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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27화 (227/257)

227화

어렴풋한 변화를 감지한 사영은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스승님을 의심하는 마음이라곤 한 톨도 없었으나 어쩐지 심경이 복잡했다. 스승님께서 도대체 무슨 핍박을 받아 오셨기에 껍질을 벗겨 낸 듯 변하셨나 싶어 설움이 치민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긴가민가했지만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 본질조차 알 수 없는 감정보단 당장의 선명한 해후를 더욱 만끽하고 싶었다.

사영을 점잖게 다독인 초윤은 고개를 돌려 천오를 보았다. 기대에 부풀어 꼼꼼히 챙겨 온 목욕용품을 맥없이 빼앗긴 천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실망이 짙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조용한 실의에 빠진 것도 잠시, 스승의 시선이 느껴지자 순종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천오야, 오찬으로 가져왔던 황양대미죽(黃洋大米粥)은 남아 있더냐?”

“예,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씻고 나오면 다들 허기질 테니 좀 먹여야겠다. 한 시진 뒤에 내 방에 사영과 사현의 상을 봐다오. 아니지, 너도 내 산보를 돕느라 제대로 차려 먹지 못했을 테니 네 것도 가지고 올라오거라.”

“예, 그렇다면 탕류를 하나 더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구증구포한 흑삼으로 삼귀지민양육(蔘歸地燜羊肉)을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대로 가져와도 괜찮으십니까?”

“약한 불에서 오래 끓이는 탕인데 시간이 오래 들지 않겠느냐?”

“오전부터 불에 올려 두었으니 금방 끝납니다.”

“그래, 부탁한다.”

초윤이 천오의 어깨 위에 가볍게 한 손을 얹자 천오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사영은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견은 내놓지 않았다. 대신 스승에게 온 관심이 쏠려 있는 천오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만 물러가겠다며 초윤에게 포권을 취했다.

초윤은 사영에겐 공기가 차니 머리를 꼼꼼히 닦고 오라는 언질을, 천오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남긴 뒤 동그란 원첩과 수건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붉게 칠한 나무 문을 걸어 닫고 뒤를 돌아보니 널찍하게 치워 둔 방 한가운데엔 나무를 짜 만든 목욕통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넘실거리는 물에선 흰 김이 피어올랐다.

태연한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걸어간 초윤은 침대 옆 탁자 위에 가져온 물건을 놓고, 탁자째로 살짝 들어 목욕통 옆에 두었다. 그리고 홑겹의 옷을 훌렁훌렁 벗어 탁상의 모서리에 걸쳐 둔 뒤 물이 찬 탕으로 들어갔다. 천오가 절묘하게 맞춰 둔 수위는 초윤의 부피만큼 높아져도 출렁일지언정 넘치진 않았다.

초윤은 단번에 전신을 감싼 온수(溫水) 속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모아 물을 조금 떠 올린 뒤 그 안에 얼굴을 푹 박았다. 그대로 잠시 멈춰 있자 멀어지는 제자들의 기척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 거리면 안면근육 정도는 좀 움직여도 괜찮겠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초윤은 머리를 부여잡고 냅다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왜 그런 걸 갖고 싸우는 거야!! 고작 목욕 수발 때문에 그렇게 살벌하게 말싸움할 필요는 없잖아!!

마침 천오의 사회성 발달에 감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겠다,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해서 잠자코 지켜본 게 화근이었다. 애초에 누가 목욕을 돕냐는 이유로 진지하게 갈등을 빚을 리도 없으니 좀 투덕거릴지언정 금방 마무리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웬걸, 마무리는커녕 ‘투덕거리는’ 수준도 아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말끝을 물고 나오는 반박과 사람 속을 살살 긁는 실력이…… 어렸을 때부터 말로 들볶는 능력이 뛰어났던 사영이는 그렇다 쳐도 천오까지 끔찍하게 능숙했다.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말릴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둘 사이에 감정의 골 같은 게 단단히 생길 뻔했다…….

