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광천마제 초월량이 의관 정리를 마치기까진 그로부터 장장 두 시진이 걸렸다. 보여 줄 사람이 없으니 입혀 주면 입혀 주는 대로, 빗겨 주면 빗겨 주는 대로 무관심하던 월량은 그놈의 호박부터 갑자기 까다롭게 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자리의 광명교인 넷 중 초윤의 눈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오로지 소지뿐이었으며, 소지는 초윤이 월량에게 어떤 위치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니 그저 죽은 듯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지는 호법의 등에 업혀 마교의 보물창고인 포도장각(葡萄障閣)과 그보다 격 높은 오채진전(五彩珍展)을 열두 번씩 드나들었다. 아주 귀한 보옥이었다면 차라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하필 바라는 게 보물전 안에 발에 채도록 쌓인 호박이기에 더욱 골치 아팠다. 샛노랗고 아름답지만 평범한 보석의 산에서 단 하나의 특별함을 찾아 하나하나 빛을 비춰 보았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목숨줄이 닳는 기분이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골라 낸 호박은 일흔여덟 개가 퇴짜를 맞고, 일흔아홉 번째가 되어서야 그럭저럭 됐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썩 흡족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보옥을 들어 올린 월량은 성역을 하얗게 밝히는 서광에 호박의 안쪽을 꼼꼼히 비추어 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제 가슴 앞섶을 젖혀 상흔을 드러내곤, 망설임 없이 그 안에 보옥을 집어넣었다. 위아래의 뾰족한 모서리가 살을 헤집고 단단히 박혔으나 고통스러운 기색은커녕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고, 벌어져 있던 피부는 도리어 황금빛 호박을 감싸고 아물어 아귀를 맞췄다. 배알을 허락받은 소지는 월량의 표정이 미묘하게 화색을 띠는 모습을 홀로 바라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간에 불과했다. 미미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호박 겉면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던 초월량은 갑자기 보석에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얌전히 걸치고 있던 장포를 냅다 내팽개쳤다.
애초에 치장을 담당하는 일개 종복은 언감생심 발도 들일 수 없는 성역이라 보는 눈 없는 호법들과 손재주 없는 소지가 힘을 합쳐 공들였던 단장이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기엔 다들 대형 의식 때문에 여념이 없었고, 지난 8년간 칩거했던 초월량의 하명을 직접 받은 소지보다 높은 지위의 교인도 없었다. 결국 소지는 다시 호법의 등에 업혀 온갖 궁을 돌아다니며 그의 앞에 온갖 비단을 늘어놓았다. 들고 올 사람도 마땅치 않아 좌우호법이 인간으로서 적재량의 한계를 시험해야 했다.
아랫것들이 열심히 옮겨 온 전신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비단을 대어 보던 월량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 성역을 더럽힌 교주는 닦아 버리지 말고 긁어모아라. 살점 하나, 머리카락 한 올, 옷 한 조각까지 주워 담아서 여기 넣어 가져와. 꼭 눈으로 보아만 믿는 불신자들이 있지.”
월량은 손에 든 비단을 뒤로 휙 던져 버린 뒤, 신고 있던 장통화(長筒靴) 앞코로 이슬이 담겨 있던 유리 물병을 툭 쳤다. 새 옷을 건네던 소지는 주패군의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대한 석조상을 힐끗 돌아보며 되물음 없이 말했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저것이 정말 마교에서 가장 고강한 자가 맞더냐?”
“주패군은 30년간 교주직을 지켜 온 마교 내의 최강자입니다. 두 번의 환골탈태를 거쳤으며 현경의 초입으로 추정되었고, 영약과 핏줄에 집착해 내공의 순도가 높았습니다.”
“현경의 초입이라니. 저건 그저 약으로 몸집을 부풀린 머저리였다. 교인들을 통솔한다 해서 놓아 두었더니 내정은커녕 제게 과분한 것이나 탐내고, 중원을 도모한다 하여 가만 보았더니 성공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고. 이젠 야금야금 내 아우를 탐내는 바람에 신선놀음이나 하려던 내 계획이 모조리 망가졌다. 아윤은 다시 천 리 밖에 있으며 데려올 날도 요원하게만 느껴지는구나.”
