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00화 (200/257)

200화

“그게, 괜찮아질 일이 아닐 텐데…….”

물론 마음의 상처가 나았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아예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는 영 이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이 독립을 입에 담을 때마다 어딘가 울적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애가 티를 내지 않게 된 건지, 아니면 진짜 뭔가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 없는 어린 천오의 형상을 연신 힐끗거리며 머리를 굴렸다. 초윤은 맞은편의 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뒤뜰의 노란 꽃으로 눈을 돌렸다.

“신물은 모든 소원을 경극처럼 이루어 주진 못한다. 그저 바라는 이의 염원에 필요한 재료를 차곡차곡 모아서 섞고, 이를 다시 하나의 세계로 태어나게 할 뿐이다. 어쩌면 주천오가 정말 기억 없이 되돌아왔을 수도 있지. 또 어쩌면 나처럼 자아를 죽인 채 어린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두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서문천오와 차차 섞였을 수도, 혹은 천오라는 아이가 타고나길 무정할 수도 있다.”

“…….”

“이는 너와 내가 이곳에서 입을 놀려 봤자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저 마음에 담아 두거라.”

부드럽고 상냥하진 않아도 사분사분한 의도를 지닌 말이 하윤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다독였다. 한동안 묵묵하던 하윤은 초윤을 따라 찻잔을 비웠다. 흰색 도자기 찻주전자를 들어 따라 주는 손길을 양손으로 받으며 조심스레 다음 의문을 꺼냈다.

“그렇다면…… 신물을 쓰지도 않은 당신은 어떻게 이전 세계의 기억을 유지한 건가요? 이것도 신물이 천오한테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한 건가요?”

“…….”

‘나와 너의 연이 생겼으니 데려왔다’는 말도 이상했다. 아예 다른 세상의 인물과 인연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으며, 도대체 어떻게 신물이 바라는 바를 알고 ‘나 같은 사람’을 골랐을까?

얘기하는 바를 들어보면, 초윤은 〈귀환영웅〉의 기억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귀환영웅〉의 주천오가 신물을 사용했으니 모용서가 여전히 회귀자라는 사실은 이해하기 쉬웠지만 약선 초윤은 그 속에서 엑스트라 조연에 불과했다. 심지어 본인 입으로 주천오와 대화한 적조차 없다고 말했으니 아예 관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잠깐만. 관련이 없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윤은 옆을 돌아보았다. 아플 게 뻔한 손으로도 하윤을 꾹 쥐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옹그린 작은 몸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를 어떻게 만났던가. 청명 여관, ‘초윤’이 약초를 찾아 운한산으로 출타를 나온 와중 멸문지화를 당한 서문세가 근처를 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때도 생각했듯이, 초윤은 어린 천오를 구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천오가 몸을 숨긴 진법도 초윤이 설치해 준 물건이라 모를 리가 없었고, 산 밑의 분위기는 서문세가의 일로 온통 어수선했으니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초윤’이 한 번만 나서서 행동했다면, 그 이후로 천오가 겪었던 최악의 시간만큼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데려온 애들도 무서워서 손 못 대고 내버려 둔 사람이 할 수 있을 행동은 아니지.’

꼬질꼬질하던 사영과 사현을 떠올린 하윤은 저절로 모이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래도 이제 와서 생각난 거지만, 남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귀산맥과 진령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뚫고 심부름을 다녀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불귀산맥을 정말 안전한 장소로만 알고 있었고, 둘이서만 집을 지킬 때도 요괴 따윈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초윤이 정말 최소한의, 자기 딴에는 최소한이라고 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한 정성을 쏟아 아이들을 안전하게 해 주었다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남매는 남매고, 천오는 별개였다. 대답 없는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윤은 세모꼴이 된 눈으로 초윤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가슴에 번지는 멍울 같은 예감을 느껴야만 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초윤은 두려웠다고 실토했던 아까 전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찻잔을 그러쥔 초윤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내 불찰로 허망하게 죽어 버린 아이들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 자리에 앉아 바깥만 내다보며 답 없는 문제만을 한참 동안 가늠했다. 그러던 도중 처음 보는 아이가 친우를 살려 달라며 등에 업고 무작정 이 산에 올라오고 있더구나. 몸은 어렸지만 눈은 낡았고, 입은 물렀지만 속은 독했다.”

모용서가 중독된 당운금을 살리기 위해 초윤을 찾은 에피소드구나. 하윤은 어린 천오의 손등을 가만히 매만져 주며 이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걸맞지 않은 나이에 고된 일을 겪은 이들이 으레 그렇다만, 그 아이는 명백히 남달랐다. 내가 이곳에, 불귀산맥에서도 두망산의 이곳에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 뒤로 나는 그 아이의 행적을 쫓았다. 그 아이의 몸에 서린 상서로운 기운을 밝혀 냈고, 신물이 행하는 기적에 내 의지로 휘말리며 다소 간섭했을 뿐이다.”

“……그게 가능해요?”

“화경이 이치를 깨닫는 경지라면, 현경은 체득한 이치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다. 이백 년 살아 숨 쉰 값은 해야지.”

