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그러나 복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언제까지고 이 상태로 있을 순 없는 법이었다. 천오가 열다섯, 최소한 열아홉 살이었다면 이대로 끌어안고 옆으로 누워 한숨 잤을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다 보니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니, 나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 긴장과 초조함은 얼핏 두려움과도 맞닿아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육식동물과 맞닥뜨린 듯한 위기감, 일방적인 피식을 앞둔 불안감……. 못 본 동안 상당히 심각해진 듯한 천오의 속내를 얼핏 들여다봤기 때문일 게 분명했다.
……분명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더더욱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바른 자세로 적당히 떨어져 앉아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하게 얘기 나누면서 못다 한 사과나 약속도 좀 하고 지난날의 회포 같은 걸 풀어야 하지 않을까? 계속 부둥켜안고 있자니 자꾸 꼼지락거리게 돼서 상당히 부끄럽거든. 멀쩡히 뛰는 심장 확인했으면 인제 그만 일어나 주지 않을래?
초윤은 속으로 부탁 같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올려 천오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닿은 피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의 무게에 자꾸만 평정이 흐트러졌다. 이만 일어나라는 의도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천오는 한참을 꿋꿋이 움직이지 않았다. 초윤의 몸을 끌어안고 가슴 위에 뺨을 댄 그대로 정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을 깔아뭉갠 거대한 돌덩이에 미약하게 저항하는 기분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초윤은 그만 일어나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쩔쩔매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체감상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허리를 안은 힘이 점점 강해지고, 초윤이 자꾸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제 몸을 억지로 붙들어 매기도 어려워졌을 때쯤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천오는 침상 위에 곧게 앉은 채 초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일까. 그 위에 손바닥을 얹자 가볍게 감싸 쥐고 부드럽게 당기는 힘에 기대어 쉬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윤이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초윤의 발치에 내팽개쳐둔 짐을 끌어 허벅지 위에 올린 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석 달에 한 번씩 오는 약재상이 곧 도착한다기에, 서두르면 좀 더 빨리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싶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사이에 의식을 회복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만, 깨어나셨을 때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괘념치 않는다. 네 덕에 여기까지 온 것을.”
“이곳의 식자재는 채소가 드무나, 주식으로 먹는 양고기와 보리에 열(熱)의 기운이 강해 식음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초과(草果)를 챙겨서 먼저 올라왔으니 양육대맥탕을 끓여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 대화를 각오하고 생각을 정리하던 초윤은 천오의 옆얼굴을 황당하게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밥을 하러 간다고?
“다만 공복에 육류부터 섭취하면 거북하실 수 있으니 요깃거리로 산약죽을 먼저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오는 초윤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포권을 취한 뒤 저벅저벅 방을 걸어 나갔다. 조금 전까지 민망할 정도로 붙어 있던 게 무색하게도 초윤과는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가지런한 발소리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정갈하게 멀어졌다. 홀로 남은 초윤은 천오가 나간 문짝만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어딘가 굉장히 휘말리고 단단히 속아 넘어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곤륜파 제자인 듯한 사람이 천오 대신 산약죽을 나무 원첩에 받쳐 들고 올라왔다. 두툼하고 커다란 덩치에 온몸이 투박한 근육으로 덮인 사람이었는데, 험악한 생김새와 짧게 자른 머리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모습이 위험하게 보이진 않았다. 초윤은 본인을 장수흥법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앉은 자리에서 뻣뻣하게 나무 숟가락을 들었다. 전통적으로 티베트에선 수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천오가 서둘러 깎아 만든 티가 풀풀 났다.
산약(山藥)은 한방 용어로, 대중적인 말로는 참마(麻)의 뿌리였다. 얇게 썬 참마와 쌀을 넣고 푹 끓이다가 설탕을 조금 넣으면 되는 간단한 요리는 저기압 고지대라는 환경적 요인과 오래된 쌀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천오가 부린 온갖 꼼수로 점철되어 있었다.
멥쌀로 끈적한 식감을 절제한 죽은 참마 특유의 미끄덩한 질감을 간직한 채 훌떡훌떡 목으로 넘어갔다. 설탕의 사치스러운 단맛이 쌀 자체의 감미를 부각해 입맛을 돋웠다. 초윤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도 잊어버린 채 앞에 놓인 죽 한 그릇을 찬도 없이 전부 비웠다. 잠깐 사라졌던 정신머리는 옆에서 따라 주는 뜨거운 찻물까지 만족스럽게 홀짝인 다음에야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
늦었지만 가져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먹는데 부담스럽게 왜 계속 쳐다보는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의 침묵을 고수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허리를 숙이고 굼실굼실 다가온 흥법이 간신배처럼 살랑거리며 말했다.
“저기…… 약선 대협.”
“…….”
“맛은 있으셨습니까? 서문 도령이 걱정을 많이 하던데…….”
서문 도령? 낯선 호칭에 초윤이 속으로 입을 떡 벌렸다. 그와 동시에 이 남자가 대충 옆에 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초윤은 어떻게 대답해야 ‘초윤’ 같을지 짧게 고민한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충분히.”
“거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지금 서문 도령이 끝내주게 맛있어 보이는 고깃국을 한 가마니 끓이고 있으니까……!”