“…….”
월량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혀를 찼다. 소지는 현명하게 입을 다문 채 또 다른 비단을 공손히 내밀었다. 이를 휙 빼앗듯 받은 월량은 치장을 계속하며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그런 놈이 삼십 년이나 군림했다고? 이백 년 동안 발전은 고사하고 퇴화만 했더냐? 바닥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광명교의 찌꺼기를 먹고 자랐으면 구실은 해야지. 아니, 세상천지를 뒤져 보아라. 잡부가 훔친 유산으로 만든 파생 집단에, 교리도 신도 없이 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허튼소리에 밀리는 종교가 있더냐? 다 같잖다. 머릿수만 많지 방퉁이만 가득한 마교도 같잖고, 이런 것들의 위세에 눌려 살아온 너희들도 다 같잖다.”
“…….”
존제께서 귀애하시는 약선 대협이 당신을 봉인한 뒤 강성하던 광명교를 모조리 지우셨습니다. 학자와 무사를 죽이고, 상징과 무기는 하나하나 깨트리셨습니다. 방대하던 진법서와 주술서, 기물과 신물 또한 한데 모아 불을 지르셨으며 교단의 주춧돌 하나까지 무너트리셨습니다.
그 와중에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종복들이 달아나며 품에 숨긴 천마신공(天魔神功) 하나가 마교의 기원이니, 광명교의 황금기를 일으키고 누려 오신 존제의 눈에 찰 리가 없지요…….
이것 역시 말해 뭐 하랴. 죽은 듯 복종해도 모자랐을 주패군이 암존의 의의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고 칼을 꽂았을 때부터 이 변고를 막지 못한 광명교는 입이 있되 없어야 했다. 사죄를 금지당한 소지는 각종 귀걸이를 벽옥반에 받쳐 내밀며 은근슬쩍 화제를 바꿨다.
“……주패군은 성역에서 얻은 약혈로 제 권위를 공고히 하려 했는지, 당초 얘기해 두었던 장로급뿐만이 아니라 조장급까지도 모두 모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존제 앞에서 분수를 모르고 역심을 품는 자들을 한 번에 솎아 내기 용이하실 겁니다.”
“솎아 내고선? 이 약해 빠진 무녀리에 사시랑이들을 또 쓸 만해질 때까지 떠먹여 키우는 것 또한 내게 바라는 역할이 아니더냐? 깨워 놓고선 쓰레질을 해 달라 호양(護養)을 해 달라 시키는 일도 많구나.”
“…….”
“말해 뭐 하리. 됐다.”
짜증을 내며 귀걸이 한 쌍을 낚아챈 월량은 손등으로 벽옥반을 쳐 내듯 물렸다. 간신히 옥쟁반을 고쳐 잡은 소지는 얼떨결에 존체에 스쳤던 손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월량의 손끝이 닿은 그 짧은 순간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켜 버렸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암존의 육신에 닿았다는 영광도, 욱기를 참지 않는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광천마제 초월량의 육신은 그저 뜨거웠다. 소지의 감각기관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열이 많았다. 극양의 무공을 익힌 자도 이보다 양기만 가득하진 않을 터였다. 이 증상이 문서로 남지 않은 광천마제의 특징인지, 아니면 온전치 않은 주술의 부작용인지, 이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인지 짐작할 수 없어 심경이 복잡했다. 세목(洗沐)을 도운 호법들은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깨어난 직후에는 없다가 천천히 발현한 증상인가?
정작 당사자는 발한의 징조도 없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불길한 직감이 자꾸만 소지의 머리 한구석에서 경종을 울렸다. 조용히 납득하고 넘어가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월량은 곁에서 홀로 불안해하는 소지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치장을 마쳤다. 마음에 쏙 들진 않는 듯 입술 한쪽을 샐그러뜨렸지만 내내 들여다보던 거울을 밀어 치우는 모양을 봐선 드디어 끝이었다. 마침 시기 좋게 다가온 호법들은 월량 앞에 무릎을 꿇고 주패군의 잔해를 담아 온 유리병을 내밀었다. 월량은 개중 눈알과 머리카락이 잘 보이는 하나를 잡아 든 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소지는 그의 등을 따르며 지나간 시간을 가늠했다. 광천마제 초월량이 본신에서 눈을 뜬 시각이 늦은 오후였으니, 항상 환한 성역과는 다르게 바깥엔 깜깜한 밤이 내렸을 것이다. 주패군이 약혈을 나누어 주겠다 장담한 장로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고, 웃대가리가 움직이지 않으니 마교인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대전에 묶여 있을 것이다. 이 지하의 낙원과 오래된 구천이 이어져 있음을 아는 사람은 광명교에 오롯이 몸담은 자밖에 없으며, 통제광이었던 주패군조차 약선의 탈출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완벽하다.