이제 셋 다 성인이 되었으니 어떤 인간관계를 구축하든 초윤이 깊게 관여할 권리는 없었으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물론 함께 자란 가족이라고 해서 평생 무조건 사이좋게 지낼 필요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돌아오자마자 애들 사이가 멀어지면 너무 속상하잖아. 입을 앙다문 초윤은 울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애써 머리를 굴렸다.

사영이는 못 본 사이에 울컥하는 면모가 좀 강해진 듯한데, 이건 아직 감정적이어서 그럴 수 있으니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고. 천오 얘는 분명 절연 안 해서 기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8년 동안 내내 이렇게 지내 온 건가?

아니, 그랬다면 대화를 시작했을 때 사영이가 도와주겠다는 듯 살가운 어투로 말했을 리 없었다. 초윤은 목욕통의 모서리를 쥐고 허공을 응시하며 두 제자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차곡차곡 복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오의 발언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아내게 되었다.

천오는…… 자기 자신과 사영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스승인 초윤과 사영 사이에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초윤에게서 떨어지라는 말을 할 때마다 유독 어투가 날카로워졌으며 조금이지만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이유는 보나마나였다. 얼마 전부터 미묘하게나마 감지하게 된 천오의 집착, 의존, 아, 이런. 정확히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초윤을 향한 천오의 독점적 감정 때문일 게 뻔했다.

이게 무슨…… 높은 지위의 인물을 보다 밀접하게 보필할수록 지위가 상승하는 고대 궁중 세계관도 아니고…….

초윤은 조용히 탄식하며 쥐고 있던 목욕통 모서리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올렸다. 하지만 이런 고민마저도 세 아이가 무사히 살아남았기에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닐까. 와중에도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안도감의 여운이 머리 한구석을 다독여 주었다. 이에 금방 착잡함을 털어 버린 초윤은 다시 한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히려 무엇이든 해 볼 수 있게 된 상황에 감사해야 한다. 이는 순전히 아이들 덕분이니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도리가 맞다.

일단은 셋을 모두 확실하게 안심시켜 주어야겠다. 의존은 불안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니까 안정되면 차차 나아지겠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을 겪어 왔는지 많이 들어 주고, 다시는 나를 수단으로 쓰는 방법이 가장 쉬운 길이라 여기지 않겠다고 많이 약속하자. 그다음 천오를 정신적으로도 독립시킬 계획을 세워야지. 부재가 길어 너무 늦어 버렸지만 못할 일은 아니다.

초윤은 물속에서 꿋꿋이 다짐의 주먹을 쥐었다. 머릿속에서 확실히 방침을 정하고 나니 모든 애로사항이 해결된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에 온전한 재회의 행복감이 다시 성큼 다가왔고, 얼굴엔 실없이 웃음이 번졌다.

이 느낌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쇠붙이가 마찰하여 끼릭거리는 소리가 먹먹한 귀청을 긁어내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백옥을 깎아 만든 거대한 조각상이 구름에서 태어나 땅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천장에 붙박인 채 절박한 손을 아래로 뻗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손끝엔 전신의 굴곡을 촘촘히 적시고 내려온 적갈색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칠하지 않은 두 눈은 텅 비어 공허했다.

초월량은 늦은 낮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하품을 하고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넘기는데, 중간에 어깨가 덜컥 멈췄다. 느슨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니 늑골 사이를 교차하여 관통한 검과 도가 등 뒤로 튀어나와 날개뼈를 가로막고 있었다.

월량은 눈동자만 돌려 제 몸에 날붙이를 박아 넣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대한 기골과 빛바랜 수염, 억세게 악문 이와 갈기 같은 머리카락.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주름으로 팬 얼굴은 눈앞에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월량은 오수에 들면서 까먹었던 일이 기억났다는 듯 그제야 짧은 경탄을 내뱉었다.

“……아, 맞아. 이 일이 있었지.”

“어째서…… 도대체 왜 죽지 않는 거지?”