잔뜩 신난 얼굴로 벙긋 웃은 흥법은 다 먹은 그릇을 착착 챙기더니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초윤은 괜히 주위를 힐끔거린 뒤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몰두하다가 무심코 내공을 쓰지 않도록 본연의 힘에만 집중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단단한 궁의 두꺼운 벽을 몇 겹이나 내려간 뒤에야 초윤은 목표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회수해 왔다! 이제 약속한 대로 탕 한 그릇은 내 거야!]
[어떠셨습니까?]
흥법의 기분 좋은 목소리에 이어, 천오의 질문은 한 박자 성급히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내게 요리를 해 주다 보니 긴장했나. 간을 못 맞추든 귀퉁이를 태우든 다치지만 않으면 뭐라 한 적 없는데. 안쓰러운 마음에 괜히 입맛이 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대화는 착착 들려왔다.
[내가 맛있으시냐고 여쭤봤거든? 그랬더니 ‘충분히’, 이러시던데. 허리 딱 꼿꼿이 펴고, 눈 딱 깔고, 찻잔 딱 내려놓으면서 ‘충분히’. 이야, 말 한마디도 뭔가 되게 있어 보이게 하시대. ‘충분히’. 어? 목소리도 딱 차분해 가지고.]
[후…….]
나 저렇게 느끼하게 말했어?
기겁한 초윤이 한 손으로는 가슴을 쥐어뜯고 다른 손으론 제 입을 막았다.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고자 ‘초윤’의 말투를 크게 벗어나지 말자고 결심하긴 했지만, 타인의 몹쓸 재현을 통해 자기 행동을 돌아보게 되니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천오는 담담하게 안도의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더불어 주방에는 흥법과 천오만 있는 게 아니었는지, 한 무리 남자들의 굵고 우렁찬 아우성이 들려왔다.
[불공평하다! 흥법이 저 새끼만 고깃국 얻어먹고! 저녁 끼니는 내가 가지고 올라갈 테니 나도 줘!]
[억울하면 네가 허벅지 싸움 이기든가. 져 놓고서 불공평하긴 뭘.]
[애초에 이만큼 끓여 놓고서 운궁에 다 돌리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 네 스승님 보니까 이거 한 그릇도 다 못 드시게 생겼구만. 어? 사람 팔이 요만한데 뱃구레는 크겠냐고.]
[계속 말씀드렸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천오가 입을 열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천오의 목소리와 조리 기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선명하게 귀까지 도달했다.
[석반은 제가 직접 올릴 것이며, 양고기와 보리를 주로 드시는 분들께 양육대맥탕은 더 이상 보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누가 보양식으로 먹겠다고 했냐! 고깃국! 고깃국 달라고! 이런 냄새를 풍겨 놓고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고!]
[더불어 경솔한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천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소리로만 주방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초윤의 머릿속엔, 어째선지 초윤이 있는 먼 위층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천오의 새까만 시선이 그려지는 듯했다.
[……스승님께서 귀담아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에 등줄기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 버렸다. 초윤이 정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무서웠고, 몰라도 무서웠다. 이는 함께 있던 곤륜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탕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들려오던 찰나,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람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너네는 환자 밥도 뺏어 먹고 싶냐?]
[헉, 궁주님!]
[으이구, 한심한 새끼들……. 처먹을 게 없어서 하루 꼬박 산 타다 온 놈이 만든 환자 밥까지 탐을 내. 으이구……. 너네 동기들은 지금 사막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는데 고깃국 타령이 입으로 나오냐? 싹 나가! 나가서 눈밭에 대고 그 둔해 빠진 몸뚱이나 굴려!]
매섭게 호령하는 목소리, 나라연이었다. 나라연은 쯧쯧 혀를 차며 빠악 소리가 나도록 제자들을 후려쳤다. 시원하고 단단한 타격음으로 보아 뒤통수를 한 대씩 갈긴 듯했다. 왠지 반나절 만에 곤륜파 운궁이 평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졸지에 얻어맞은 제자들이 우루루 주방을 빠져나가고 들려오는 건 솥을 젓는 국자 소리밖에 없을 무렵, 나라연이 툭 말했다.
[얼마나 남았냐?]
[한 시진 안으로 끝납니다만, 맛이 밋밋할 것 같아 몇 가지를 더 하려고 합니다.]
[방금 일어난 사람이 다 먹진 못할 텐데?]
[……그래도 허전한 상을 드릴 순 없습니다. 남는다면 조금 더 보태서 운궁의 석반으로 내놓겠습니다.]
[……네놈이 지금 이걸 모를 리가 없잖아. 오매불망 기다리더니 왜 갑자기 소심한 척을 하고 난리야? 잔말 말고 그 탕만 완성되면 참파랑 같이 갖고 올라가.]
무언가를 꺼내 입에 문 듯 나라연의 발음이 불분명해졌다. 천오가 뭘 모른다는 거지? 엿듣는 초윤의 몸이 슬며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좀 더 잘 들릴 일은 없겠지만, ‘스승이 없는 곳에서 천오의 언행’이란 초윤의 온 관심을 끌고도 남았다. 마음 같아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를 대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이 초윤의 자세를 벼락같이 교정해 버렸다.
[네 스승이 어지간히 심심해하고 있잖으냐. 덕분에 관찰당하는 기분이니 여기 처박혀 있지 말고 후딱 올라가서 미주알고주알 말해 드려라. 옆에서 고사를 지낼 땐 언제고, 또 뭐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어?]
다 듣고 있단 사실을 들켰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무림 고수 너무 무서운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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