월량의 명령에 따른 일 처리를 재차 확인하며 긴 계단을 올랐다. 성역을 비추던 흰빛이 점차 사라지고, 꺼지지 않는 횃불의 청색광마저 자취를 감추자 드디어 바깥이었다.
천산에서도 가장 높고 험한 영산의 속을 모조리 파내어 만든 성역은 구름이 끼는 높이에 출입구가 있었다. 사람의 키보다 열 배는 높이 세워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껴지는 문은 좌우호법을 끝으로 굉음을 내며 완전히 닫혔다. 월량은 문 아래로 길게 이어진 층층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번엔 내려가는 걸음을 옮겼다.
까마득한 밑으로 줄지어 밤을 밝힌 화로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든 크고 많고 넓게 짓는 방법으로 권세를 자랑하는 마교는 성역 아래 모든 교도가 꿇어앉을 수 있는 평정(平庭)을 만들어 두었다. 드넓은 회동석 바닥에 고두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십만교도는 그 자체로 절경이었으나, 월량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그들 위의 옥좌까지 강림했다.
매서운 밤바람만이 침묵한 이들을 휘감고 귓가에 울렸다. 월량이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어떠한 발언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물며 교도들의 맨 앞줄에 즐비해 조아린 십이 장로조차 허락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먼 위에서부터 머리를 짓누르는 존재감이, 등을 지르밟는 거대한 힘이 그들 위에 군림했다. 먼 옛날의 그깟 전승이 해 봤자 얼마나 하겠냐고, 부활 하나는 흥미로우니 두고 보자고 킬킬거렸던 일이 전생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초조하게 말라 가는 침묵 속에서 숨소리조차 죽여야만 했다.
그때, 월량이 남은 층계 아래로 들고 있던 물병을 뒤집어 쏟았다. 증발해서 엉긴 피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살점, 그리고 서로 엉킨 머리카락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적시고 내려갔다. 주패군의 안와를 채우고 있던 눈알은 계단을 통통 튕겨 내려가선 바닥을 노려보고 있던 장로들의 시야에 굴러 들어갔다.
광천마제 초월량은 옥좌에 앉지 않았다. 그 대신 가만히 선 채 덜덜 떨며 복종하는 이들을 눈에 담았다. 그의 뒤에서 다른 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절을 하던 소지는 월량의 윤곽에서 넘실거리는 기운을 보았다. 그의 어깨에서, 손등에서, 온 살갗에서 일렁이던 황금빛 광채가 진한 용암처럼 위를 향해 뚝뚝 흐르더니 가까이 뜬 태양처럼 둥그렇게 뭉쳐 찬란한 광채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았다. 평정을 밝히던 화로의 불빛도, 하늘에 박혀 있던 별과 달의 여광도 월량의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진정한 광명이란 그들의 눈꺼풀을 뚫고 뇌를 녹이며 의식을 하얗게 덧칠하는 진리였다.
이 광경을 직접 담은 두 눈이 고통의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소지는 뺨을 닦는 대신 순종적으로 바닥에 웅크렸다.
이제 유명무실했던 마교의 속을 채워 넣고 중원을 향해 굴리는 일만 남았다. 그 땅을 다시 한번 초토로 만든다면 약선 대협께서도 자연히 무용함을 깨닫고 절대자의 곁으로 돌아오시리라. 존제의 빛나는 보호 아래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세상을 비옥이 가꿀 지식을 내려주시리라. 교단을 향한 신앙은 없어도 암존에 대한 믿음은 있는 소지가 월량에게 충성을 다하는 유일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