초윤의 오만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윤은 끝내 날 선 반응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초윤이 강하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초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남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부터 폐를 달군 듯 끓어오르는 감정은 영 삼키기 어려웠다.

“당신이 그 정도로 강하면……. 완전히 다른 곳에서 살던 나를 찾아서 끌어들일 정도로 강하고, 당신 기억도 다 갖고 있을 정도로 강하면. 그렇게 온갖 일을 다 할 줄 알면.”

“…….”

“도대체 그 사람한테는 왜 그렇게 속절없이 휘말린 거예요? 애들 살리고 싶었다면서요. 그런데 왜 애는 찾지도 못하고,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덜덜 떨면서 수그린 거예요? 직접 칼도 박아 넣었다면서요. 봉인도 했고 이제 벗어났다면서요. 자그마치 백오십 년이나 지난 사람인데, 해동이며 동영이며 다 다녀 봤다는 사람이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왜…….”

울분을 못 이겨 쏟아 내기 시작한 말이지만 토해 내면 토해 낼수록 제 속을 긁어 대는 느낌이었다. 하윤은 초윤을 몰아붙이듯 질문을 퍼부으면서도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먼저 수그러든 사람 또한 하윤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눅눅하게 젖어 들자, 하윤은 끝내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침도 삼키기 힘들 정도로 목이 메고 감은 눈시울은 화끈거렸다.

“나는…….”

“대답…… 대답하지 마세요. 알아요. 좀 떨어져 있었다고 해결될 일 아닌 거 안다고요.”

잔에 따른 물이 넘치듯, 하윤에게도 파편처럼 흘러들어 온 초윤의 기억이 있었다. 약선 초윤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광명교에서 자랐다. 그 교단의 살아 있는 신, 계승되는 전설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가혹하게 학대당했다. 그러다 청소년이 되자 족히 일백 명에 가까운 동기들과 함께 연신단을 받아먹고 암실에 갇혔다.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죽어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면서도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그중에 가장 의지하던 의형만은 살아남아 희망을 되찾나 싶었지만, 암존으로 거듭난 후 본색을 드러낸 초월량은 초윤에게 유일한 품이자 가장 깊은 지옥이 되어 버렸다.

초월량은 천성이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는 칼날 같은 혀로 천천히 초윤을 깎아 내리고 베어 냈다. 벗겨 내고 갈라냈다. 그러다 끝내 속속들이 해체되어선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 초윤이 직접 제발로 다가오길 바랐다. 자신이 두른 가시덩굴에 꿰여 피 흘리면서도 얽매이길 원했다.

초윤은 그의 곁에 있을수록 유독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초월량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었다. 볼품없고 쓸모없으며 나약하고 미련한 자신을 보듬어 안고 그럼에도 예쁘다 말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부당한 말을 듣고 억울한 일을 겪으며,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끔찍한 짓을 당하면서도 그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 것 아닌 기억의 단편만 보아도 뻔한데 당사자는 어땠을까. 초윤의 속에는 그와 함께 한 방대한 시간이 모두 공포심으로 변질된 채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당장 주륜각에서 초월량의 이름을 들은 초윤의 반응만 보더라도 분명했다.

그리고 현대의 지식을 지닌 하윤은 초윤이 당해 온 일을 명확한 언어로 지칭할 수 있었고, 이런 일에 장시간 시달린 피해자가 어떤 행동 양식을 보이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에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절절히 체감해 온 바가 있기에 모를 수 없었다.

무공의 경지가 정신의 견고함을 나타내진 않는구나. 하긴, 무위가 올라가면서 정신건강까지 함께 향상되는 거였으면 무협소설에 갈등이 왜 있겠어. 다들 무공 수련하다가 도 닦고 제각기 갈 길 갔겠지.

하윤이 한숨을 폭 쉬고 자세를 바로 해 앉자, 그의 안색을 살피던 초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강해. 암존은 전대(前代) 인물들의 시간이 쌓여 대를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존재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전례 없이 강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내가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분명 중원은 물론이고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았겠지.”

“……그런가요.”

“그가 봉인되어 있을 때 신물이 쓰였기에 망정이지, 명림서하의 세계에서 형님이 깨어 계셨다면 너를 비롯하여 네가 끔찍이 아끼는 그 아이도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형님은 끝까지 신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셔야 한다. 반드시, 절대로 주천오가 삼킨 신물이 그에게 넘어가선 안 된다. 알았느냐.”

아직 신물의 사용 조건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만한 힘을 가진 물건이 그딴 사람에게 들어가는 일은 하윤에게도 사양이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초윤과 나눈 대화를 누군가에게 발설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천오가 언급되자, 하윤은 몸에 밴 대로 다시 어린 천오의 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명림서하의 세계에서 그가 깨어났다면. 초윤이 언급한 가정 한 줄이 하윤에게 또 새로운 의문을 부추겼다.

기존의 세상에서도, 〈귀환영웅〉에서도 암시 하나 없던 초월량의 봉인은 어째서 지금 갑자기 깨졌을까?

(200)============================================================

2