 없었다. 장령은 나라연의 남편이었으며, 나라연은 장령의 부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라. 곤륜파의 장문인이 나라연천금강을 찾아왔을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다. 이 강하고 어질며 다정한 사람이 결국은 또 누군가를 등 뒤에 세우고 강대한 위험에 마주 설 것을 알았기에 말리고 또 말렸다. 그런데도 결국은, 끝내 전쟁의 불씨마저 끌어안으려 하는가.
제발 저 약선 초윤만이라도 얼른 딴 곳으로 보내면 안 되나? 장령은 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당장에라도 약선을 쫓아온 마교도들이 문을 박차고 담장을 뛰어넘을 것 같아 불안했다. 자신의 걱정이 이기적인 강박임을 알았고, 또 나라연천은 겨우 자신 따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물임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령은 곤륜파가 밉다 못해 서러울 지경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자기 부인이 가장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어스름한 새벽에 쭈그려 앉아 얼마나 우울해하고 있었을까. 장령은 한순간 옆을 향해 한 손을 털어 냈다. 유엽도(柳葉刀) 세 자루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가 상대의 머리와 가슴, 배의 중앙선을 노렸다.
하지만 눈 쌓인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은 없었다. 그 대신, 근래 들어 낯을 익힌 사람이 손가락 사이에 세 비도를 잡은 채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이런, 놀라게 해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장 대협.”
“…….”
“늦었지만 오는 길에 통역을 맡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의 넓은 아량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령은 아무 대답 없이 팔뚝으로 얼굴 아래를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협용으로 힘을 빼서 던졌다고는 하지만, 서슬 퍼런 칼날이 몸에 박힐 뻔했음에도 약선 초윤의 제자 임사영은 생긋 웃고 있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긴 여정을 함께 한 상대였으나, 장령은 사영과 그다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바보 같은 차인 형제와 길상다길은 임사영의 화술에 껌뻑 넘어가선 서툰 중원어로 온갖 이야기를 나불거렸다만 장령은 거리를 지켰다. 약선 초윤에게 가진 감정부터가 그리 좋지 않았고, 사영처럼 구렁이를 삼킨 듯한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품은 경계심이었다.
그럼에도 사영은 장령을 꼬박꼬박 대협이라 칭하며 말을 걸어왔다. 너무 다가오진 않았지만 완전히 제외하지도 않았기에, 장령은 그 미묘한 거리를 귀신같이 유지하는 사영이 더욱 불편했다.
사영이 걸어온 방향을 가만히 살핀 장령이 말했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갔다 오는 거지?”
“긴밀히 받을 연락이 있었습니다, 대협. 전서응의 날갯짓 소리가 곤히 잠드신 분들을 일으킬까 봐 조금 나가서 맞이했어요.”
“곤륜산은 영산이다. 초원의 허락을 받지 못한 중원의 전서응은 들어오지 못해.”
“하오문의 호의를 담아 말씀드리자면, 저희에겐 오색구름을 뚫을 수 있는 새가 한 마리 있습니다. 곤륜과 중원을 닷새 만에 왕복할 수 있는 유능한 친구죠.”
“입소문이나 사고파는 것들이 신수라도 잡았단 소리야?”
중원을 떠난 지 오래된 장령은 적개심을 담아 말하며 보란 듯이 비웃었다. 하지만 사영은 매끈한 얼굴에 여전한 웃음을 띤 채 어깨를 살짝 으쓱일 뿐이었다.
도발이 통하지 않자, 장령은 조용히 혀를 차며 팔뚝 대신 옷소매로 얼굴 반절을 가렸다. 사영은 그와 열 보 떨어진 거리에서 손목을 까딱이며 비도를 모아 잡았다.
“독문병기는 돌려드리겠습니다, 대협.”
헌앙한 기개에 어울리는 목소리와 예사로운 말투. 그러나 따라붙는 비도술은 아가리를 벌린 독사처럼 매섭기 짝이 없었다.
장령이 던진 유엽도는 말 그대로 버드나무 이파리 같은 탄력성과 깃털처럼 얇은 두께가 특징인 독문무기였다. 절삭력이 우수하고 섬세하게 제어할 수 있으며 한정 없이 몸에 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게가 아주 가벼운 탓에 힘을 싣기 어렵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무공을 뒷받침하는 내공이 탄탄하지 않으면 실바람만 불어도 낙엽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는데, 이 결점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수양을 쌓은 자는 보통 유엽도가 아닌 다른 비도를 주무기로 선택했기에 보기 드문 병기 중 하나였다.
보기 드물다는 말은 익힌 자가 없다는 뜻이었고, 익힌 자가 없다는 말은 즉 배우기 난해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립을 갓 지난 젊은 무인, 그것도 활잡이가 잡자마자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영이 던진 세 자루의 비도는 절묘한 힘을 끄트머리에 매달고 쐐기처럼 날아왔다. 하나는 오른쪽 뺨, 하나는 왼쪽 어깨, 그리고 주공(主攻)인 마지막 하나는 앞의 두 자루를 피했을 시 적격할 수밖에 없도록 허리 중앙을 향해 시간 차를 둔 채 쏘아졌다. 살초(殺招)는 아니었기에 한 손으로 잡아 걷어 낼 수 있었으나, 장령은 옷소매 밑으로 경악스럽게 입을 벌렸다. 아마 두 자루의 비도가 더 있었다면 각기 양쪽 허벅지를 노렸을 것이고, 네 자루의 비도가 더 있었다면 무릎과 가슴까지 연달아 막아야 했을 것이다. 특정한 자세로 피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스스로 틈을 보이게 조여 맸을 것이다.
그리고 장령은 유엽도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유일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너…… 여와 대장이 어디까지 가르쳐 줬냐?”
수십 년 전까지 황궁과 무림을 오가며 내밀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한꺼번에 토사구팽을 당한 명정각(冥灯閣)의 수장, 자신의 옛 상관 여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