“난 또 아윤이 함께 욕탕에 들어온 줄 알고 설렐 뻔했잖아.”

“이 몸이 십성공력으로 전개한 천마신공을 한 몸에 받고도 어떻게!”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말든 당장은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성가셨다. 월량은 아쉬운 대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날개뼈와 갈비뼈 사이에 짓눌린 검이, 아마도 마교에서 가장 귀하고 실로 단단했을 검신이, 그리고 이 무기를 두껍게 감싼 검은 불꽃 모양의 강기가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우그러졌다. 검과 도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고 있던 주패군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성에처럼 서렸다. 월량은 핏물에 엉긴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석조 연못의 모서리에 걸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주패군은 잠시 새파랗게 질리더니 재차 얼굴에 독기를 품었다. 양손에 힘을 싣고 월량의 몸에 꽂아 넣었던 검과 도를 단번에 쑥 뽑아냈다. 눈에 띄게 뒤틀린 검날이 허파를 찢어 놓았을 게 분명했으나 상대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찔러 죽일 수 없는 몸이라면, 무참히 베어 조각을 내 주겠다.”

주패군은 평생토록 일궈 온 교단을 이따위 오래된 협잡꾼에게 넘겨줄 생각 따윈 없었다. 소년의 모습으로 신궁을 휘젓는 꼬락서니를 놓아 둔 이유도 재생과 부활에 관한 실마리를 알아내려 했던 것뿐이었다. 이제 정보는 필요할 만큼 모았고, 일신의 능력이 가장 약해졌을 시기를 노렸으니 실패란 없었다.

죽었다 살아나면 내장을 헤쳐 발겨도 소용이 없어지나 보지. 주패군은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진각을 내디뎠다. 무릎 아래까지 들어찬 핏물이 크게 물결치며 연못 바깥으로 넘쳤다. 맑은 담수 대신 선혈을 받아 놓은 대리석 지당(池塘)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던 월량은 주패군의 허벅지 밑을 본 순간 희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죽어라!!”

고강한 무력의 고수가 온 힘을 다해 외치자 비현실적인 무릉도원 같던 성역이 우르릉거리며 일제히 흔들렸다. 하늘을 무너트리고 땅을 쪼갤 일격이 월량의 무방비한 몸에 직격했다. 이 일수(一手)에 초라하게 찢기지 않는 인간은 없었다. 암습의 성공을 확신한 패군이 기괴하게 폭소했다.

주패군은 그 웃는 얼굴 그대로 허리가 접힌 채 뒤로 튕겨 나갔다. 단박에 척추가 꺾여 자신의 실패와 죽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성역의 벽에는 설화석고(雪花石膏)를 깎아 만든 거대한 조각상들이 나란히 즐비해 있었고, 주패군의 시신은 그중 하나가 들고 있던 백색 검에 꼬치처럼 꿰어 걸렸다. 그리고 즉사를 받아들인 몸이 축 늘어지기도 전에 퍽 소리를 내며 형체도 없이 터져 나갔다.

수많은 살점과 피가 조각상의 발치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위로 주패군이 들고 있던 병장기마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월량은 새침한 얼굴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의 극한을 추구한 듯 균형과 모양새로 흠잡을 곳 없는 조각상과 다를 바 없는 나신이 수면 위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고 연한 색이었을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제빛을 잃었고, 유백색의 진주처럼 매끄러운 피부에선 쇠비린내가 진동했으나 그 어떤 요소도 월량의 나긋한 미색과 고상한 몸가짐을 가릴 순 없었다.

월량은 핏물을 헤치고 휘적휘적 걸어 지당의 반대편에 도달했다. 주패군이 날아가면서 그의 정강이와 신을 적시고 있었던 핏물이 둥그런 원 모양으로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주패군의 마지막까지 쭉 이어진 흔적을 못마땅하게 바라 본 월량이 손끝으로 핏자국을 찍어선 빼꼼히 내민 제 혓바닥에 문질렀다.

“아깝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한구석이 가물가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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